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빠진 수사’ 하다 ‘김용판’을 놓치다
  • 조해수 기자 (chs900@sisapress.com)
  • 승인 2014.02.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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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여당 실세 통화 내역 안 밝혀…댓글 사건 수사 의지 의심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수사 축소·은폐’ 혐의로 기소된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1심 무죄 판결 후폭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야당은 특검을 촉구하고 나섰고, 여당은 “특검 주장은 제2의 대선 불복”이라며 수용 불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쪽은 검찰이다. 검찰은 “검사의 명예를 걸고 재판에 임하라”는 김진태 검찰총장의 불호령이 있은 후 즉각 항소했지만, 부실 수사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또다시 ‘정치검찰’ 논란에 휩싸였다.

검찰은 이번 1심 재판 결과에 대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부장판사 이범균)는 2월6일 “경찰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중간 수사 결과 발표에 아쉬움은 있지만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김 전 청장에게 형사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무죄 선고 이유를 밝혔다. 한마디로 ‘증거 불충분’이라는 얘기다. 검찰은 14차례에 걸친 공판 과정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대부분 권은희 당시 수서경찰서 수사과장(현 관악서 여성청소년과장)의 진술에 의존했다. 재판부는 “권 과장 진술이 증인으로 채택된 다른 17명의 경찰 진술과 다르다”며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검찰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김 전 청장의 범행 동기를 밝히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검찰은 김 전 청장을 기소하면서 이번 사건을 김 전 청장의 ‘자발적 충성’에 의한 단독 범행으로 결론 내렸다. 김 전 청장이 대선 전에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발표하면 대선 후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2월6일 무죄 선고를 받고 법원 밖으로 나오면서 미소를 짓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검찰, 김용판 전 청장 ‘개인 일탈’로 규정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대선을 사흘 앞둔 민감한 시점에 선거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을 처리하면서, 불명확한 대가에 대한 기대만으로 이러한 일을 저지를 사람은 없다. 특히 당시 선거전은 여야 후보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 전 청장을 움직인 ‘배후 세력’에 대한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검찰도 수사 초기 김 전 청장의 범행 동기, 즉 배후 세력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검찰은 사건이 최초 발생한 2012년 12월11일부터 경찰의 중간 수사 결과 발표가 있은 16일까지의 경찰, 국정원 및 정치권 관계자의 통화 내역을 살펴봤다. 이를 통해 이 기간 동안 3자 간의 통화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김 전 청장의 범행 동기를 밝혀낼 수 있는 간접증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통화 내역은 통화한 사람과 통화한 시간은 알 수 있지만 통화 내용까지는 알 수 없다. 통화한 사실만으로는 국정원이나 정치 관계자가 김 전 청장의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검찰은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어차피 이 사건을 김 전 청장의 단독 범행으로 규정하고, 배후 세력보다는 김 전 청장의 유죄 입증 여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의 이와 같은 수사 기조는 증거 자료로 법원에 제출한 통화 내역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검찰은 지난해 9월 재판부에 통화 내역을 증거 자료로 제출하면서 국정원 직원의 이름은 기재한 반면 정치인 실명은 싣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검찰 관계자는 “통화 내역은 김 전 청장에게 영향을 미친 세력이 있다는 ‘심증’을 보여주기 위한 자료에 불과하다. 국정원 관계자 등을 조사했으나 확실한 증거를 밝혀내지 못했다. 더구나 정치인이 수사에 관여한 구체적인 정황이나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의 실명을 공개하는 것은 인권침해 소지가 있고, 불필요한 정치적 공방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을 김 전 청장의 단독 범행으로 보는 시각은 박근혜정부 출범 후 사건이 터질 때마다 거론되고 있는 ‘개인적 일탈’과 일맥상통한다. 한 예로, 남재준 국정원장은 지난해 국회 정보위원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자리에서 국정원 심리전단의 대선 개입 댓글 활동을 “개인적 일탈”이라고 주장했다.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통화 내역에 나온) 정치인의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것은 (검찰이) 적절한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본다. 배후 세력에 대한 수사가 전혀 진전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실명을 거론할 경우 재판 자체가 산으로 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부분은 검찰이 배후 세력 규명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은 김 전 청장의 유죄를 입증하는 것보다 김 전 청장을 조종한 ‘윗선’을 찾는 것이 핵심이다. 만약 검찰이 2심에서도 배후 세력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정치검찰’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2월8일 청계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참가자들은 김 전 청장 무죄 판결을 규탄하고 특검을 촉구했다. ⓒ 연합뉴스
‘백송설렁탕 회동’ 인물들도 안 밝혀져

실제로 사건 당시 국회 정보위원장인 서상기 새누리당 의원과 차문희 국정원 2차장, 권영세 대선 캠프 종합상황실장과 박원동 국정원 국익정보국장 등이 빈번하게 통화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또한 김 전 청장의 당시 행적에도 의혹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른바 ‘백송설렁탕 회동’이 한 예다.

김 전 청장은 중간 수사 결과 발표 하루 전인 2012년 12월15일, 청와대 인근 백송설렁탕에서 의문의 인물 6명과 점심을 함께했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경찰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을 해소해주는 것으로 방향을 정한 시점이 바로 이날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민주당에서는 “이 회동을 통해 경찰의 중간 수사 발표 공작 시도가 최종적으로 ‘결재’됐다”고 주장한다. 이 회동에 참석했던 인물들은 아직까지 베일에 싸여 있다. 김 전 청장은 청문회에 출석해 이 의문의 동석자들에 대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정치인은 아니다”라며 입을 다물었다. 검찰 수사에서도 이 회동에 대해 밝혀진 것은 없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비롯한 김 전 청장의 경찰 수사 은폐·축소 의혹 사건은 수사팀장이 교체되는 등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윤석열 전 팀장(현 대구고검 검사)의 후임으로 온 이정희 팀장은 국정원 댓글 121만개를 추가 발견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김 전 청장 수사에서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김 전 청장을 사주한 배후 세력은 현 정부와 관계됐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은 이명박 정부와 관련된 일이지만, 김 전 청장 사건은 현 정부를 겨냥해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나 윤석열 전 팀장 등 현 정부와 각을 세우다 내쳐진 인물이 허다한 마당에, 배후 세력을 밝히는 수사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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