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염한 공주님에 홀리다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4.02.18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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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최대 '애니' 흥행 기록 세워...디즈니 영화의 귀환

디즈니 신작 애니메이션 <겨울왕국> 열풍이 뜨겁다. 처음엔 별 기대 없이 올렸지만 개봉 후 폭주를 거듭하고 있다. 기대가 없었던 이유는 최근 한국 영화가 초전성기인 데 반해 할리우드 영화는 힘을 못 쓰고 있고, 애니메이션이라는 부문 자체가 극영화처럼 초대형 극장 흥행이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디즈니는 최근에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런데 개봉하자마자 관객이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개봉 4일 만에 100만, 11일 만에 300만, 17일 만에 500만, 27일 만에 800만 관객을 돌파하기에 이르렀다. 놀라운 것은 개봉 후 한 달 가까이 지난 2월 첫 주 차 주말에도 이틀간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점이다. 이는 보기 드문 뒷심이다. 이대로라면 900만 돌파는 물론 1000만 돌파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건 기적이다.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 제공
1000만까지 가지 않아도 <겨울왕국>은 이미 국내에서 애니메이션 흥행의 새 역사를 쓰고 있다. 기존 애니메이션 영화 흥행 최고 기록은 <쿵푸팬더2>의 506만이다. 그런데 <겨울왕국>은 800만 돌파, 차원이 다른 흥행이다. 앞으로 <겨울왕국>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새 역사인 셈이다. 물론 <아바타>가 이미 1000만을 넘어서긴 했지만, <아바타>는 극영화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전형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되진 않는다. <겨울왕국>이 애니메이션으로선 초유의 흥행으로 겨울 한국을 자신들의 ‘왕국’으로 만들고 있다.

정통 디즈니 동화 세계 구현

<겨울왕국>은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1990년대식 정통 디즈니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다. 공주와 왕자가 나와 노래를 부르고, ‘사랑 타령’을 하며 키스를 하려 한다. 내용도 안데르센 원작의 동화여서 그야말로 정통 디즈니 동화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아주 오랜만이기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지며 시장에 충격을 줬다.

애니메이션 흥행 기록은 최근 개봉작들에 집중돼 있는데, 1위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쿵푸팬더2>의 506만, 2위 <쿵푸팬더> 467만, 3위 <슈렉2> 330만, 4위 <하울의 움직이는 성> 301만, 5위 <슈렉3> 284만, 6위 <드래곤 길들이기> 256만, 7위 <슈렉> 234만, 8위 <슈렉 포에버> 223만, 9위 <마당을 나온 암탉> 220만, 10위 <장화 신은 고양이> 208만 등이다.

이 중 디즈니 작품은 단 한 편도 없고, <슈렉> 시리즈와 <쿵푸팬더> 시리즈를 만든 드림웍스가 21세기 애니메이션 흥행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은 전통적인 디즈니 동화 세계와 거리가 있다. 특히 드림웍스의 대표작인 <슈렉> 시리즈는 디즈니적인 동화 세계를 비웃는 내용으로 전 세계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디즈니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디즈니 동화는 시대착오적이고 한물간 구닥다리로 치부됐다. 그런 점에서 2000년대는 디즈니의 방황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랬던 디즈니가 <겨울왕국>으로 화려하게 귀환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 동화의 힘이고, 전통의 힘이야!’라는 디즈니의 포효가 들리는 듯하다. 극장에선 <겨울왕국> 본편이 시작되기 전에 흑백에서 컬러 3D로 이어지는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자신들의 전통을 세계만방에 과시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나타난 정통 디즈니 스타일에 1990년대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극영화에 열광했던 30대 여성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일종의 1990년대 복고인 셈이다.

최근 2년 여 동안 부모와 아이가 모두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만큼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이 없었다. 그래서 애니메이션 흥행이 대체로 부진했는데, 그동안 쌓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갈망이 <겨울왕국>에서 터진 측면도 있다.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재미있는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이다.

엘사는 과연 새로운 공주상인가

공들인 그래픽은 찬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음악은 최고 수준의 뮤지컬 공연에 필적한다. 40대 아버지들의 평점이 이례적으로 높다. 이는 그동안 아이 손에 붙들려 극장에 끌려가 졸아야 했던 아버지들의 울분이 모처럼 재미있는 <겨울왕국>에 대한 열광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전통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완전히 전통을 답습하진 않은 것이 <겨울왕국>의 전략이다. 전통적인 디즈니 동화 세계에서 여주인공 공주님은 마지막에 왕자님과의 영원한 사랑을 담은 키스를 통해 행복해진다. 그런데 이번엔 왕자님과의 키스가 아닌 자매애가 행복의 열쇠가 됐다. 이로써 디즈니 동화 세계의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디즈니 공주상의 변화는 1990년대에도 있었다. 그 때문에 <겨울왕국> 여주인공인 엘사가 과연 새로운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디즈니 공주상 1기는 <백설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신데렐라>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시기인데 이때 여주인공은 딱히 하는 일이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 이에 대해 수십여 년간 비난이 쏟아졌는데 1990년대 <미녀와 야수> 등에서 여주인공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기 삶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뮬란>에 이르러선 왕자 없이 나라를 지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동화의 주류인 백인 공주님은 여전히 마지막에 왕자님과 키스했다.

<겨울왕국>에선 문제를 만드는 것도, 해결하는 것도 온전히 공주님들의 몫이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키스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겨울왕국>에 나타난 또 다른 변화는 여주인공 엘사가 요염하다는 점이다. 디즈니 동화 세계에서 여주인공은 언제나 순수했고 요염한 건 악녀 몫이었다. 여주인공의 요염함은 디즈니가 마침내 여성을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엘사가 요염하게 각성할 때 부르는 노래가 바로 주제가 <렛잇고>다. 자신에게 착한 여성이 되어주길 바라는 사회의 요구에 맞서, ‘난 나대로 살 테야!’를 외치는 여주인공에게 여성들이 열광했다.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각성에 어울리는 드라마틱한 노래이고, 영상도 황홀할 정도로 화려해서 <렛잇고> 신드롬이 나타난다. 팝송으로선 최초로 국내 음원 사이트도 ‘올킬’했고 여가수들이 앞다퉈 <렛잇고>를 부르고 있다. 전통적 경쟁력을 가진 디즈니가 이렇게 혁신까지 하게 됐으니, 디즈니의 아성은 당분간 깨질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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