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받아주는 깡패,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다
  • 허남웅│영화평론가 ()
  • 승인 2014.01.2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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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사랑할 때>의 황정민

황정민은 ‘순정 마초’다. 지금껏 그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영화들을 보자.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너는 내 운명>(이상 2005년), <행복>(2007년)과 같은 ‘순정’ 멜로, <사생결단>(2006년), <부당거래>(2010년), <신세계>(2013년) 등 ‘마초’가 득시글거리는 범죄영화로 장르가 갈린다.

멜로물에 등장해서는 한없이 부드럽기보다는 다소 어수룩하거나 거친 면모로 어필했다. 범죄영화에서는 법을 어기는 순간에도 관객의 동정심을 자아내는 연기로 관심을 모았다. 만약 이 두 개의 캐릭터가 합쳐진다면 어떨까.

<남자가 사랑할 때>는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못해 거친 남자가 첫눈에 반한 여자를 사랑하게 될 때 생길 법한 사연을 다룬다. 태일(황정민)은 겉으로는 사채 회사 부장이지만 빌려준 돈은 어떻게 해서든 받아내는 일종의 용역 깡패다. 호정(한혜진)을 만나게 된 것도 그녀의 아버지가 돈을 빌린 후 갚지 않아서다. 그 돈을 받으러 병원에 갔다가 아버지 병수발을 들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첫눈에 반한 것이다.

ⓒ NEW 제공
여자를 진심으로 사귀어본 적이 없는 태일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만 너무 직설적이라 오히려 호정의 반발을 산다. 사채 거래하듯 각서를 내밀며 만나줄 때마다 빚을 깎아주겠다고 하니 어떤 여자가 그에 선뜻 응할까.

태일이란 인물에게는 <신세계>에서 황정민이 연기했던 화교 출신의 조직 2인자 ‘정청’의 DNA가 고스란히 이식돼 있다. <남자가 사랑할 때>의 기획 자체가 그렇다. 황정민은 <신세계>를 촬영하던 중 제작자와 진심이 가득하고 걸쭉한 멜로 영화를 하기로 의기투합하고 이 영화에 참여했다. 황정민 자신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관객들과 교감할 때 배우로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결국 <남자가 사랑할 때>는 정청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 사랑에 빠졌다면 어떤 모습일까가 출발점이었다.

그에 대한 답변의 캐릭터가 바로 태일이다. <신세계>를 본 이들이라면 정청 같은 사람에게도 과연 사랑이 어울릴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청은 악역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감정이 물씬한 인물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라이벌 2인자 무리에게는 식칼도 휘두르는 무뢰한이지만 경찰 신분을 속이고 조직에 들어온 이자성(이정재)에게는 피를 나눈 형제라며 한없이 관대했던 그였다. 황정민이 연기한 인물들이 대부분 그랬다. 겉으로는 거칠어도 계산 없이 살아가는 탓에 서툰 진심일지언정 결정적인 순간 마음속 순수함이 튀어나와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

<남자가 사랑할 때>의 태일도 마찬가지다. 호정을 만나기 전까지 태일의 정서를 지배하는 건 반드시 돈을 받아내야겠다는 깡패 근성과 여의치 않을 경우 폭력도 불사하는 호전성이다.

영화 시작과 동시에 등장하는 태일의 채권 회수 장면을 보자. 형편이 넉넉지 않아 보이는 동네 한약방에 떼인 돈을 받으러 간 태일은 며칠만 여유를 달라는 사장에게 가져간 석유를 삼키라고 협박한다. 태일 자신이 먼저 석유를 마신 후 라이터를 꺼내들자 두려움을 느낀 사장은 그제야 숨겨뒀던 돈을 꺼내온다. 재밌는 건 그다음이다. 자식 학원비까지 탈탈 털었다고 하소연하는 사장에게 태일은 “자식새끼 공부는 시켜야지” 하며 받은 돈 일부를 되돌려주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인간 실격자에 가까운 태일에게 개선의 여지를 남겨두는 오프닝은 황정민이라는 배우로 인해 진심을 획득한다. 놀란 토끼 같은 눈매와 둥글둥글한 얼굴, 긴 팔을 내려뜨린 채 터벅터벅 걷는 순한 인상의 황정민이 연기하기에 극 중 태일의 행동은 절대적으로 악하거나 폭력적으로 관객을 압도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신경 써주면 선한 사람으로 거듭날 것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라면 모성애를 느끼게 하는 모습이다. 길에서 만나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건달의 서툰 구애에서 진심을 목격하고 끝내 마음을 여는 호정의 심리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런 점에서 <남자가 사랑할 때>는 황정민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팬 서비스 같은 영화다. 다른 이들에게는 주먹을 휘둘러도 나에게만큼은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순한 양이 되는 판타지 속의 남성상을 구현해 보이는 것. <남자가 사랑할 때>의 기자시사회 후 열린 공개 인터뷰 자리에서 황정민은 한혜진과의 연기 호흡이 어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남자들과 싸우는 연기만 하다가 오랜만에 여배우와 호흡을 맞추려다 보니 눈을 못 마주칠 정도로 쑥스러웠다.” 그러자 객석의 여자들 사이에서 흐뭇한 미소와 함께 ‘오~’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영화는 호정을 향한 태일의 사랑 고백만큼이나 투박하지만 황정민이 지닌 그 순정만큼은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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