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면 생색내고, 지면 ‘팽’시키기?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02.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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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계, 비주류 중진 ‘등 떠밀기’ 논란…“조폭식 겁박” 반발

“말로는 선당후사(先黨後私)라지만 실제로는 협박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최근 여권 실세들이 지방선거 출마를 고사하는 유력 후보들을 출마시키기 위해 ‘설득 반 협박 반’으로 전 방위 공세를 펼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당의 어려운 사정을 먼저 생각해달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치 그만하고 싶은 거냐”고 윽박지르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원희룡 전 의원은 현재 당에서 특별한 역할을 맡지 않고 있는 전직 의원이지만, 여전히 여의도 정치권 안팎에서 차세대 리더로 거론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가 2월9일 출입기자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안했을 때 20명 넘게 참석한 이유다. 그런데 이날 원 전 의원의 입에서 귀를 의심케 하는 폭탄성 발언이 나왔다. “(친박 지도부가) 제주도지사 선거에 나가지 않으면 두고 보자는 식으로 압박한다”는 것이다. 그의 얘기는 이랬다.

원희룡 새누리당 전 의원(왼쪽)이 2월12일 남경필 의원의 출판기념회 겸 북콘서트에서 남 의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이데일리 제공
“정치 그만하고 싶은 거냐” 협박

“김재원 전략기획위원장이 거의 매일 연락해서 압박한다. 출마해달라는 타협성 멘트도 있지만, ‘당이 어려울 때 안 나서주면 나중에 큰일 할 때 당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느냐’는 식의 협박성 멘트도 섞여 있다. 당에서는 마치 (내가 선거에) 안 나가면 어떻게 하겠다는 뒤끝을 보여줄 것 같기도 하다.”

원 전 의원은 경기도지사 출마 압박을 받고 있는 남경필 의원에 대해서도 “나보다 당에서 조임을 당하는 게 훨씬 심한 것 같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이 표현한 대로 ‘강제로’ 나가게 한다는 게 뭔지 한번 물어봐야겠다”고 덧붙였다. 그는 “협박 정치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나도 (선거 실무를 책임지는) 사무총장을 해봤으니까 잘 안다”며 즉답을 피했지만, 이를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간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제주도지사 후보로 거론된 데 대해 “99% 차단해왔다”던 원 전 의원은 이튿날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지도부의 요구는 반대할 수 있지만 국민과 당원이 원하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며 출마 가능성을 열어두는 쪽으로 바뀌었다.

사실 새누리당 주변에선 연초부터 이른바 지방선거 ‘중진 차출론’이 공론화되면서 친박계 지도부가 일부 유력 인사들의 출마를 직간접적으로 압박하고 있다는 얘기가 적지 않았다. 원 전 의원은 오찬간담회에서 작심한 듯 이런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공개적으로 확인시켜준 셈이다. 이후 친박 지도부가 협박성 발언으로 출마를 압박하고 있다는 폭로가 줄을 이었다. 남경필 의원의 한 측근은 “남 의원은 정말로 경기도지사에는 생각이 없고 원내대표를 하고 싶어 한다”며 “그동안 출마 의사를 타진하는 정도이던 당 지도부의 태도가 최근 들어서는 ‘원내대표에 당선될 수 있을 것 같으냐’는 협박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당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친박계 의원들이 비주류인 남 의원에게 표를 주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하라는 식이라는 것이다.

서울시장 출마를 검토 중이라고 했던 김황식 전 총리 측도 마찬가지다. 한 측근은 “김 전 총리는 실제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려는 의지가 크게 없다”며 “그런데 당에서 등을 떠미니까 어쩔 수 없이 ‘지금 숙고하고 있다’는 식으로 입장을 밝히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사실상 서울시장 출마 결심을 굳힌 정몽준 의원 측도 한때 발끈한 적이 있다. 홍문종 사무총장이 ‘선당후사’를 강조하며 정 의원과 남 의원을 직접 거명했기 때문이다. 정 의원의 한 측근은 “솔직히 당시엔 출마 여부에 대해 여러 얘기를 듣고 있는 중이었는데, 당 사무총장이 마치 출마하지 않으면 배신자라는 식으로 몰아가 굉장히 불쾌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이런 압박은 황우여 대표에게까지 가해지고 있다. 대표실 관계자는 최근 공개된 지도부 회의 자리에서 심재철 최고위원이 황 대표의 인천시장 출마를 요구한 사실을 거론하며 “친박 실세들이 심 최고위원을 부추겼다더라. 황 대표 자신이 ‘생각이 없다’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압박하는 건 정치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0년 9월29일 국회 제3회의장에서 가진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김황식 후보자가 오전 청문회를 마친 후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친박 실세들,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들”

여권 내 친박 핵심 인사들이 협박성 발언까지 쏟아내며 유력 인사들의 출마를 종용하는 것은 6월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초조감 때문이란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현 상황에서는 텃밭인 영남권 외에는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크고, 게다가 영남권에서도 정치적 상징성이 큰 부산의 선거 판세를 상당히 유동적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친박 실세들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승패의 바로미터로 여겨지는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서울시장 선거는 이혜훈 최고위원이 강한 의욕을 보이고는 있지만, 민주당 소속 박원순 현 시장을 넘어서려면 당내 경선에서 정 의원과 김 전 총리의 ‘빅매치’가 필수라는 분석이 많다.

경기도지사 선거는 필승 카드로 여겼던 김문수 지사가 3선 도전 불출마를 선언한 후 마음이 급해졌다. 원유철·정병국 의원이 바닥을 훑고 있지만 남경필 의원이 아니고서는 민주당 김진표·원혜영 의원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천시장 선거도 황 대표 외엔 민주당 소속 송영길 현 시장과의 맞대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다. 제주는 우근민 현 지사를 입당시켜 무난히 치르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우 지사의 성추행 전력 파문이 예상외로 커지자 제주 출신인 원희룡 전 의원을 긴급 투입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문제는 협박성 출마 종용 자체가 상식을 벗어나는 일인 데다 대상자들이 하나같이 비주류인 비박(非朴)계 인사들이어서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교체 시기와도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친박 주류 진영의 불순한 의도를 거론하는 목소리가 높다.

비주류 측은 대놓고 반발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불만스런 표정이 역력하다. 한 비주류 재선 의원은 “친박 실세들이란 사람들은 참으로 염치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는 “청와대나 당에서 주요 자리를 싹쓸이해 권력을 독점해놓고 정작 선거 때가 되니까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사람들을 겁박하고 있다”며 “선거에서 지면 평소 눈엣가시 같던 사람들을 한 방에 보내는 거고, 반대로 이기면 자기들 생색내느라 정신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 의원과 가까운 사이인 한 수도권 의원은 “남 의원에게 친박계 의원들의 표를 무기 삼아 경기도지사 출마를 강요하는 작태는 깡패나 다름없는 짓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영남 출신 의원은 “지금 친박계 지도부의 움직임을 보면 마치 비주류 인사들은 다 선거에 내보내서 글자 그대로 ‘친박당’을 만들려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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