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vs정몽준·김황식 “소통령은 나야, 나”
  • 이승욱 기자·차윤주 뉴스1 기자 ()
  • 승인 2014.02.12 11:5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한민국 심장부, 수도 서울의 대표 일꾼을 선출하는 6·4 서울시장 선거가 격랑에 휩싸이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대항마로 여권 거물급 정치인들이 출전을 위한 결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권 ‘잠룡’인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관료 엘리트’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새누리당 서울시장 경선에 동반 출격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당내 주류인 친박 진영의 선택을 좌우할 ‘박심(朴心)’의 향배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시장은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최대 30명에 이르는 국무위원과 함께 배석한다. 서울시장은 선출직 공직자로서는 유일하게 국무회의에 배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 대한민국 수도 수장의 높은 정치적 위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정치권에서 서울시장 선거를 ‘소통령 선거’라고 부른다. 지난 20년 동안 치러진 서울시장 선거의 양상을 봐도 그렇다. 역대 서울시장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연상시킬 만큼 ‘잠룡’들이 뒤엉켜 벌이는, 당의 사활을 건 전쟁터였다. 역대 서울시장은 항상 유력한 대권 주자로 부각됐고, 실제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권을 잡았다.

민선 체제 부활 이후 7번째(2011년 보궐선거 포함)로 치러지는 서울시장 선거가 2월4일 예비후보 등록 절차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당초 새누리당은 민주당 소속 현역인 박원순 시장의 대항마를 찾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모습이었으나, 설 연휴 이후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거물급 정치인인 7선의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출마가 윤곽을 드러내면서 선거 판세 전반을 뒤흔드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2월7일 현재 정 의원과 김 전 총리의 동반 출격이 최종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서는 “사실상 출마 결심을 굳힌 상태”라는 전언이 나온다. 이미 출마를 공식화한 이혜훈 최고위원과 더불어 이들 가운데 한 명이 결국 박원순 시장과 대격돌을 펼칠 것이 확실하다.

박원순 서울시장 ⓒ 시사저널 포토정몽준 새누리당 의원 ⓒ 연합뉴스김황식 전 국무총리 ⓒ 시사저널 임준선
박근혜 대통령 말발 과연 먹힐까

남은 변수는 딱 두 가지다. 박근혜 대통령과 안철수 의원의 선택이 그것이다. 안 의원이 과연 서울시장 후보를 내느냐 여부는 박 시장의 입지와 직결된다. 마찬가지로 그 반대편인 여권에서 집권 2년 차 대통령의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렵다. 여전히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50%를 넘고 있다. 정 의원과 김 전 총리 모두 1차 관문인 당내 경선 승리를 위해서는 새누리당 내 친박계의 지원을 등에 업어야 한다. 따라서 경선 과정에서 ‘박심(朴心)’의 향배는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새누리당 주변에서는 “박심은 김 전 총리”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청와대의 기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지도부가 김 전 총리의 출마를 끈질기게 권유한 것이 그 방증이다.

여기에 정 의원은 발끈한다. 정 의원은 이미 2002년과 2012년 대선에 도전장을 냈던 거물이다. 그는 오는 2017년 대선에 대한 대망을 버리지 않았다. 최다선인 7선의 정 의원이 ‘소통령’ 선거에 나선 것은 뭔가 비장한 결심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 의원 주변에서는 “최근 안철수 의원의 눈에 결기가 느껴진다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정 의원이 최근 딱 그렇다. 뭔가 단단히 결심을 한 듯하다”고 전했다. 정 의원이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오는 6월 ‘소통령’ 선거가 3년 후 있을 대통령 선거의 전초전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2년 10월28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18대 대선 중앙대책위 여성본부 출범식에 정몽준 선대위원장과 함께 참석했다. ⓒ 뉴시스

■정몽준·김황식의 도전장

정몽준 의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재벌 2세다. 그는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아들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정 의원은 지난해 3월 19대 국회의원 재산 신고 당시 1조9249억원을 보유한 것으로 신고해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했다. 정 의원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MBA를 밟았다. 석사 과정을 마친 후, 1982년 만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현대중공업 사장에 취임했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기업가와 정치인의 길을 동시에 걸었다. 그는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후보와의 경선에서 실패한 것을 제외하면, 내리 7선의 국회의원을 지내며 선거에서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순조로운 정치 행로를 걸어왔다.

정 의원 주변에서는 ‘재벌 2세’ 이미지만 각인되는 것에 대해 적극적인 반론을 펼친다. 정 의원이 처음 정계에 입문할 때인 1988년 총선 당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이 여당 후보로 출마할 것을 종용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무소속 출마를 결행했다는 것이다. 정 의원의 당시 지역구인 울산은 여당의 텃밭이다. 정 의원은 당시 무소속 출마 결행을 “공직을 권력의 입맛에 맞춰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새누리당의 한 최고위원은 “일각에서는 정 의원이 귀공자 스타일로 내공이 부족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다르다”며 “정책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정 의원은 ‘아산정책연구원’과 ‘해밀을 찾는 소망’ 등 자신의 싱크탱크를 중심으로 국내외에 다양한 분야의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정 의원이 이번에 승부수를 던진 데는 서울시장 선거를 통해 준비된 정책 비전과 소탈한 서민적 취향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 상대 후보가 서민적 이미지의 시민운동가 출신 박원순 시장인 만큼 이번 기회에 아예 정면으로 맞서 박 시장보다 훨씬 더 서민적이고 소탈한 풍모를 보여줄 요량이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향후 대선에서도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정 의원의 승부수가 제대로 먹힐지 여부는 1차 관문인 당내 경선에서부터 판가름 날 전망이다.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탓이다. 바로 김황식 전 총리다.

김 전 총리는 엘리트 관료 출신이지만, 지난 이명박 정권 때 서민적 행보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전남 장성 출신인 그는 광주제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2년 사법시험(14회)에 합격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관운도 따랐다. 2008년 9월 대법관 임기를 마치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의해 감사원장에 발탁된 그는 2년여 만인 2010년 10월 김태호 당시 총리 후보자가 낙마하자 국무총리로 발탁됐다. 법조계를 통틀어 대법관과 감사원장 그리고 총리로 이어지는 화려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제외하면 그가 유일하다.

“이미 치밀한 계산 섰을 것…캠프도 진즉 가동”

정통 정치인이 아닌 탓에 ‘편한 길만 걸어가려 한다’는 편견을 낳기도 했다. 김 전 총리 측이 경선보다는 내심 추대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렸다. 김 전 총리에 대해서는 오랜 관료 생활 탓에 관료적 이미지가 강한 게 단점으로 꼽히지만, 저돌적인 정치인 스타일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김 전 총리는 지난해 11월 국회 강연 때 “국회를 해산시켜야 할 상황”이라고 말해 정치권의 간담을 써늘하게 했다. 한 법조계 인사는 “김 전 총리가 감사원장을 맡았을 때부터 정치인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며 “김 전 총리는 정통 관료 출신과는 달리 스킨십이 풍부하다”고 말했다.

정 의원과 김 전 총리의 서울시장 출마가 점차 기정사실화하면서 두 사람과 이혜훈 최고위원이 경쟁하는 3파전 구도의 ‘빅매치’가 성사될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내부에선 두 사람이 동시 출격할 가능성을 크게 점치는 분위기다. 두 사람이 출마 가능성을 엿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출마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새누리당 핵심 관계자는 “정 의원이나 김 전 총리 모두 절대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치밀히 계산하고 움직인다. 한마디로 단수가 높은 인물들”이라며 “이미 시뮬레이션을 통해 뛰어볼 만한 싸움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정 의원은 오래전부터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고 보좌진을 모집해왔고, 김 전 총리는 옛 친이계를 중심으로 캠프까지 구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매사에 철두철미한 두 사람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정치생명을 건 승부수를 띄운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박원순의 여유

소탈하고 서민적 이미지로는 전혀 박 시장에게 뒤질 바 없다는 듯 정면 도전을 선언하고 나선 새누리당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총리 등을 바라보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표정에는 아직 여유가 있다. 박 시장은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틀 전(12월23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내가 정치인이 다 됐다”고 자평했다. “평소 크리스마스 때 무엇을 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박 시장은 “크리스마스에는 교회와 성당에 가야죠”라며 “초파일엔 절에 간다. 갈 때마다 그곳 교인인 양 사람들과 열심히 인사한다”며 웃었다.

2011년 10월 보궐선거로 서울시장에 취임한 후 2년 동안 ‘시민운동가 박원순’에서 ‘정치인 박원순’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 시장을 옆에서 꾸준히 지켜본 이들은 최근 그의 모습에 대해 “여유가 느껴진다” “제법 늘었다”는 평가를 많이 한다. 박 시장 역시 “(오는 6월 선거전에서) 토론은 자신 있다. 주변에서 오히려 토론회 나가서 너무 아는 척하지 말라고 한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자기 자랑도 제법 늘었다. 전임 시장 시절 지하철 9호선 사업자로 참여하며 논란을 빚었던 외국계 자본인 맥쿼리인프라를 쫓아내고 서울시 예산을 3조원 이상 아낀 것을 두고는 “진작 했어야 하는데 늦게 알았다. 아쉽고 잘못한 것투성이”라고 몸을 낮췄다. 속뜻을 살피면 결과적으로 자랑인데, 듣는 동안 ‘재수 없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든다. 그의 말대로 진짜 정치인이 다 됐다.

2011년 10월 박 시장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의사가 알려지자 일각에선 그동안 박 시장이 정치를 하기 위해 시민운동가 커리어를 쌓아왔다는 의구심을 보냈다. 보궐선거 출마는 박 시장의 ‘인생 스케줄 표’에 정말 없었던 일일까. 그의 말도 그렇고 주변의 말을 종합해봐도 답은 ‘그렇다’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박 시장에 대한 평가도 후한 편이다. 박 시장의 재선 가도를 가볍게 해주는 대목이다.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서울시 부채는 3조2506억원으로 줄어들었고, 그의 말대로 지하철 9호선 재구조화도 상당한 업적이 됐다. 전임 시장 시절 빚어진 뉴타운 사업 갈등도 점차 잦아들고 있다.

‘좌파 이벤트주의자’ 평가도

박 시장의 자기 관리도 정평이 나 있다. 체중 조절을 위해 지난해부터는 식사량을 절반으로 줄였다고 한다. 휴일엔 산과 전통시장 등 서울 곳곳을 누빈다. 같이 사는 견공 ‘대박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도 한다. 그는 하루 너덧 시간을 잔다는데 TV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을 줄줄이 꿴다. 그러면서 “서울시 공무원들 덜 힘들게 하려고 온 에너지를 딴 데 쏟고 있다”고 농을 친다.

현역 시장이지만 대중적인 인기도는 취임 전 못지않다. 인기의 원천은 젊은 층이다. ‘카페트’(카카오스토리·페이스북·트위터) 친구가 100만명에 육박한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소통에 능한 그에게 젊은이들은 ‘완판시장’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말꼬리를 길게 내리는 특유의 말투와 서민적인 얼굴 때문이다. 격식도 크게 안 따진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박 시장 취임 초기 서울시 공무원들은 ‘앉아서 하는’ 대면 보고가 상당히 어색했다고 한다. 전임 시장들에게 했던 것처럼 공무원들이 앉아 있는 시장에게 서서 보고하려고 하자 박 시장은 “왜 서 계세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한 국장은 “평생 서서 보고하다 앉아서 하려니 처음엔 퍽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반면 박원순 서울시장과 일해본 사람들은 그의 ‘미친 꼼꼼함’에 혀를 내두른다. 이는 장점이면서도 단점이 되기도 한다. 격의 없지만 냉정하다는 평가도 많다. 진보 진영의 한 원로 학자는 “오세훈 전 시장이 우파 이벤트주의자였다면, 박 시장은 좌파 이벤트주의자”라고 평했다. 오 전 시장과 이념 지형만 다를 뿐 일을 벌여  주목받기 좋아하는 인간형이란 평가다. 실제 박 시장의 브랜드가 된 협동조합·마을공동체 등 ‘사회적 경제’ 정책들은 숫자로 실적을 보여주기 힘든 측면이 있다.  


박근혜와 정몽준의 ‘엇박자’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빅매치’로 치러질 것으로 예고되면서 세간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청와대로 향하고 있다. 당내 주류인 ‘친박’이 두 사람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에 따라 정 의원과 박근혜 대통령의 과거 엇박자도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고 있다.

정몽준 의원은 지난 2011년 8월 펴낸 자서전 <나의 도전 나의 열정>에서 박 대통령과 ‘얼굴을 붉힌’ 사례를 소개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2009년 9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 취임 후 박 대통령과 국회 커피숍에서 회동한 적이 있다. 회동 후 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10월 재보선에서 박 전 대표(박 대통령)가 선거를 도울 것으로 보는가”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정 의원은 “박 전 대표도 마음속으로 우리 후보들이 잘되기를 바라시지 않겠는가”라고 답했다. 당시 보도가 난 후 정 의원은 박 대통령의 항의 전화를 받았고, “화를 내는 박 전 대표의 전화 목소리가 하도 커서 같은 방에 있던 의원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바람에 민망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02년에도 박 대통령의 항의를 받은 사례를 소개했다. 당시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박 대통령은 2002년 5월 북한을 방문해 북한 축구팀의 남한 방문을 제안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부터 축구팀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결국 정 의원이 회장으로 있던 대한축구협회의 조율로 2002년 9월 초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남북한 축구 경기가 열렸다. 정작 문제는 여기서 터졌다. 일부 관중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민국’ 구호를 외친 것이 화근이었다.

북측과 한반도기를 들고 ‘통일조국’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합의했던 박 대통령이 정 의원에게 화난 얼굴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항의한 것이다. 정 의원은 자서전에서 “훗날 박 전 대표는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서는 ‘약속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다’며 후한 평가를 내렸다. 반면에 나는 약속을 잘 안 지키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고 씁쓸해했다.


 
 

성공한 시민운동가에서 ‘협찬왕’ 공격까지 


재선에 도전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자신감 바탕에는 2년 4개월간 수도 서울을 진두지휘한 내공과 그를 시장 자리로 이끈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 이력이 있다. 그에게는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내고 검사, 인권 변호사를 거쳐 시민운동가 그리고 서울시장으로 성공을 거듭한 이의 단단함이 느껴진다.

초년기 박 시장의 주류 진입 열망은 대단했던 것 같다. 경남 창녕 깡촌 출신인 그는 고등학교 한 번, 대학교 한 번 잇단 재수 끝에 ‘KS(경기고-서울대)’ 라인을 거머쥐었다. 그는 서울대 합격에 대해 “둥둥 나는 것 같았다”고 공개 인터뷰에서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대 입학 후 유신과 맞섰고 이후 인생 궤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1983년부터 일반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큰돈도 만졌다는 그는 사법연수원에서 만난  조영래 변호사와 의기투합해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1990년 조 변호사가 세상을 뜬 뒤에는 돌연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조변’의 생전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1994년 돌아와 참여연대를 만들었다. 1998년 소액주주 운동, 2000년 총선 낙천·낙선 운동으로 크게 주목받았고 ‘1인 시위’라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다.

지독한 일중독에 완벽주의자인 그는 따라오지 못하는 직원을 호되게 다그쳤고 그런 그를 ‘독불장군’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소심함 때문에 완벽주의자가 됐다. 스스로 빈틈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뭐든지 완벽해야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었다”는 게 본인의 변이다.

2001년에는 새로운 기부 문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아름다운재단을 세웠다. 그가 시장 출마 당시 “대선을 위한 욕구에 시정을 종속시켰다”고 비판한 이명박 전임 시장도 재단에 월급을 기부했다. 하지만 참여연대 시절 비판했던 삼성그룹이나 론스타 등에게 거액을 후원받은 것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직전 백두대간 종주 비용을 아웃도어 의류업체가 전액 협찬했다는 게 알려져 보수 진영으로부터 ‘협찬왕’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