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미운 뒤통수 때리기… 제리 맥과이어는 없다
  • 박동희│스포츠춘추 기자 ()
  • 승인 2014.01.1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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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선수와 에이전트의 관계…돈 문제로 법정 싸움도

스포츠 마케팅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가장 닮고 싶어 하는 롤 모델 중 하나가 제리 맥과이어다. 세련된 외모와 일에 대한 확고한 열정 그리고 담백한 인간미로 똘똘 뭉친 맥과이어는 선수들 사이에서 최고의 파트너로 꼽힌다. 그는 선수가 돈과 성공을 동시에 잡을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맥과이어는 세상에 없다. 맥과이어는 미국 배우 톰 크루즈가 <제리 맥과이어>라는 영화에서 연기한 가상의 인물이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맥과이어에 열광하는 건 스포츠 에이전트가 그만큼 화려한 직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2012년 11월16일 LA 다저스와 입단 교섭을 앞둔 류현진이 대리인 스콧 보라스와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미국 스포츠계를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스콧 보라스가 대표적이다. ‘괴물 투수’ 류현진(25)의 LA 다저스행을 돕고, 지난해 말 추신수의 대형 계약을 이끌어낸 보라스는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에이전트다. 메이저리그 유명 선수 200여 명이 그의 고객이다.

그가 벌어들이는 에이전트 수수료도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야구 전문 사이트 ‘베이스볼 플레이어스 샐러리’는 지난해 메이저리그 에이전트들의 소득을 추정해 발표했다. 이 가운데 보라스는 지난해 에이전트 수수료로 1078만 달러(약 114억원)를 벌어들였다. 2위인 에이전시 SFX의 560만 달러보다 2배나 많은 금액이다.

보라스의 에이전트 수수료가 많았던 건 자신의 고객에게 돈다발을 안긴 덕분이다. 실제로 지난해 보라스는 고객인 메이저리거의 계약을 진두지휘하며 구단으로부터 무려 2억3476만 달러를 받아냈다. 올해엔 수익이 더 올라갈 게 확실하다. 지난해 스토브리그에서 보라스는 제이코비 엘스베리(양키스)와 추신수(텍사스)의 에이전트로 나서 각각 7년 1억5300만 달러. 7년 1억3000만 달러라는 거액을 두 선수에게 안겼다.

슈퍼 에이전트의 수수료가 몸값 총액의 5% 선임을 고려할 때 보라스는 올해 엘스베리와 추신수로부터 각각 765만 달러, 650만 달러를 받을 게 확실하다. 두 선수의 수수료만 합쳐도 지난해 벌어들인 1078만 달러를 뛰어넘는다.

한국의 보라스, 박유현과 전승환

영화에서 맥과이어는 선수들이 “Show me the money(나에게 돈을 벌게 해달라)”라고 할 때마다 군말 없이 대형 계약을 안긴다. 그런 의미에서 보라스는 맥과이어의 판박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도 보라스 같은 에이전트가 있을까.

미국에 비해 스포츠 시장 규모가 한참 작은 한국에 보라스 같은 슈퍼 에이전트는 없다. 하지만 유명 에이전트는 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야구 에이전트는 ‘아이안스’의 박유현 대표와 ‘보라스코퍼레이션’의 전승환 아시아 총괄이사다.

먼저 박유현 대표다. 박 대표는 이종격투기 선수 최홍만과 프로야구 선수 임창용의 에이전트였다. 일본에서 건축업을 하던 박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인 이종격투기 선수 최홍만의 현지 생활을 돌봐주다 에이전트가 됐다. 이때만 해도 전업 에이전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7년 12월 임창용의 일본 진출을 도우며 시쳇말로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국외 진출을 바라던 임창용을 대신해 박 대표는 일본 구단을 찾아다니며 ‘임창용 세일즈’에 나섰다. 그러나 관심을 보이는 구단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둥지를 틀었으나 임창용은 외국인 선수 중 최저 연봉인 30만 달러(약 3억원)의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앞세워 최고의 마무리로 변신한 임창용은 정확히 2년 후 3년에 15억 엔(당시 원화로 206억원)이라는 거액에 야쿠르트와 재계약했다. 무려 70배의 기록적인 몸값 상승률이었다. 지난해 박 대표는 임창용의 시카고 컵스 입단을 이끌며 일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에이전트로 활동 폭을 넓혔다.

박 대표가 우연한 기회로 야구 에이전트가 됐다면, 전승환 이사는 ‘준비된 에이전트’다. 2004년 LG에서 외국인 선수 통역을 맡았던 전 이사는 2006년 미국으로 가 뉴욕 메츠에서 뛰던 서재응과 구대성의 통역을 담당했다. 2007년엔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활약하던 이병규(현 LG)의 홍보 담당으로 일했다. 한·미·일 야구계를 모두 경험해서인지 전 이사는 세계 야구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는다는 평을 듣는다. 그런 그가 보라스가 세운 에이전트사 ‘보라스코퍼레이션’과 손을 잡은 건 2010년이었다. 그해부터 전 이사는 류현진·윤석민의 메이저리그행을 구상했고, 2012년 두 선수와 에이전트 계약을 맺은 뒤 본격적인 세일즈에 나섰다.

결과는 좋았다. 2012년 시즌이 끝나고서 류현진은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 입찰)에 응했고, 2573만 달러를 써낸 LA 다저스와 우선협상을 벌인 후 6년간 총 3600만 달러에 꿈에 그리던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다. 야구계 인사들은 “전 이사의 노력이 없었다면 류현진의 미국 진출이 이토록 성공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앞으로 많은 선수가 전 이사의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전 이사는 지난해 말 이대호와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입단 협상 시 이대호의 에이전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콧 보라스는 추신수가 신시내티 레즈, 텍사스 레인저스와 계약을 맺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연합뉴스
에이전트와 선수,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일 뿐

여기까지가 영화 속 맥과이어처럼 에이전트 세계의 빛나는 앞면이다. 많은 에이전트는 “빛보단 그림자가 많은 게 이 세계”라고 말한다. 한 유명 에이전트는 “우린 비정규직이나 계약직은 고사하고, 일용직에도 못 미친다”고 털어놓았다.

“구단과의 협상 시 모든 계약은 문서로 시작해 문서로 끝난다. 그러나 정작 에이전트와 선수 사이엔 계약서가 없다. 그저 ‘구두 약속’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어느 날 갑자기 선수가 ‘형, 미안한데 오늘부터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하면 계약 관계는 순식간에 끝난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배신과 뒤통수 맞는 일이 일상이다. 전직 에이전트 A씨는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줬다.

“몇 해 전 유명 프로야구 선수의 의뢰를 받고 국외 리그행을 주선했다. 여러 구단과 만나 선수의 가치를 알렸고, 몇몇 구단으로부터 정식 오퍼를 받았다. 하지만 계약을 앞두고 선수가 ‘에이전트 수수료가 너무 높다’고 불만을 털어놓고서 자기가 직접 구단과 계약해버렸다. 소송까지 생각했지만, 구차하게 보일까 봐 없던 일로 했다.”

A씨만의 경험담은 아니다. 거의 모든 에이전트가 이런 식의 배신과 뒤통수 맞는 경험을 한 번쯤은 했다. 물론 에이전트 때문에 피해를 본 선수도 부지기수다. 지난해 야구계에서 거포로 유명한 B 선수는 자신의 과거 에이전트와 법정 싸움을 펼쳤다. B 선수는 “나에게 꿔간 돈을 몇 년째 갚지 않는다”며 에이전트를 고소했고, 지리한 법정 다툼 탓인지 시즌 중반부터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렇듯 에이전트와 금전적 문제에 휘말려 법정을 오간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최근 야구계엔 ‘에이전트와 선수는 가족이 아닌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들이 연출됐다. 임창용과 류현진의 에이전트 교체였다.

지난해 말 임창용은 박유현 대표를 떠나 오승환의 에이전트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포츠인텔리전스’의 김동욱 대표와 손을 잡았다. 류현진도 국내 에이전트 파트를 담당하던 전 이사로부터 독립해 자신의 친형에게 일을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에이전트는 “보라스는 구단뿐만 아니라 고객인 선수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욕을 먹는 에이전트”라며 “어쩌면 보라스의 인간미 없는 비즈니스가 선수에게 큰돈을 안겨주는 원동력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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