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먹으려 종족끼리 총을 겨누다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4.01.09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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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단에 막대한 원유 매장…중국 등 내전에 적극 개입

2013년 12월15일 아프리카 남수단의 수도 주바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리크 마차르 전 부통령을 추종하는 군대가 일으킨 쿠데타였다. 쿠데타 이후 많은 시민이 유엔 평화유지군 기지로 피신했다. 국영 SSTV 등 TV와 라디오는 방송 송출이 중단됐다. 이틀 뒤인 17일 주바에서의 총격은 잦아들었지만 지방 곳곳에서는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피의 살육전이 지속됐다.

12월23일 중국 정부는 남수단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화춘잉(華春瑩)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남수단의 형세를 고도로 주시하고 있다”며 “쌍방 간의 적극적인 대화를 권고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은 그동안 대(對)아프리카 외교와 분쟁 대응에서 ‘내정 불간섭’ 원칙을 견지해왔다. 남수단에서 일어난 쿠데타에 대해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이었다.

2012년 4월24일 남수단의 초대 대통령인 살바 키르(오른쪽)가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당시 주석과 함께 중국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AP연합
2013년의 마지막 날인 12월31일 남수단 정부군과 반군은 휴전 협상을 벌이기로 전격 합의했다. 하지만 반군 측은 “최종 합의 전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밝혔고 이후 교전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한빛부대가 주둔 중인 종글레이 주의 주도 보르 인근에서도 정부군과 반군이 충돌했다. 쿠데타 이후 현재까지 최소 1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12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지금 남수단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남수단은 2011년 수단공화국에서 독립한 신생국이다. 면적은 64만㎢로 프랑스와 비슷한 데 비해 인구는 2012년 현재 1080만명에 불과하다. 1인당 GDP(국내총생산) 1000달러의 빈국이지만, 50억 배럴의 석유, 637억㎡의 천연가스 매장량을 지닌 자원 부국이다.

중국, 전체 석유 수입의 10% 수단에서 충당

남수단을 이해하려면 험난했던 독립 과정 및 수단과의 관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남수단이 떨어져나가기 전 수단은 인구 4350만명, 면적은 한반도의 11.4배에 달하는 아프리카 최대 영토국이었다. 1899년부터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 통치를 받다가 1956년 독립했다. 독립 이후 1962년부터 11년간 전란에 휩싸였다. 바로 1차 수단 내전이다. 내전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북부와 남부 간의 사회·문화적 갈등이었다. 사하라 사막을 기준으로 북부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아랍 문화권으로 식민지 시대 집중적인 개발 수혜를 입었다. 이에 반해 남부는 전통적인 아프리카 문화권으로 아랍계의 노골적인 차별과 무시를 받던 곳이다. 

남부 3개 주의 독립을 요구하며 결성된 수단인민해방군(SPLA)은 주변 반(反)아랍 세력의 지원을 받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화력과 병력의 열세로 인해 1972년 자치권을 얻는 선에서 휴전에 합의했다. 1978년 개발이 시작된 석유는 또 다른 분쟁을 불러왔다. 유전 지대의 80% 이상이 남부에 몰려 있어 남북 간에 개발 이익을 두고 충돌이 일어났던 것. 결국 1983년 2차 수단 내전이 발발했다. 20여 년에 걸친 내전은 ‘다르푸르 참사’라는 비극을 낳았다. 2003년부터 친정부 민병대인 잔자위드는 ‘아랍계의 피를 아프리카에 이식한다’는 명분으로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2005년 수단 정권과 수단인민해방운동(SPLM)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됐지만, 오랜 내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150만명이 질병과 기아로 숨졌고 200만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협정에 따라 2011년 1월 주민투표가 실시돼 남부 주민의 98.8%가 독립에 찬성했다. 이에 따라 같은 해 7월 남수단이 탄생했다. 독립 과정에서 가장 큰 쟁점은 석유 문제였다. 남수단에 유전이 몰려 있지만, 수출을 위한 원유 수송관은 수단을 지나고 정유 시설도 수단에 몰려 있다. 하지만 수단은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돼 서구 국가들에 의해 경제 봉쇄를 당해왔다. 이 틈을 노려 진출한 국가가 바로 중국이다.

“내전 계속되면 중국 기업 피해 커져” 고민

중국은 1990년대 수단에 진출해 경제·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석유 관련 이권은 모두 중국이 차지했다. 중국은 수단의 석유 개발에 100억 달러를 투입했다. 중국석유천연가스그룹(CNPC)은 그레이터나일석유개발(GNPOC)의 지분 40%를 보유했고, 중국석유개발건설(CPEC)은 남수단의 석유를 홍해로 보내는 송유관을 건설했다. CNPC는 다르푸르의 유전 대부분과 멜루트 분지 유전 41%도 소유했다. 분리 독립 전 수단 석유의 70%가 중국으로 수출됐는데, 이는 중국 전체 석유 수입의 10%에 해당한다.

유엔의 중재 아래 남수단은 석유 수출 수익을 수단과 반반씩 나눠 갖는다는 조건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하지만 독립 후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지도층 내부의 반목과 종족 간의 갈등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살바 키르는 SPLA 하급 장교에서 반군 2인자로 성장한 인물이다. 본래 SPLA 지도자는 존 가랑이었지만 평화협정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숨졌다. 키르 대통령은 인구 150만명인 남수단 최대의 딩카족 출신이다. 이에 반해 쿠데타를 일으킨 마차르 전 부통령은 인구 80만명으로 두 번째로 큰 누에르족 출신이다. 영국의 영향을 받은 딩카족에는 기독교 신자가 많지만, 누에르족 대부분은 토속 종교를 믿는다. 마차르 전 부통령은 미국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았고 공학박사 학위를 땄다. 내전 때부터 별도의 조직을 이끌며 독립 강경파를 대변해왔다.

이런 마차르에 부담감을 느낀 키르 대통령은 2013년 8월 내각을 전면 해산하면서 마차르를 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이에 불만을 가진 마차르가 군부 내 세력을 규합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내전 상황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현재는 두 지도자 간의 힘겨루기 양상이지만, 물과 기름처럼 전혀 다른 종족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문제 해결이 쉽지 않다. 여기에 마차르가 석유의 95%가 몰려 있는 유나이트 주를 장악하고 있어 경제적 기반이 탄탄하다는 점도 걸림돌이다.

남수단은 독립 후 2년간 석유 수출이 중단돼 세수 수입이 거의 없었다. 2012년 GDP는 93억 달러에 머물렀다. 전기 보급률이 전체 인구의 1% 수준이고, 40%만이 식수를 공급받고 있다. 포장된 도로는 100㎢당 0.04km에 불과하다. 주택의 70% 이상이 흙과 이엉으로 만든 전통 가옥일 정도로 열악하다. 그러나 지난해 4월부터 석유 생산이 재개되고 수출이 가속화되면서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29일 CNN머니는 2013년 남수단의 경제성장률을 24.7%로 잠정 집계했다. 이는 전 세계 1위의 성장률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중국의 행보다. 중국은 2012년 4월 키르 대통령이 방중했을 때 80억 달러 규모의 개발 차관을 안겨주었다. 도로, 전력·전기, 통신 설비 등 기초 인프라 건설에 쓰일 자금인데, 사업 진행은 모두 중국 기업이 맡고 있다. 이런 남수단에서 분쟁이 계속되면 중국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중국이 내정 불간섭 원칙을 버리고 남수단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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