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한번 엎어봐?”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4.02.18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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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소멸된 것처럼 여겨졌던 친이계를 중심으로 한 ‘비박(非朴)’ 진영이 다시 용틀임을 하고 있다. 지방선거 차출에 내몰린 정몽준 의원을 비롯해 김문수 경기도지사, 남경필 의원, 원희룡 전 의원 등이 최근 들어 부쩍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기 당권을 노리는 김무성 의원의 행보도 빨라지고 있다. 새누리당 내에서는 “이미 당내에서는 레임덕 조짐이 일고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권력은 수적 우위에서 나온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머릿수를 가리는 수단은 선거다. 선거를 통해 권력의 부침이 이어진다. 전신 한나라당을 포함한 새누리당의 당내 헤게모니 싸움 역시 선거를 통해 승부가 갈렸다. 이명박(MB) 정권 출범 첫해인 2008년 4월 18대 총선을 가리켜 ‘친박계’ 인사들은 ‘공천 학살’이라는 표현을 쓴다. MB를 내세운 ‘친이계’가 공천을 독점하면서 친박 정치인들을 사실상 전멸시켰다는 것이다.

2월11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이혜훈 새누리당 최고위원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남경필·김무성·정몽준(왼쪽부터) 의원. ⓒ 시사저널 이종현
하지만 권력의 단맛은 오래가지 않았다. 4년 후인 2012년 4월 19대 총선에선 반대의 상황이 연출됐다. 당권을 장악한 친박계가 박근혜 대선 후보를 내세워 친이계 정치인들을 가차 없이 내쳤다. 이어진 그해 12월 대선에서 박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첨예한 갈등을 벌여왔던 친이계와 친박계의 계파 갈등도 종식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치는 생물이다. 선거는 어김없이 또 돌아오고, 권력의 생성과 소멸은 반복된다. 오는 6월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권 권력 지형이 또 한 번 요동칠 전망이다.

“대통령 레임덕 징후 당내에서 시작됐다”

“이제 친박(親朴)이니, 비박(非朴)이니 하는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새누리당 안에는 더 이상 친박도 비박도 없다.”

지난해 박근혜정부 출범 후 사석에서 기자와 만난 새누리당 친박계의 한 다선 의원이 손사래를 치며 한 말이다.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난맥상이 불거지며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나올 즈음이었다. 정치권에서는 박근혜정부의 집권 초반이지만, 연이은 인사 실패로 인해 당내 비주류인 친이계와 중도파 등 이른바 비박 진영이 비난의 강도를 높이면서 해묵은 ‘친박 대 비박’의 갈등이 재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계파 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비박이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힘이 실릴 수 없는 당내 구도다. 잘 알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친박도 비박도 없다’는 그의 말에는 존재감이 희미한 비박 진영에 대한 친박 진영의 자신감이 짙게 배여 있었다.

실제 이명박 정권 말기로 접어들고 친박의 수장인 박 대통령이 대권을 거머쥐면서 새누리당 내 친이계 등 비박 진영은 지리멸렬했다. 박 대통령 당선과 이 전 대통령의 퇴임으로 계파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인사 파동 당시 김용태 의원 등 친이계 소장파 의원을 중심으로 간헐적인 ‘저항’이 있긴 했지만 당내 주류인 친박의 목소리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비박 진영의 구심점이 없다는 점은 비박의 붕괴를 기정사실화했다. 새누리당 내 친이계 한 인사는 “원래 비박의 주축이 된 친이 쪽 인사들은 ‘모래알’과 같은 존재였다. 구심점이 사라지면 모래알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제각각 흩어질 수밖에 없다.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점이 비박 진영으로서는 최대의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 집권 2년 차로 접어들면서 비박 진영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친박의 위세에 눌려 몸을 바짝 움츠리고 있던 지난해와는 양상이 다르다. 당권파 등 친박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장면이 빈번히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6·4 지방선거를 계기로 비박 진영은 당권을 주도하기 위해 당내 주류인 친박과의 본격적인 대결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수적으로나 ‘박심(朴心)’이라는 배경으로나 친박과 비박의 싸움에선 친박의 우세가 불 보듯 뻔하다. 하지만 양 진영을 대표하는 구심점의 면모를 보면 말이 달라진다. ‘모래알’ 같다던 비박 진영에서 구심점 역할을 할 인물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김무성·정몽준 의원, 김문수 경기도지사, 남경필 의원, 원희룡 전 의원 등 이른바 ‘대권 잠룡’으로 분류되는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김 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시장(정몽준)과 경기도지사(김문수·남경필), 제주지사(원희룡) 등 지방선거 중진 차출을 강력히 요구받는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선거철이 되면서 몸값이 치솟는 것이다. 반면 친박 내에서는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될 만한 인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이에 따라 정치권에서는 구심점을 찾은 비박 진영이 당내 헤게모니를 놓고 친박 진영과 대격돌을 벌일 시기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6·4 지방선거 중진 차출론, 원내대표 경선 및 전당대회 시기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잇따르는 것은 양 진영이 본 게임을 앞두고 벌이는 샅바싸움 성격이 짙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박 대통령의 레임덕 징후가 이미 당내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11월25일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청와대 제공
지방선거 맞아 현실화하는 ‘비박 3각 연대’

이른바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는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해 10월 경기 화성갑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돼 정치 일선으로 복귀하자 여권 내에서는 ‘비박 3각 연대설’이 회자됐다. 비박 3각 연대설의 요지는 이렇다. 새누리당 내 전략통인 한 인사는 “서청원 전 대표가 원내 진출을 할 경우, 당연히 김무성 의원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김 의원으로서는 비박을 중심으로 당내 기반을 유지해야 할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온 게 비박 3각 연대다. 김 의원으로서는 차기 대권 주자이면서 비박 진영의 대표 주자인 김문수 경기도지사와 정몽준 의원을 모두 끌어안아야 ‘박심’을 등에 업고 있는 서 의원과 당 지도부를 견제하고 당내 기득권을 지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박 3각 연대설은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차츰 현실화하고 있다. 대표와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전당대회(전대) 시기를 두고 김무성 의원과 정몽준 의원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새누리당 내부에서 전당대회 시기는 이미 지난 1월 초 황우여 대표가 조기 전대론을 일축하며 교통정리가 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황 대표는 “당 지도부의 임기가 끝나는 5월 전당대회는 지방선거에 임박해 치러지는 만큼 적절하지 않다. 또 2~3월로 앞당겨 치르는 조기 전대론도 당이 시끄러워질 수 있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황 대표는 대신 원내대표 경선을 5월에 치르고, 차기 원내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을 맡는 이른바 ‘비상대책위원회+선거대책위원회’ 양대 체제로 지방선거를 치르자는 안을 제시했다.

당시 황 대표의 제안은 큰 시빗거리가 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비박 진영의 반발 강도도 예상보다 약했다. 사실상 황 대표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지방선거와 당권 경쟁에서 ‘박심’ 논란이 일자, 전대 시기를 두고 비박 진영이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김무성 의원은 2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중진 연석회의에서 “당헌·당규상 전대 개최 시기는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몽준 의원도 “비상대책위는 정말 정상이 아니고 어려울 때 구성하는 것인데 지금이 그런 상황에 해당하는지 모르겠다”며 전대 연기론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조기 전당대회 개최를 일축한 친박 주류의 움직임에 비박 3각 연대의 중심인물들이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친박, 힘든 일은 않고 편한 길만 걸으려 해”

표면적으로는 전대 시기를 두고 친박과 비박 진영의 논란이 노골화하는 양상이지만, 그동안 당내 주류인 친박의 일방적인 당 운영에 대한 비주류의 반발이 폭발한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비박 진영에서는 당 인재영입위원장으로 6·4 지방선거를 지휘하고 있는 친박 핵심인 홍문종 사무총장 등 당 지도부가 ‘중진 차출론’을 강하게 밀어붙이며 비박을 압박하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왔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측은 3선 불출마 선언 이후에도 차출론이 지속적으로 거론되자 불쾌감을 강하게 드러내기도 했다.

비상대책위 체제로 지방선거를 치르겠다는 당 지도부의 전략이 나오면서 비박 진영에서는 “친박 주류가 힘든 일은 안 하고 편한 길만 걸으려 한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거기다 원내대표 경선에 청와대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비박은 “우리는 당권을 거들떠보지도 말라는 이야기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조기 전대를 주장하는 김성태 의원은 “현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지금까지 전당대회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며 “(당내 주류가 전대를 무기한 연기하자는 것은) 지방선거 결과를 책임지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친이계로 분류되는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우리더러 당을 위해 헌신하라면서 정작 자신들은 꼼수를 부리는데, 누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말했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홍문종 사무총장, 최경환 원내대표(오른쪽부터)가 2월12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당 지도부가 긁어 부스럼 만든 꼴” 친박도 불만

논란을 빚고 있는 전당대회 시기는 사실상 친박과 비박 측이 제시하는 절충안으로 가닥을 잡을 공산이 크다. 이에 따라 당초 당 지도부가 제시한 ‘8월 전당대회’보다는 시기를 다소 앞당겨 지방선거 직후인 ‘6월 말이나 7월 초 전당대회’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와 함께 지방선거 선대위 체제를 당내 주류인 서청원 의원과 비주류인 김무성·이인제 의원 등이 권역별로 삼분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친박과 비박이 적절히 책임을 떠안는 구조다.

하지만 전대 시기를 두고 의견 충돌을 겪는 과정에서 대권 잠룡을 중심으로 구심점을 찾은 비박 진영이 사안마다 친박 진영의 발목을 잡을 공산이 크다. 5월로 예정된 원내대표 경선은 양 진영이 당권을 두고 혈전을 벌일 첫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내 비주류의 지원을 받고 있는 남경필 의원은 중진 차출론을 일축하면서 원내대표 경선 출마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남 의원은 2월12일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주광덕 청와대 정무비서관과의 접촉 사실을 밝히면서 “청와대가 (경기도지사 출마와 관련해) 내 생각을 듣고 싶어 했다. 경기도지사 선거에는 뜻이 없다고 했더니 ‘그래도 불출마 선언은 하지 말아달라’고 하더라”며 청와대 개입설을 주장했다.

당내 계파 갈등이 증폭된 데 대해 친박 일각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진 차출론을 거론하며 비박 인사들을 자극해 화를 부른 당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른바 ‘박심’ 논란이 증폭되는 와중에 청와대의 당내 선거 개입 사실이 퍼져 나온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주영 의원의 해양수산부장관 발탁과 관련해 친박계 원내대표 후보군을 서청원 의원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완구 의원으로 압축하려는 전략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결국 원내대표 경선에서 당내 비주류인 남 의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지방선거 후보군 물색과 원내대표 경선 등에서 청와대와 당 지도부 등 친박 주류가 ‘강한 드라이브’를 건 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는 지적도 있다. 청와대뿐만 아니라 당 지도부마저 ‘심기 경호’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화근이 됐다는 이야기다. 정치권에서는 당초 6·4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야권에 패배할 경우 박 대통령이 조기 레임덕에 빠질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계 인사는 “당 지도부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꼴이 돼버렸다”며 “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우려해 지방선거 필승 전략으로 중진 차출론을 거론한 것이 오히려 비박 진영에게 명분만 줬다. 결국 당내에서 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부채질한 꼴이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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