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죽여라” vs “학살을 멈춰라”
  • 김민신 인턴기자 ()
  • 승인 2013.12.3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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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일부 아파트 주민들, 길고양이 처리 놓고 갈등

동장군의 기세가 날로 매서워지고 있는 요즘 도심 속 길고양이들도 겨울나기 준비에 한창이다. 따뜻한 거처를 찾아 건물 안으로 파고들다 보니 주민들 불편도 이만저만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찢어놓는가 하면 전기선을 잘못 건드려 화재를 일으키기도 한다. 수도관을 긁어 망가뜨리고 울음소리로 신경을 건드리는 일도 빈번하다. 이에 따라 길고양이를 살(殺)처분하려는 주민과 이를 막으려는 주민이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서울시는 시내에 서식하는 길고양이 수를 25만 마리로 추산한다.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에 위치한 한강맨션에선 2006년 인터넷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일부 주민이 길고양이들이 서식하던 보일러실 출입구를 봉쇄해 그 안에 있던 길고양이 수십 마리가 집단 폐사한 것이다. 밖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용접해 고양이를 구출할 수조차 없었다. ‘한강맨션 고양이 사건’은 이후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강구하는 시발점이 됐다.

ⓒ 시사저널 우태윤
서울시, 매년 9억 들여 길고양이 중성화 수술

최근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길고양이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 일부 아파트 주민이 74동 지하실을 거처로 삼은 길고양이들을 쫓아낼 요량으로 지하실 문을 폐쇄키로 한 것이다. 2013년 6월에는 지하실을 봉쇄하는 바람에 미처 나가지 못한 길고양이들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 바싹 마른 사체 중엔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도 있어 평소 길고양이를 돌봐주던 주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때 시작된 갈등이 반년이 지난 12월 말까지 계속된 것이다. 특히 이번엔 동물 보호 단체와 네티즌까지 가세해 싸움판이 커지고 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74동의 지하실을 폐쇄하자”고 주장하는 주민들은 길고양이로 인한 불편을 호소한다. 특히 길고양이의 울음소리와 배설물 그리고 주민이 버린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뜯어놓는 행동 등을 꼽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주민들의 마찰을 줄이려고 길고양이를 위한 새집도 만드는 등 나름의 유인책을 써봤다”며 “그럼에도 (길고양이를 돌보는 주민들이) 유독 지하실을 고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캣맘(Catmom; 동네에서 길고양이에게 정기적으로 밥을 제공하는 주민)들의 의견은 다르다. 이 일대에서 고양이를 돌보는 한 캣맘은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기 때문에 한번 보금자리로 삼은 곳을 잘 떠나지 않는다. 새집을 만들고 무작정 거기 살라는 건 고양이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며 “애초에 나갈 수 있는 문이 있었다면 지난 6월에도 고양이들이 죽었겠느냐”고 항의했다.

지루한 공방전 끝에 지하실을 오후 1시부터 5시까지만 여는 걸로 잠정 합의가 이뤄졌다. 그럼에도 캣맘들의 반대는 여전하다. 시간관념이 없는 고양이들이 미처 지하실을 빠져나가지 못할 사태를 우려하는 것이다. 또 다른 주민은 “(길고양이로 인한 갈등이) 여기 말고도 도처에서 벌어지는데 매번 죽인다고 근본적인 해결이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시사저널 우태윤
“TNR 실시 후 깨끗한 밥 주기 병행이 효과적”

의견 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면서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아파트 관계자에 따르면 ‘압구정 현대아파트 길고양이’ 사태가 인터넷에 퍼진 후 74동 주민 대표는 외부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다고 한다. 서울시에서도 “마치 동물을 학대하는 몰상식한 사람처럼 몰고 가서 주민들이 받는 상처가 크다”고 설명했다. 어렵게 전화 통화가 된 캣맘 역시 이번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고 토로했다. 캣맘은 “마녀사냥을 보는 것 같다”며 “주민들끼리 감정싸움을 할 게 아니라 합의점을 찾아 좋은 선례를 만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도시의 길고양이는 항상 위험에 노출돼 있다. 대부분 차에 치어 죽거나 겨울에 얼어 죽는다. 일반적으로 고양이는 생후 5개월 즈음에 발정기가 시작된다. 임신 기간은 9주. 보통 1년에 4, 5번 정도 출산이 가능하다. 한번 출산할 때마다 평균 여섯 마리 내외의 새끼를 낳는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개체 수가 기하급수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서울시는 2009년부터 시내 길고양이를 대상으로 중성화수술(TNR) 작업을 해왔다. TNR은 Trap(포획)-Neuter(중성화)-Return(재방사)의 줄임말이다. 길고양이를 포획해 중성화 수술을 한 후 포획했던 장소에 다시 방사하는 시스템이다. 수술을 마친 고양이는 한쪽 귀 끝을 잘라 표식을 해둔다. TNR은 점점 늘어나는 길고양이의 개체 수를 인도적으로 줄일 수 있어 해외에서도 시행 중이다. 서울시는 매년 9억원의 예산을 들여 길고양이에게 TNR을 시행한다. 수술을 받는 고양이는 매년 4000~6000마리에 이른다.

TNR이 고양이 개체 수를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도 있다. 서울시 동물보호과 관계자는 “공공기관에서 전부 맡기 어려운 일”이라며 “개체 수 조절은 전체 길고양이의 70% 이상이 중성화되었을 때 효과가 나타난다. 하지만 현재의 예산과 인력으로는 TNR이 산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동네 주민이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기도 했다. 그는 “먹이만 주는 것은 결과적으로 개체 수 조절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반드시 TNR을 해준 후 돌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양이는 동물보호법에 따른 보호 동물이다. 따라서 학대하면 처벌받는다. 2013년 3월 일부 개정된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고의로 사료 또는 물을 주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는 등 농림축산식품부가 정한 정당한 사유 없이 동물을 학대해선 안 된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정한 정당한 사유는 사람의 신체에 대한 위협 혹은 재산상 피해를 줄 경우다.

한국고양이보호협회 박선미 대표는 길고양이를 포획·살처분하는 것은 비인도적이며 비효율적이라고 주장한다. 박 대표는 “한 구역에 사는 고양이를 모두 죽이면 새로운 개체가 유입된다”고 말했다. 이른바 ‘진공 효과’다. 길고양이에게 도시는 생존의 전쟁터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영역 싸움도 치열하다. 이때 일정 지역 안에 있던 고양이 집단을 소탕할 경우 풍부한 먹이를 찾아 다른 지역 고양이들이 빠르게 유입된다. 무주공산을 차지한 고양이들은 이전보다 급속도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박 대표는 “결국 개체 수 조절에 실패할 뿐만 아니라 서울시에서 예산을 들인 TNR의 취지도 무색해진다”며 “TNR 실시 후 깨끗한 밥 주기를 병행하면 울음소리나 음식물 쓰레기봉투 뜯기 같은 민원도 해소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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