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목소리는 어떤 악기보다 강렬하다
  • 서정민갑│대중음악 평론가 ()
  • 승인 2013.12.31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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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재즈 뮤지션 나윤선…2013년 앨범 한국 대중음악 최고작

나윤선이 2013년 12월21일부터 25일까지 4일간 서울 국립극장에서 <Winter Jazz>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가졌다.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최초의 국립극장 공연이다. 어린 시절 초대 국립합창단 단장이었던 아버지 나영수씨를 따라와 국립극장 앞마당에서 놀던 꼬마가 40년 후에 바로 그곳에서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무대 위의 나윤선 역시 잊을 수 없는 공연이라 했다.

이 공연은 나윤선에게만 잊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공간에서 나윤선은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에게 잊을 수 없는, 충격 같은 감동을 선사했다. 자신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Ulf Wakenius)와 아코디언 연주자 뱅상 뻬라니(Vincent Peirani),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시몽 따이유(Simon Taileu),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 생황과 피리 연주자 이향희가 함께한 이 공연에서 나윤선은 음악적 절정에 도달했음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Silent Night>를 비롯한 몇 곡의 캐럴과 <Lament> 등 자신의 대표곡을 노래하는 동안 높고 강렬하고 거친 소리부터 고요하고 다정하고 따뜻하고 고독한 소리까지를 모두 울려냈다. 무대 위에 다섯 명의 연주자가 함께 있었고, 그들 모두 훌륭한 연주를 선보였지만 가장 독보적이고 울림 깊은 소리는 바로 나윤선의 몫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로 다섯 연주자의 소리를 껴안고 일필휘지의 기세로 내달리다가 돌연 멈추고 수시로 방향과 속도와 높낮이를 바꾸는 드라마틱함과 음악을 통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을 자유자재로 내비치는 능수능란함은 그가 스스로를 악기처럼 조련했음을, 아니 스스로 하나의 악기가 돼버렸음을 증명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객석을 압도했다가 위로했다가 해맑게 웃는 그 경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음악이 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떤 악기보다 사람의 목소리가 더 강력할 수 있으며 뮤지션 한 사람의 기와 역량이 기천명의 관객을 능히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로 기가 막힌 공연이었다.

ⓒ 나승열 제공
1994년 김민기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데뷔했다가 1995년 프랑스로 건너가 CIM Jazz Vocal 음악대학원에서 재즈를 배우기 시작한 그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곳에서 네 군데 음악학교를 한꺼번에 다니고 그곳의 뮤지션이 다들 그러했듯 일일이 발품을 팔면서 클럽을 찾아다니며 공연했던 나윤선은 2001년부터 자신의 솔로 앨범을 내놓기 시작했고, 자신만의 속도로 자신만의 음악 역사를 썼다. 지금까지 내놓은 정규 앨범만 벌써 8장이다. 게다가 그가 내놓은 앨범은 2004년, 2008년, 2009년, 2011년 한국대중음악상을 계속 수상할 만큼 평단의 호평을 독차지했다.

 

김민기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

그럼에도 재즈 시장이 협소한 한국에서는 ‘외국에서의 성공’을 통해 비로소 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2009년 프랑스의 문화예술 공로훈장인 슈발리에 훈장을 받고, 2010년 앨범 <Same Girl>로 프랑스 재즈 차트에서 7주간 1위를 했으며 프랑스 재즈 라디오 ‘TSF JAZZ’가 선정한 올해의 베스트 재즈 보컬 상을 수상했다. 2011년에는 프랑스의 재즈 어워드인 ‘L’Academie du Jazz(Academy of Jazz)’ 재즈 보컬 부분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됐고, 5만장 이상 판매 음반 수상자에게 주는 프랑스 골든디스크에 뽑혔다. 독일 재즈 어워드 ‘ECHO JAZZ 2011’ 해외 아티스트 부문 올해의 여자 보컬리스트, 13개국 72개 도시 180여 회 공연을 비롯해 이제 그는 유럽 최고의 재즈 보컬리스트로 등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3년 세계 최고의 재즈 페스티벌인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의 보컬 컴페티션(Shure Montreux Jazz Voice Competition 2013)의 심사위원장에 위촉된 게 그 증거일 것이다.

나윤선은 이 모든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성공 이전의 음악적 성공으로 평가돼야 마땅하다. 그는 음악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놓은 음악은 재즈라는 장르의 문법과 방법론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장르를 떠나서도 공감하고 감동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인정하듯 굵고 아우라 강한 미국식 흑인 여성 재즈 보컬과는 다른 그의 목소리는 연약하고 다소 평범하게 들릴 수도 있는 스윙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의 차이를 약점이 아닌 개성으로 승화시켰다. 나윤선은 스윙감 대신 모던하고 세련된 음악의 현대성을 추구하며 절제와 통일감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철저히 통제하고 연출하며 완벽하고 다채로운 사운드의 집중과 확산을 창출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그의 음악은 보컬과 일체가 된 깊고 튼실한 소리의 집을 지어 듣는 이를 인도하는 소리의 방이 됐다. 그 공간의 주인은 물론 나윤선이었으나 그 방에서는 개별의 소리가 자유롭고 편안했으며 그의 보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도 소리가 집중하고 분출할 때는 무서우리만치 독야청청하는 기개가 선연했다. 재즈의 장르적 특성을 고전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재즈의 자유로운 정신에 몰입한 결과였다. 나윤선의 음악은 나윤선만의 재즈가 되었고, 다른 장르의 마니아마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형형한 에너지를 가진 음악이 됐다.

ⓒ 나승열 제공
2009년 프랑스 슈발리에 훈장 받아

좋은 음악이란 기술적으로 능수능란한 음악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적인 완성도는 음악을 테크닉 안에 가두는 주범이기도 하다. 좋은 음악은 기술적인 완성도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성을 만들며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정서적 울림을 듣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독자성과 감응력이야말로 좋은 음악의 조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윤선이 2013년 내놓은 <Lento> 앨범은 나윤선의 음악적 역량이, 그의 독자성과 감응력이 어디까지 비상할 수 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 절창이다. 나윤선의 최고작이자 한국 대중음악의 최고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앨범은 실로 깊고 아름다운 음악의 숲이었다. 바람이 있고 꽃이 있고 폭염이 있고 폭풍이 있고 침묵이 있는 숲이었다. 노래가 피어나 터져 올랐을 때와 숨죽여 저물 때를 모두 아는 음악은 그저 음악이 아니라 삶의 비밀을 일러주는 경전과도 같다. 마케팅이 음악을 대신하고 캐릭터가 음악 언어를 대신할 때 그는 여전히 음악이라는 본질에 천착하는 작가로 남아 작가주의 가치를 사수했다. 그것이 나윤선이 음악으로 지켜낸 소중하고 본질적인 가치였다.

그래서 언젠가 인터뷰에서 “감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그의 고백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그가 이룬 성공은 그저 감동을 향해 정진했던 한 사람의 뮤지션에 대한 감응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 감응이 어떻게,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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