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으로 안 갔다고 회초리 들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1.1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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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사 한국사교과서 선정 철회 후폭풍…교육부 ‘특별조사’ 편향성 논란

‘이게 다 외압 때문이다.’ 교육부의 결론이다. 교육부는 1월8일 ‘한국사 교과서 선정 변경 관련 특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선정했다가 변경한 20개 학교의 ‘선정 번복 사유’와 ‘외부의 압력 행사 여부’를 지난 1월6일부터 7일까지 조사한 결과다. 골자는 각 학교가 외부 시민단체 등의 압력으로 부당하게 선정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독재 미화, 친일적 서술, 오류, 표절 등 숱한 의혹을 불러일으킨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논란이 해를 넘겨서도 계속되고 있다.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다고 알려진 전국 20여 고교가 여론의 대대적인 역풍에 휩싸이면서다. 해당 학교들은 잇따라 선정 결과를 번복했다. 1월10일 현재 결정을 유보한 경기 파주 한민고와 조건부 복수 채택 의사를 밝힌 서울디지텍고를 제외하고는, 알려진 모든 학교가 관련 방침을 철회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부가 특별조사를 전격 실시해 학교가 부당한 외부 압력을 받았다고 규정하고 나선 것이다.

강북 지역 시민모임과 서울교육단체협의회 등이 1월3일 서울 강북구 창문여고 앞에서 교학사 역사교과서 선정 철회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교육부의 결론은 교학사 교과서 집필진이나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 진영의 입장과 일치한다. 결국 정부가 이들의 손을 들어준 꼴이다. 야권 및 진보 성향의 시민단체는 거세게 반발한다. 양측 논란의 핵심은 ‘20여 개 학교가 연쇄적으로 교학사 교과서 선정을 철회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있다. 정부·여당 및 보수 진영은 특정 집단의 ‘외압’에 의해 각 학교의 자율성이 훼손됐다고 주장한다. 야권 및 진보 진영은 이것이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반박한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실에 가까울까.

학생·학부모·동문 등 ‘내부’ 움직임 활발

교육부는 “일부 학교에서는 시민·교직 단체 등의 항의 방문과 학교 주변에서의 시위 및 시위 계획 통보, 조직적 항의 전화 등이 교과서 선정 번복 결정에 주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일부 학교’의 이름이나 숫자 등 구체적인 정보 공개는 거부했다.

여기에 수긍하지 못하는 여론이 상당하다. 지난해 12월 말 이후 현재까지 교학사 교과서 채택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학교 내외를 가리지 않고 표출됐기 때문이다. 특히 학생·학부모·동문·지역 주민 등 학교 ‘내부’와 관련되는 각 주체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외부 단체의 힘으로 선정 변경이 관철됐다는 결론은 여러모로 ‘무리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1월3일 오전 10시30분, 서울 미아동 창문여고 교문 앞은 인파로 북적였다. 강북 지역 시민모임·서울교육단체협의회 등이 주관한 집회가 열린 것이다. 전날(2일)부터 창문여고가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할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집회 참석자들은 지역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을 중심으로 긴급 모임이 결성된 후 하루 만에 항의 집회가 열렸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방학을 맞은 30여 명의 창문여고 학생도 참석했다. 학생들에게선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원하지 않는 분위기가 뚜렷했다. 신원을 밝히기 꺼린 2학년 학생 3명은 “어제 우리 학교에서 교학사 교과서가 채택됐다는 얘기가 각종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돌기 시작했다. 오늘 항의 집회가 열린다는 얘기가 있어 우리의 뜻을 알리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학생들끼리 자발적으로 관련 정보를 공유하다 항의 집회에도 참석했다는 것이다. 교학사 교과서의 친일·독재 옹호 등 편향이 우려돼서라고 했다.

1학년 이 아무개양(17)도 “교학사 교과서는 친일 성향을 띠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채택을) 반대하러 나왔다”고 말했다. 집회가 진행되는 도중, 학교 관계자가 “방금 전 열린 학교운영위원회에서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가 최종 선정됐다. 교학사 교과서는 최종 3순위 안에 포함돼 있었는데 그게 와전된 것 같다”는 입장을 전하자 학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렇듯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했다고 알려진 전국 각지의 학교에서는 내부에서부터 반대 여론이 활발히 표출됐다. 각종 포털 및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의 학생 혹은 동문이 쓴 내용의 게시물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XX고 재학생인데 부끄럽다” “교학사 교과서가 채택되지 않도록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내용이다. SNS 계정을 개설해 뜻을 모으고 집단행동에 나선 경우도 있다. 수원 동우여고와 동원고, 전북 전주 상산고 등에는 학교의 교과서 채택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붙었다 철거되기도 했다.

‘교학사 교과서’ 일반 공립고 전혀 없어

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내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난해 ‘안녕들 하십니까’ 현상으로 나타난 청년들의 사회 참여 행동이 고등학생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상산고의 경우 방학 중 기숙사에 남아 있는 1~2학년 재학생 299명을 대상으로 한 자체 설문조사 결과 채택에 반대한 학생이 267명(89.2%)이었고 찬성은 14명(4.7%)에 불과했다. 자신을 졸업생이라 밝힌 이들의 관련 게시물이 각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숱하게 올라오는 등 동문들의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외압의 당사자로 지목된 시민·교직 단체 쪽에서도 교육부의 특별조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다. 각 학교가 선정을 철회한 핵심적인 요인은 ‘외부’ 단체의 압력이 아닌, 학교 내외 비판 여론을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이다. 조남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장은 “평소 시민단체들이 일선 학교에 외압을 행사할 정도로 힘이 있었는지부터 되묻고 싶다. 우리는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려는 학교를 향해 항의의 뜻을 밝혔을 뿐이다. 학생과 학부모 및 사회적 비판 여론을 의식해 각 학교가 자체적으로 철회한 것을 왜 ‘외압’ 때문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논란이 되는 대목은 또 있다. 교육부는 일선 학교에서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교과서가 선정됐다고 전제했다. 학교 ‘내부’에서 정당하게 선정된 교학사 교과서가 ‘외부’의 조직적인 흔들기로 부당하게 퇴출됐다는 것이 보수 진영의 논리 구조다.

하지만 각 학교가 내부적으로 정당한 선정 절차를 거쳤는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수원 동우여고의 한 교사는 지난 1월2일 페이스북에 윗선의 외압을 받는 학교장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교학사 교과서를 ‘3순위’로 추천했다고 양심선언했다. 경북 청송여고의 경우 학교운영위원회를 개최하지 않고 교학사 교과서를 선정한 사실이 드러났다. 교육부를 향해 “교학사 교과서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외압’ 정황이 상당수 드러났음에도 이를 ‘특별조사’하지 않았던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교육 현장의 주체인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대대적인 반발 여론이 폭발하는 현상 자체가 학교 내부 구성원의 의견을 잘 반영하지 않았음을 드러낸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초중등 교육법과 그 시행령은 학교 운영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기구로 학교운영위원회(학운위)의 설치를 의무 조항으로 규정한다. ‘교과용 도서와 교육 자료의 선정’은 학운위의 주요 기능 중 하나다.

공립학교장은 학운위로부터 ‘심의’를, 사립학교장은 학운위로부터 ‘자문’을 받는 게 의무다. 사립학교가 공립학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한 규제를 받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쨌든 법령을 통해 마련된 제도만 잘 작동해도 교원·학부모·지역사회 인사의 의견이 교과서 채택 과정에 반영된다. 이번 교학사 사태와 같은 ‘후폭풍’이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이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논란이 된 20여 학교 중 일반 공립고교는 단 한 곳도 없고, 재단이사장이나 교장의 입김이 강한 사립고교이거나, 자율형·기숙형 공립고 등 재정 면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운영이 가능한 학교들이라는 점이다. 2013년 현재 2322개 고등학교 중 일반 국공립고는 1114개, 사립고는 948개, 자율형 공립고와 기숙형 공립고는 각각 114개, 127개다. 전체 고등학교 대비 48%로, 절반에 육박하는 일반 공립고 중 교학사 교과서 채택과 관련해 논란이 발생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 과연 우연일까.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서울 신현고 역사교사)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교과서를 채택하는 권한이 정말 자율적으로 학내 구성원들에 의해 행사될 수 있다면,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하는 학교가 거의 없을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김 소장은 “일선 교사 입장에서는 굳이 논란이 될 게 빤한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할 동기가 떨어진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다른 8종 교과서와 차이가 많은 내용의 교과서를 선택할 이유도 없다”고 덧붙였다.

내년이 정말 문제?

교학사 교과서 집필을 주도한 한국현대사학회는 1월5일 성명을 내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채택률 0%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중략) 역사 교육 현장에 좌파적 전체주의가 위세를 떨치고 있다. 국민이 힘을 모아 교학사 한국사교과서를 지켜주실 것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향후 교과서 문제에 강경한 대응을 이어나갈 것임을 시사한다. 이번 논란에 대한 자세한 입장 및 향후 계획을 듣기 위해 교학사 교과서 집필자이자 현 한국현대사학회장인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학과 교수에게 수차례 전화 연결을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갈등을 중재해야 할 정부는 ‘오른쪽’으로 기우는 모양새다. 박근혜 대통령은 1월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하는 뉘앙스로 발언했다.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의원 등 여당 중진급 인사들이 여기에 힘을 싣는 발언을 이어나갔다. 주무 부처인  교육부도 형평성 논란에 휩싸인 ‘특별조사’로 가세한 꼴이다.

전국 2300여 개 고교 중에 한국사 교육을 2학년 이후로 미뤄 이번에 교과서를 결정하지 않는 곳이 700여 곳에 이른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평소 우파 성향을 보인 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를 관심 있게 지켜본 결과 상당수가 한국사 과목을 2학년 이후로 넘겼다”고 말했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라면 내년에 역사교과서 선정을 둘러싸고 똑같은 사회적 논란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교육부는 “(교과서) 선정을 포함한 관련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계획”이라고만 밝혔을 뿐, 현재의 갈등을 수습하거나 중재하기 위한 적절한 방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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