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 딸들의 거침없는 진격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4.01.0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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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이서현·대한항공 조현민 고속 승진

재벌가 딸들이 경영 수업을 마치고 경영 일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승진이 과거보다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삼성그룹의 이서현 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은 제일모직 전무직 1년 만에 부사장 자리를 차지했고, 다시 3년 만에 사장이 됐다. 대상그룹의 임상민 상무와 한진그룹 조현민 전무도 각각 1년 만에 승진했다.

2013년 말 삼성그룹의 사장단 인사에서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이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으로 승진했다. 삼성에버랜드는 2013년 제일모직으로부터 패션 사업 일체를 이전받았다. 이는 이서현 사장의 소속을 에버랜드로 옮기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에버랜드 지분 25.1%를 보유한 최대 주주이고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2010년부터 에버랜드 경영전략담당 사장직을 겸임해왔다. 이번에 차녀 이서현 사장이 에버랜드 패션부문 사장에 임명되면서 이건희 회장의 자녀 삼남매가 모두 에버랜드에 모인 셈이다.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은 에버랜드 지분을 8.37%씩 보유하고 있다.

이들이 에버랜드에 적을 두는 이유는 이 회사가 삼성그룹에서 가지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이다. 2012년 에버랜드의 매출액은 3조원 정도로 그룹 매출 380조원에 비하면 미미하다. 그러나 에버랜드는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다.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로 삼성그룹의 순환 출자 구조가 이어진다. 이 때문에 “이재용 부회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이 포스트 이건희 시대의 삼성을 이끌기 위해서는 오랜 경영 경험이 필요했지만 두 여동생은 오빠를 지원하는 입장이므로 경영 수업을 비교적 짧게 마친 것으로 보인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991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20년 만에 사장직에 올랐다. 이부진 사장은 1995년 일선에 모습을 나타낸 후 15년 만인 2010년 호텔신라 사장이 됐다. 이서현 사장은 2002년부터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삼성 배지를 단 후 10년 만에 사장 명함을 갖게 됐다. 오빠와 언니보다 각각 10년, 5년 일찍 지휘봉을 잡은 셈이다.

대상 딸들의 지분율 업계 최고

대상그룹도 최근 임창욱 회장의 차녀 임상민 전략기획본부 부장이 상무로 승진했다고 발표했다. 슬하에 아들이 없는 임 회장은 두 딸을 모두 상무로 진급시켜 경영에 참여시켰다. 임상민 상무는 2008년 계열사(UTC 인베스트먼트)에 입사한 후 5년 만에 상무직에 올랐다. 2010년 전략기획실에서 기획 실무를 담당하다가 그해 8월부터 런던 비즈니스스쿨에서 MBA(경영학 석사) 과정을 밟았다. 2012년 10월 대상 전략기획본부 부본부장(부장급)으로 복귀했다. 임상민 상무는 이번 승진과 함께 그룹 차원의 신산업 발굴과 글로벌 프로젝트를 총괄할 것으로 보인다.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가 1987년 맏아들인 임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한 이후 1997년까지 10년간은 오너 경영 체제였지만 임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이후 현재까지 10여 년간은 철저히 전문경영인 체제였다. 이번 둘째 딸의 승진으로 두 딸 모두 임원이 되면서 대상그룹의 경영 승계 작업도 한층 가속화할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이들의 지분은 모두 58.77%로 경영 승계에 큰 문제가 없다. 특히 임상민 상무는 대상의 지분 가운데 38.36%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 주주다. 언니인 임세령 상무는 20.41%의 지분을 갖고 있고, 여기에 아버지 임창욱 회장(3.19%)과 어머니 박현주 부회장(3.87%)의 지분을 다 합쳐도 임상민 상무에 미치지 못한다. 나이에 비해 지분율이 다른 그룹보다 월등히 높은 편이다. 다른 그룹 딸들의 지분 참여는 일반적으로 1%를 넘지 않는다. 삼성가의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의 지분율도 10%를 밑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임 회장이 둘째 딸인 임상민 상무에게 대상그룹의 경영권을 물려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2005년 대상홀딩스 중심의 지주회사 체제로 바뀐 후부터 최대 주주인 임상민 상무의 지분은 꾸준히 늘어났다. 2009년 임 회장은 장외 거래를 통해 대상그룹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의 지분 6.73%(총 250만주)를 차녀인 임상민 상무에게 양도했다. 게다가 임 회장은 일찌감치 둘째 딸이 MBA 과정을 밟게 했다. 그 후 임상민 상무는 대상의 경영 혁신과 기획 업무를 맡는 등 언니인 임세령 상무보다 한 발짝 앞서 그룹의 핵심 업무를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임상민 상무가 최대 주주이면서 실질적으로 그룹을 이끌고 있지만 나이가 30대 중반인 만큼 차기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언니인 임세령 상무는 2012년 상무직에 올랐지만 경영 전면에 나선 시기는 동생보다 늦다. 그는 1998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결혼하면서 외부 노출이 거의 없었다. 이혼한 이듬해인 2010년 대상그룹 계열사(와이즈앤피) 공동대표를 맡으며 일선에 나섰고, 2년 뒤인 2012년부터 대상의 식품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한진그룹 딸들도 경영 전면에 나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차녀인 조현민 상무는 최근 전무로 승진했다.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담당 상무에 임명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다. 이에 따라 한진그룹의 3세 경영은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조현민 전무는 2005년 LG애드를 거쳐 2007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후 고속 승진하며 현재 자리까지 올랐다. 2012년부터 진에어 마케팅본부장 전무도 겸임하고 있는 그는 2013년 4월 진에어 사내이사로 등기하며 실세로 부상했다.

조현민 전무의 진에어 사랑은 각별하다. 2008년 출범 때부터 진에어에 몸담으며 광고와 마케팅 분야에서 다양한 시도를 펼쳐왔다. 세계 최초로 내놓은 청바지와 셔츠로 구성된 유니폼은 조현민 전무가 디자인을 담당했다. 객실 승무원으로 직접 나서는 등 톡톡 튀는 마케팅 지원 활동으로 진에어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데 한몫했다. 2013년 8월 해외여행 전문 매체(스마트 트래블)가 집계한 아시아 저비용 항공 부문에서 진에어가 국내 최초로 10위권에 들었다.

조현민 전무는 2007년 대한항공 통합커뮤니케이션실 과장으로 입사한 지 6년 만에 전무 자리에 올랐다. 언니인 조현아 부사장이 1999년 대리로 입사한 후 전무가 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11년이었다. 아버지 조양호 회장이 차녀인 조현민 전무의 역할을 분명히 해두고자 초고속 승진을 시켰다는 시각이 있다. 그 역할이란 대한항공의 서비스와 마케팅을 진에어에 이식해 더 발전시키라는 주문으로 보인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조현민 전무는 마케팅 업무를 5년 정도 맡아왔고 성과를 낸 것을 평가받아 이번에 승진했다”며 “진에어와 대한항공 전무를 겸직하는 것은 항공사라는 큰 개념에서 궤를 같이한다”고 말했다.

조현민 전무가 진에어의 경영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는다면 이른 시일 내에 사장으로 진급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조현민 전무는 진에어의 초기 시장 안착에 애를 먹으며 값비싼 수업료를 치렀다. 2008년과 2009년 각각 124억원과 125억원의 적자를 내면서 결손금이 쌓였고 덩달아 완전 자본 잠식 문턱까지 가기도 했다. 올해 흑자가 이어진다면 상반기에는 결손금을 털어내고 정상 궤도에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항공은 조원태 부사장이 끌고 언니인 조현아 부사장이 미는 모양새를 갖추는 동안 조현민 전무는 진에어를 진두지휘할 역량을 키우고 있는 셈이다.

신세계·현대차·현대·롯데 딸들은 ‘정중동’

형식적으로 직함만 있을 뿐 경영에 크게 이바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재계 딸들도 있다. 신세계그룹의 우먼 파워는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다. 1996년 조선호텔 상무보로 신세계에 진입한 그는 2009년 신세계 부사장을 달았다. 상무보와 상무로만 13년 근무한 그는 이제 부사장 4년 차가 됐다. 오빠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진급에 비하면 더딘 편이다. 정 부회장은 1995년 이사로 입사한 후 5년 만인 2000년 부사장에 올랐고, 상무에서 부사장으로 진급하기까지 3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외국에서 디자인학교를 다닌 정유경 부사장은 고급 상표를 정착시켜 패션 부문에서 두각을 보였다. 한때는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과 패션 1번지 청담동 일대에서 패션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에 연루돼 오점을 남겼다. 검찰은 계열사(신세계SVN) 부당 지원 혐의로 신세계 경영진 3명을 기소했는데 이 계열사는 정유경 부사장이 운영해온 제과업체다. 이른바 대기업 빵집 골목상권 침해와 계열사 부당 지원 등 각종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정유경 부사장은 이번 인사 명단에 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신세계그룹 관계자는 “이따금 출근하는 정유경 부사장은 백화점 디자인 사업에 대해 조언하는 정도로 올해도 적극적인 대외 활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중동(靜中動)을 보이는 대기업 딸로는 현대자동차그룹을 빼놓을 수 없다. 정의선 부회장이 1999년 구매실장으로 입사한 후 2002년 국내영업본부장 전무, 2003년 현대기아차 사장, 2009년 현대자동차 총괄 부회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그의 누나들은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큰누나 정성이 이노션 고문은 2003년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이사직을 맡으면서 재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만 현재는 2005년 출범한 광고대행사 이노션의 고문만 맡고 있다. 동생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이나 정윤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도 직함을 걸어두고는 있지만 눈에 띄는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롯데그룹 신영자 사장은 가장 오랜 기간 현업에서 뛰고 있는 여성 파워지만 진급은 느린 편이다. 1973년 롯데호텔 이사로 경영에 참여한 그는 1983년 롯데쇼핑 상무, 1997년 롯데쇼핑 총괄부사장, 2008년 롯데쇼핑 사장으로 진급했다. 신영자 사장의 딸 장선윤 블리스 대표이사는 2010년부터 대표직을 맡았지만 롯데그룹 핵심 사업으로는 접근하지 못했다. 신영자 사장의 이복 여동생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도 2010년 직함을 걸어두고 있지만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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