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 조끼 입은 ‘검은 과부’, 소치를 노린다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1.2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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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계 이슬람 테러리스트 잠입설… 올림픽 앞두고 팽팽한 긴장감

2012년 돌풍을 일으킨 영화 <어벤져스>의 주인공은 지구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들이다. 미국 마블(Marble)사의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전 세계에서 15억2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2012년 최고 흥행작이 됐다. 국내에서도 캐릭터들의 선명한 개성을 무기로 700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7명의 어벤져스 중 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 ‘블랙 위도(black widow·검은 과부)’는 사연이 있는 캐릭터다. 미·소 냉전 시대인 1964년 처음 등장한 블랙 위도는 원래 스탈린그라드 전투 중에 고아가 된 소녀다. 소련 정부는 그를 세뇌시켜 1급 스파이 블랙 위도로 길러낸다. 그러나 임무를 수행하던 중 미국의 슈퍼 히어로 호크아이(Hawkeye)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조국을 떠나 미국의 어벤져스 팀에 합류한다.

2013년 10월31일 러시아 볼고그라드에서 ‘검은 과부’의 소행으로 보이는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버스에서는 테러범으로 추정되는 30세 여성의 여권이 발견됐다(오른쪽). ⓒ AP·ITAR-TASS 연합
지금 러시아에서는 때아닌 ‘검은 과부’ 비상이 걸렸다. 50년 전 만들어진 만화 캐릭터 얘기가 아니다. 이슬람 테러 조직 얘기다. 1월20일 미국의 CNN·NBC·ABC 채널은 러시아 경찰이 4명의 검은 과부 단원을 긴급 수배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 중 한 명은 열흘 전에 이미 소치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동계올림픽 개막식을 한 달 앞두고 3만7000여 명의 군·경찰 병력이 투입된 소치지만 대테러 전략에 구멍이 뚫려 있다는 증거다.

검은 과부는 러시아군에 의해 남편과 가족을 잃고 복수에 나선 여성들을 가리킨다. 러시아 중앙정부는 1991년 소련 붕괴 직후부터 체첸의 분리주의자들을 무력으로 진압해왔다. 체첸계 분리주의자들은 제1차 체첸 전쟁(1994~96년) 이후 이슬람의 성전(聖戰·지하드)을 펼쳤다. 성전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체첸이 위치한 북캅카스 지역(러시아 남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을 벗어나 러시아 전역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체첸 미망인들, 러시아에서 광범위한 테러

이슬람 무장단체는 소치 동계올림픽을 두고 지난해부터 경고해왔다. ‘러시아의 오사마 빈 라덴’이라 불리는 도쿠 우마로프(Doku Umarov)는 지난해 7월 “총력을 다해 소치올림픽을 저지할 것”을 맹세하는 비디오를 공개했다. 그는 러시아 남부 캅카스 지역의 무장단체인 ‘캅카스 에미리트’의 우두머리다. 이 단체는 2009년 네브스키 고속철 폭탄 테러, 2010년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 테러, 2011년 모스크바 공항 테러를 저질렀다고 자인했다. 이 세 차례 테러로 숨진 희생자 수만 100여 명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는 직접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고 우마로프를 수배 중이다.

잠잠했던 폭탄 테러는 지난해 말부터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2013년 10월31일 러시아 남부의 교통 요충지인 볼고그라드의 시내버스에서 수류탄이 터져 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러시아 경찰은 다게스탄 자치공화국 출신의 30세 여성을 자살 폭탄 테러 용의자로 지목했다.

악몽은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되풀이됐다. 12월29일 볼고그라드 역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는 1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현장에서는 검은 과부의 일원으로 보이는 여성과 수류탄을 터뜨린 남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당시 러시아 대테러위원회의 블라디미르 마르킨 대변인은 러시아 당국의 대테러 작전 수행을 칭찬했다.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다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그의 자화자찬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날 또 한 대의 버스가 폭발했다. 14명의 사망자와 3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볼고그라드가 연쇄 테러의 타깃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볼고그라드는 1925년부터 1961년까지 스탈린그라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스탈린그라드는 2차 대전 당시 러시아의 붉은 군대가 독일 나치군에 대항해 승리를 거둔 역사적인 장소다. 그 때문에 ‘슈피겔 온라인’은 볼고그라드 테러를 두고 “볼고그라드에 대한 공격은 전쟁 선포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드미트리 트레닌 카네기 국재평화재단 모스크바 지부장 역시 “테러리스트들은 러시아의 자긍심을 공격하기 위해 볼고그라드를 선택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테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1월10일에는 소치에서 북동쪽으로 270km 떨어진 스타브로폴 주(州)에서 4대의 승용차가 발견됐다. 수 km 간격으로 떨어진 차 안에는 총상을 입고 숨진 시신과 함께 폭탄이 장착돼 있었다. 1월15일에는 다게스탄 자치공화국에서 이슬람 무장단체와 러시아 군 사이에 교전이 벌어져 최소 7명이 사망했다. 모두 분리 독립 문제로 러시아 중앙정부와 갈등을 빚어온 북캅카스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일요일인 1월19일에는 ‘올림픽’을 직접 겨냥하는 영상이 나왔다. 이슬람 무장 세력 ‘빌라야트 다게스탄’이 볼고그라드 테러 준비 과정과 소치올림픽을 향한 경고를 담은 비디오를 공개한 것이다. 동영상 속 남자들은 “소치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놀라운 선물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동영상이 공개된 다음 날, 미국 국방부는 러시아에 두 척의 전함을 포함한 지원군을 보낼 것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주변 압력과 세뇌 때문에 폭탄 조끼 입는다”

이런 와중에 검은 과부들이 소치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언론은 사태의 추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NBC는 지난 1월21일 인터넷 뉴스를 통해 잠재적 테러 용의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고, 이들이 마지막 성화 봉송 구간에서 자살 폭탄 테러를 자행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남편을 잃은 검은 과부들이 폭탄 조끼를 입는 이유는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다. 미국의 테러리즘 및 대테러 연구를 위한 국가 컨소시엄(START)은 “가족을 잃은 여성들이 주변의 압력과 세뇌로 인해 검은 과부가 된다”고 주장했다. 체첸계 분리주의자들이 과부가 된 이슬람 신도들에게 “남편이 없는 여자는 짐일 뿐이다. 남편은 네가 지은 죄의 대가로 죽은 것”이라며 자살 폭탄 테러를 택하라고 종용한다는 것이다. 무장 테러리스트들에게 이 여성들은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 그대로 ‘아직 따라 죽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최근에는 체첸계 이슬람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검은 과부가 될 여성들을 모집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호주의 저널리스트 캔더스 서튼은 2010년 3월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 테러를 일으킨 자넷 압둘라예프를 사례로 들었다. 압둘라예프는 16세이던 2009년 지역 무장 테러 단체의 수장인 우말라트 마고메도프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마고메도프는 12월31일 러시아 군에 의해 살해됐다. 그로부터 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2010년 3월29일 압둘라예프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다른 여성과 차례로 허리춤에 찬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였다. 이 사고로 총 40여 명이 사망하고 9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검은 과부의 소치 잠입 소식을 접한 미국 상원 정보부의 앵거스 킹 주니어 의원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소치에 가지 않을 것이다. 가족들도 소치로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계심을 표시했다. 독일 올림픽위원회의 크리스티안 클라우에 대변인은 시사저널과의 전화 통화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면서도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에는 늘 테러 위협이 따른다. 또한 개최국에서의 군사행동은 오직 개최국만이 정할 수 있다. 우리로서는 러시아의 테러 대응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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