그들은 체제의 부속품 되기를 거부한다
  • 백욱인│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
  • 승인 2013.12.31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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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통한 ‘잉여짓’으로 문화 공유…자기 형성의 주체인 동시에 ‘루저’

‘잉여’로서의 청년은 왜 탄생하게 된 것일까. 현재 일군의 사회학자들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의 변화상에 주목하며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백욱인 교수도 그런 ‘잉여 담론’의 주요 논자 중 하나다. 백 교수는 ‘잉여’가 탄생한 사회학적 배경으로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와 인터넷 환경을 든다.

‘잉여’라는 말은 사실 엄밀한 의미의 사회과학적 개념은 아니다. 계급이나 성, 학력, 나이 등 인구학적 변인을 기준으로 설정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상을 가리키는 하나의 호명으로, 차라리 문학적 수사에 가깝다. 지금 이 시대 청년들이 처한 사회문화적 상태에 대한 자각이 어떻고 이와 관련된 행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개념이다.

‘생존’ 위해 자기 계발 하는 청년들

그럼에도 지금 청년을 둘러싼 사회학적 담론에서 ‘잉여’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잉여의 탄생과 관련되는 사회학적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자기 계발 논리에 근거한 무한 경쟁의 심화, 그리고 인터넷 미디어의 일상화다.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한국 사회는 ‘바깥’으로부터의 경제 개방을 강요받는다.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편의 급물살에 휩싸인 것이다. 그 결과 사회의 양극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특히 당장 미래의 삶을 개척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청년들의 삶은 ‘자기 계발’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틀에 급속도로 빨려들게 된다.

2013년 5월 현재 15~29세 청년층 인구는 955만명이다. 이들 중 비경제활동인구는 541만명이다. 전체 청년 인구 중 비경제활동인구의 비율은 56.7%로 매년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진출할 연령대인 25~29세 청년이 333만명인데, 이들 가운데 비경제활동인구는 84만명이다. 네 명 중 한 명꼴로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은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따라 좋은 일자리는 점점 희소해진다. 이른바 ‘좋은 직장’으로 꼽히는 대기업이나 첨단 기술 분야 등에 취업하는 인원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기를 거부하거나 취업을 유예하는 인구가 점차 늘어난다. 스스로를 ‘88만원 세대’라고 부르는 자조 속에는 월급이 88만원 이상 되지 않으면 취업을 안 하겠다는 의지도 포함돼 있다. 물론 그 한편에는 88만원이라는 저임금 노동을 감수해야만 하는 젊은이들도 존재한다.

청년들은 자신을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만들 것을 요구받는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고단한 자기 계발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와 경쟁이 벌어진다. 몸, 얼굴, 체중, 옷, 성격, 취향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 결과로 청년들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 자기 계발을 지속해야만 한다. 이러한 궤도에 동참하기 싫거나, 동참할 수 없거나, 동참을 거부하는 행위의 결과가 결국 스스로를 잉여로 자처하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잉여의 의미는 단순히 ‘청년 실업 인구’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들은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사회문화적 행위(‘잉여짓’)를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과 공감대를 공유하기도 한다. 잉여는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고 즐기는 ‘문화적 잉여’들이기도 하다.

지금 청년에게 인터넷이란 매체는 삶의 필수품이다. 학생이든 아니든, 취업을 했든 하지 않았든 마찬가지다. 적어도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는 인터넷을 마주한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와 포털을 이용하면서 그들은 콘텐츠를 올리고 댓글을 쓰고 ‘좋아요’를 누른다. 특히 ‘잉여’들의 생활에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더욱 큰 영향을 미친다.

대다수의 젊은 잉여들은 취업을 하고 있지 않거나 임시직으로 일한다. 노동 시간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 그러한 ‘잉여 시간’이 그들의 문화적인 ‘잉여짓’과 연결된다. 인터넷과 사이버스페이스라는 새로운 공간은 그들이 ‘잉여짓’을 실행하고 유통하며 소비하는 현장이다. 진보 성향의 ‘나꼼수’를 향유하는 것이든 보수 성향의 ‘일베’에 접속하는 것이든, 모두 잉여 문화의 다른 표현이다. 보수-진보의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게, 잉여들 간에는 그들을 동일한 정체성으로 묶어주는 미디어를 통해 문화 코드를 만들고 소비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대항적 흐름 형성할 수도

이런 ‘잉여짓’이 현대 정보자본주의의 이윤을 창출하는 밑거름이 된다. 그들이 매일 수행하는 ‘잉여 활동’이 구글·페이스북·네이버 등 IT 기업의 이윤 창출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주요 포털, SNS 등의 ‘웹2.0 서비스’는 잉여의 자발적인 참여와 소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잉여들의 활동은 IT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기본 원료로 축적되고 새로운 상품으로 변형된다.

2014년의 ‘잉여’ 존재는 향락을 향한 욕망을 버리고 스스로 택한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행동가가 아니다. 1960년대 유럽의 히피처럼 자발적으로 체제를 부정했던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들은 체제 안으로 포섭되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밀리고 배제된 ‘수동적 실업자’이자 ‘불안정 노동자’다. 그래서 현재의 잉여는 자기소개서를 쓰고 스펙을 쌓던 ‘자기 형성’의 주체지만 동시에 취업 경쟁에서 진 ‘루저’이기도 하다.

그들은 경쟁 체제를 스스로 거부한 자가 아니라 경쟁의 결과물이다. 이들은 다가올 미래를 예측해 아예 경쟁의 틀로 다시 들어갈 시기를 유예하면서도,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체제의 부속품이 되기를 거부한다. 잉여가 잉여로 존재하면서 잉여 존재로부터의 이탈을 계속 유예하는 이유는 결국 체제의 부속품이 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한 공포 때문이다.

잉여는 생산의 체제 안에 직접적으로 포섭돼 있지 않다. 하지만 생활의 영역을 통해 체제와 연결돼 있다. 기성세대에 비해 청년층은 문화적으로는 훨씬 활성화돼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에 걸맞은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이 때문에 현재 젊은 잉여는 사회에서 제한된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잉여의 ‘지속적 유예’가 집단적으로 이뤄지고 이에 대한 논리적 주장이 탄탄해지면, 잉여가 하나의 대항적 흐름을 형성할 가능성도 있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지속적 잉여의 상태를 유지하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잉여 자체의 에토스(특정 사회 집단의 기풍·관습)를 축적하는 세대가 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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