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사람에게 미술 경험하게 하고 싶어"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01.16 19:0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업과 협업 열심인 컬러밴드 화가 하태임… 부친은 추상화단 거목 고 하인두 화백

최근 문화와 기업 간 협업이 늘어나고 있다. 특히 미술 장르에서 협업이 활발하다. 의류·식기·가방 등 패션 상품은 물론 주방 기기, 백색가전 등 전 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중견 화가 하태임 삼육대 미술컨텐츠학과 교수는 기업과의 협업 작업을 열심히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색띠(컬러밴드) 화가로 잘 알려진 그는 색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과는 화장품을 소재로 작업했고, 모뉴엘과는 컴퓨터로 협업을, 삼성전자와는 프린터로 작업을 펼쳤다. 가장 최근에 협업을 한 대상은 보네이도 코리아. 보네이도 코리아는 미국산 공기순환기 보네이도를 수입·판매하는 회사로, 하 교수는 보네이도의 포장 박스에 자신의 컬러밴드를 표현했다. 소비자가 보네이도를 샀을 때 단순히 제품 정보와 브랜드만 적혀 있는 종이 박스를 배달받는 것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하 교수는 “어떤 분은 미술이 너무 상업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시하기도 하고 50대 이상의 작가층에선 걱정하는 분도 계시다. 하지만 내 생각엔 시각적 경험이나 찾아가는 미술이란 측면에서 이런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화가라는 직업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중학생 때까지는 플루트를 했는데, 아버지 서재에서 마네나 드가의 작품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시각적 경험이나 이미지의 축적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즐거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협업이나 아트 마케팅에 열려 있다.”

그의 이력에서 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는 한국 추상화단의 거목이었던 하인두 화백이다. 그는 젊은 시절 아버지의 영향을 한사코 부정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가 고등학생 때 부친이 별세했기에 화단 데뷔나 작업은 아버지 후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다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미술을 자주 접하고 ‘시각적 경험’이 남들보다 많이 축적된 것은 그도 인정한다.

“내가 아빠와 약속했던 대학(프랑스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갔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빠 후광으로 들어간 줄 안다. 워낙 유명한 학교니까. 외국에서는 사실 아빠를 잘 모르는데도 그런 오해를 받다 보니 아빠 이름과 함께 거론되는 것을 싫어하게 됐다.”

수백 번의 붓질 통해 색의 조화 찾아

독립된 작가로서 아버지와 함께 거론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선친을 생각하는 마음은 애틋했다. “아빠가 대학에 재직 중이셨는데 우리의 미술 입시가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이라면서 프랑스에 가서 자유롭게 그림을 하라고 꿈을 심어주셨다.” 아버지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없었느냐고 물었다. “미술이란 게 시각적 경험 같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 지금 그리는 게 과거의 응축된 경험이 나타나는 것이다. 자랄 때 항상 발치에, 벽에 그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아빠에게서 흡수한 요소는 색채의 조화다.”

그의 집안에선 어머니를 포함해 5명이 미술을 업으로 삼고 있다. 독립적인 작가로 자리를 잡기까지 그에게는 아버지가 아킬레스건이었다. “아빠가 그림을 안 하셨다면 내가 좀 더 자유롭게 작업하고 인정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빠는 무서운 아빠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아빠가 되고 싶어 하셨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네가 시집가도, 애를 낳아도 아빠라고 불러라’ 하신 다정한 분이셨다. 아빠가 주신 환경으로 인해 그림을 시작한 건데 한동안 아빠를 부정했던 것이다. 아빠의 20주기 때에 화해할 수 있었다. 아빠를 인정해야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그림 보면 내 마음의 지도 보여”

그는 젊은 시절 지금 같은 화사한 색감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거칠고 폭력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한참 아프고 나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반짝이고 빛나는 것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만 가지고, 색의 배합과 형식을 통해서 하태임을 규정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지금의 컬러밴드 형태는 10년 동안 이어왔다. 처음에는 지금보다 더 복잡했고 컬러밴드가 화면을 꽉 채웠다. 시간이 갈수록 형식 요소가 빠지고 단순해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휘어진 밴드 형태에 대해선 “자연스런 행동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화가의 몸통이 콤파스의 축이고 팔이 움직이면 선은 자연히 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단순하게 휜 예쁜 색띠지만 컬러밴드 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2~3일의 시간과 수백 번의 반복적인 붓질이 이어진다. “반복은 움직인다는 것이고, 움직이는 것은 살아 있다는 의미다. 컬러밴드 시리즈는 10년 이상 서서히 변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이 작업을 하면서 쌓인 경험이 응축돼 앞으로의 그림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에게 똑같은 대상을 보여주고 똑같은 크레파스를 쥐어줘도 다 다른 그림이 나온다는 것이다. “아이들 그림이 차이를 보이는 것은 색의 반복성에서 나온다. 색의 차이와 반복을 통해서 그림이 달라진다. 컬러만 가지고 ‘하태임’을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색의 조합이 전면에 드러나는 컬러밴드 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알릴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는 평면 회화인 컬러밴드를 입체 작품으로 만들거나 생활 소품인 조명, 자석 등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구상 중이다.

형태가 아닌 색이 주는 느낌과 조화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풀어내는 하 교수지만 색채에 특별한 상징을 부여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다만 검정색 사용은 자제해왔다. “블랙이 너무 절대적인 색이라 컬러밴드 그림에 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난해 처음으로 검정을 썼다. 블랙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쓴 것이다. 지금도 블랙은 배경 요소로만 쓰지 컬러밴드의 색으로 채택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과거의 작업에 대한 반응과 잔재된 감정이 지금 작업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작업한 그림을 보면 내 마음의 지도가 보인다”고 말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10여 년 넘게 천착한 컬러밴드 그림을 통해 자신을 알린 그지만, 1999년 귀국했을 때는 평면 회화를 하는, 당시 트렌드에서 동떨어진 인물이었다. 그때는 비디오와 타이포그래피 등을 활용한 미디어아트가 ‘최신 유행 품목’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볕들 날이 오지 않겠나 싶었다. 살아남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하 교수는 지금 그만의 표현 방법을 인정받고 있고 동시대 사람과 교감을 잘하는 화가로서 장르를 넘어 많은 호출을 받고 있다.

그는 “기업과의 협업은 더 많은 사람에게 미술을 경험하게 해줄 수 있고 작가 입장에서도 새로운 매체, 새로운 재료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하는 좋은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자신 안에 쌓일 경험과 생각이 다음 작품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그 스스로 더 궁금해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