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 ‘유가강’, 간첩 ‘유우성’ 되다
  • 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02.2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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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정보 유출 혐의로 기소…천당과 지옥 넘나든 비운의 삶

북한에서 화교 ‘유가강’으로 태어났다. 일부 지인들은 그를 ‘유광일’이라 부르기도 했다. 북한식 이름이었다. 10년 전 남한에 넘어왔을 때, 그는 자신을 ‘유가강’이라 소개하지 않았다. 재북 화교가 아닌 탈북자로 받아들여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광일’로 살았다. 곧 세 번째 이름을 얻었다. ‘유우성’. 남한에서의 새로운 삶을 위한 개명(改名)이었다.

이름은 곧 정체성을 대변한다. 그의 이름은 세 개나 된다. 스스로 겪은 삶의 굴곡이 남긴 흔적이다. ‘유가강’은 중국인 화교였다. ‘유광일’은 북한 이탈 주민이었다. ‘유우성’은 한때 서울시 공무원이었다. 지난해 1월 그 이름 위에 ‘간첩’이라는 주홍글씨가 찍힌다. 그가 탈북자 정보를 유출해 대한민국의 안보를 중대하게 위협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됐기 때문이다.

‘유가강’에서 ‘유광일’, 다시 ‘유광일’에서 ‘유우성’까지. 공안 당국이 간첩으로 지목한 재북 화교 출신의 한 사내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월16일 민변 기자회견에 참석한 피고인 유우성씨. 그의 얼굴에 ‘출입경’을 뜻하는 중국어가 투영돼 있다.
검찰, 어머니 장례 계기로 ‘공작원’ 포섭 주장

유우성씨는 1980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화교로 이미 4대 전에 북한에 정착한 집안에서 자랐다. 2001년 함경북도 경성에 있는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학업을 마친 후 회령에서 준의사(의사 보조역)로 근무했다.

노임과 배급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북한 사회의 경제난 때문이다. 살길이 막막했다. 호구지책을 찾아야 했다. 유씨는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밀수꾼을 통해 북한 물자를 거래하는 밀무역에 나섰다. 남한 거주 탈북자들과 북한 거주 가족 간에 통화 및 송금을 주선하는 일까지 했다. 의사와 장사꾼 사이에서 사명감이 흔들렸다. 북한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남한을 동경했다.

결국 2004년 3월 북한을 떠났다. 중국 여권으로 중국·라오스·태국을 거쳐 남한에 들어왔다. 유씨는 자신이 중국 국적을 지닌 화교라는 사실을 숨겼다. 자신을 북한 이탈 주민 ‘유광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 대상자가 됐다. 한국 국적을 얻었고, 북한 이탈 주민을 대상으로 한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하나원 등에서 각종 교육을 마쳤다. 2004년 3월 대전에 처음 정착했다. 복권방 종업원, 건설 노동자, 보따리상 등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2007년 서울 소재의 한 대학 3학년에 편입했다. 대학 생활 동안 학내·외 탈북자 관련 동아리·단체 등에서 활동했다. 2010년에는 이름을 유우성으로 바꿨다. 2011년 대학 졸업 후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계약직 공무원으로 채용됐다. 그렇게 ‘북한 이탈 주민 유광일’은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으로서의 새 삶에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듯했다.

하지만 2013년 1월 유우성씨는 전격 구속된다. 체포 영장을 발부받은 국가정보원(국정원)에 의해서다. 유씨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포섭돼 탈북자 명단 등의 정보를 북한에 넘겼다는 것이 주요 혐의였다. 이어 검찰은 유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북한 이탈 주민의 보호 및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 위반, 여권법 위반 등 8개 죄목으로 기소했다. ‘탈북자 출신 공무원’이던 유씨가 하루아침에 ‘간첩’이 돼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국정원과 검찰은 왜 유씨가 간첩이라고 판단했을까.

시간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씨가 북한에 들어갔던 때다. 심장마비로 사망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였다. 중국 옌지(延吉)의 브로커를 통해 북한 통행증을 발급받아 북한 회령에 다녀왔다. 여기까지는 유우성씨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어머니 장례를 위해 입북했던 것은 2009년 국정원에서 이미 조사를 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런데 공안 당국은 장례 이후 유씨의 행적에 대해 새로운 혐의를 꺼내들었다. 북에 있는 가족이 걱정된 유씨가 다시 입북했다가 회령 보위부에 체포됐고, 이때 보위부 공작원으로 포섭됐다는 것이다. 약 7일 동안 한국 정착 상황 등에 대한 조사를 받고 석방된 후, 3일에 걸친 대남 사업 교육 및 정신 교육 후 공작 임무를 부여받았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북한을 드나드는 한편, 여동생을 통해 탈북자 관련 정보를 유출해왔다는 것이다.

1심에서 깨진 ‘여동생 증언’ 증거능력

유씨는 이를 전면 부인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른 후에는 중국 옌지·창춘·베이징 등에서 친지를 방문하고 여자친구를 만나는 등 시간을 보내다 남한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북한에 정보를 유출한 적도 없고, 어머니 장례 이후에는 북한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맞섰다. 국정원은 유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확보한 증거 때문이다. 바로 유씨 여동생의 증언이었다.

유우성씨의 여동생 유가려씨는 2012년 10월 입국했다. 오빠가 했던 것처럼, 그도 자신의 화교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려 했다. ‘탈북자’로 보호 신청을 했다. 국정원은 유가려씨를 중앙합동신문센터(이하 센터)에 수용했다. 조사가 시작됐다. 이때 여동생 유씨는, 오빠 유우성씨가 북한 보위부에 포섭된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매우 구체적인 정황과 함께 진술한다. 검찰 기소의 핵심 증거였다.

그런데 여동생 유씨는 2013년 4월 피고 측 공동변호인단의 인신구제청구를 통해 센터에서 나오게 된 후 자신의 증언을 뒤집었다. 국정원의 강압과 회유에 의해 거짓 증언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 진행된 1심 공판에서는 혐의의 직접 증거인 여동생 유가려씨 진술의 신빙성 여부가 관건이 됐다. 피고인 유우성씨의 공소 내용이 대부분 유가려씨의 진술을 근거로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검찰은 오빠 유씨가 중국 옌지에 있는 유가려씨에게 인터넷 메신저로 탈북자의 신원 정보가 담긴 파일을 전송하고, 유가려씨가 두만강을 도강해 이것을 북한 보위부에 전달했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유가려씨의 진술 내용을 두고 상식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동생으로서 친오빠의 간첩 혐의를 증언하는 진술을 할 동기가 뚜렷이 없기 때문이다. 피고인 유우성씨의 공동변호인단은 유가려씨가 센터의 국정원 파견 직원으로부터 강압 및 회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센터에서 나온 뒤 유가려씨가 “(조사 과정에서) 센터 측 직원(국정원 파견)으로부터 폭행·협박 및 가혹 행위를 당했고, 자백하면 오빠와 함께 남한에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는 회유를 받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공동변호인단 소속 김용민 변호사는 “센터에서 나온 직후와 법정에서의 증언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전자의 경우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자신감이 없었던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나름 자신의 주장을 펴는 등 달랐다”고 주장했다. 센터에 있을 때 외부의 압력에 의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거짓된 내용을 증언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8월 1심 선고가 내려졌다. 재판부는 유가려씨의 센터 및 국정원에서의 진술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내용이 구체적이었음에도 사진 등 객관적 증거에 의해 모순되는 진술이 상당수 드러났기 때문이다. 예컨대 2012년 설 전후에 대해 유가려씨가 증언한 유우성씨의 행적과, 사진에 남아 있는 유우성씨의 행적이 일치하지 않는 식이다.

재판부는 유가려씨가 대체로 일관된 진술을 하다가 법정에서 이를 전면 번복한 점을 참고하되, 객관적 증거와 유씨 진술이 상당 부분 어긋나는 점들을 참작했다. 이로써 유우성씨의 국가보안법 관련 혐의를 기소한 핵심 증거였던 유가려씨의 증거능력이 깨졌다. 1심 선고에서 유우성씨는 북한 이탈 주민 및 여권 관련법 등에만 유죄를 받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받았다. 그를 간첩으로 옭아맸던 국가보안법 관련 혐의는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다만 센터 조사 과정에서 국정원 파견 직원의 폭행·욕설 등 가혹 행위가 있었다는 피고 측의 주장은 판결 과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판 과정에서 반말 수사 사실, 처벌 조항이 없는 ‘진술 번복죄’를 빌미로 협박한 사실, 달력을 제공하지 않고 독방에 수용한 사실 등은 국정원 직원 신문 과정에서 확인됐다.

유우성씨의 변호를 맡고 있는 민변이 2월17일 서울지검 앞에서 검찰의 증거 조작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중앙합동신문센터는 국정원의 안방?

1심 판결 후 검찰은 항소했다. 현재 2심 공판이 진행 중이다. 검사 측은 1심 공판 당시 핵심 증거였던 ‘여동생 증언’ 대신 새로운 증거를 제시한다. 유우성씨의 중국-북한 출입경 기록이다. 검사 측이 제시한 문건과 변호인 측이 제시한 문건이 서로 달라 위조 논란이 일었다. 그런데 중국 외교 당국에서 검찰 측의 문건이 위조된 것이라고 확인하면서, 2심 공판의 핵심 증거가 지닌 신빙성이 크게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1심 선고에서 핵심 증거였던 ‘여동생 증언’의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았다. 2심 공판이 진행 중인 현재, 검찰 측이 핵심 증거로 내세운 출입경 기록이 위조됐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물론 이번 사건의 결론은 향후 2심 선고, 나아가 대법원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도출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건 자체에 대해 무리한 공안 몰이 기소가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매섭다. 사건 초기 수사를 담당했던 국정원, 기소를 이끌어낸 검찰이 제대로 된 증거를 확보하지 않은 채 ‘간첩 만들기’에 나섰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번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의혹의 핵심에 국정원이 있다. 중앙합동신문센터에 파견된 직원들은 국정원장으로부터 사법경찰관리 임무를 부여받는다. 유가려씨는 센터 직원에게 조사를 받은 후 곧바로 국정원 수사관들에게도 조사를 받았다. 관련 진술 자료는 곧 검찰의 핵심 공소 요지로 활용됐다.

이에 대해 피고 측 변호인단은 “센터의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어 통제받지 않은 권력 행사가 이뤄질 수 있다. 법에 의해 최장 6개월간 수용할 수 있다. 간첩을 발견해낼 가능성도 있지만, 고의적으로 간첩을 만들어내기에도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국정원의 영향 아래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구조에서는 조사 대상자의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여동생 유가려씨로부터 확보한 센터 내 진술은 1심 재판에서 대부분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유씨의 진술대로라면 그가 오빠 유우성씨의 공범인 셈인데, 피고인이 아닌 참고인으로 조사했기 때문이다. 현행법 및 판례에 비춰보면, 이런 경우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유가려씨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고수했을까. 피고 측은 “변호인 접견교통권과 진술거부권 등을 차단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폐쇄된 공간에서 강압과 회유를 섞은 방법으로 확보한 진술의 증거능력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검사 및 국정원 측은 “여동생이 간첩 수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처벌하지 않으려 했다”고 맞선다.

‘간첩’ 꼬리표, 역사는 어떤 평가 내릴까

국정원이 센터 내에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책임 없는 수사권을 남용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사권 행사 때는 철저한 통제와 적법 절차가 준수되어야 하는데 국정원 직원들은 정작 수사를 하면서도 이중적인 지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신분이나 직무는 알리지 않는 모순되는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판 과정에서 인권침해로 간주할 수 있는 상당수 행동이 유가려씨를 향해 자행됐음이 확인됐다. 약 6개월 동안 센터의 독방에 수용된 채 조사를 받아온 유가려씨가 극도의 심리적 스트레스에 시달린 배경에 국정원의 직권 남용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유가강은 탈북자 유광일로 살고자 했다. 남한에서의 새 삶은 유우성이라는 이름으로 개척하고자 했다. ‘북한 사회에 염증을 느껴 남한에 왔다’는 그를 간첩으로 규정하려면, 그에 합당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아직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1심과 2심 공판을 거치며, 각각의 핵심 증거는 증거능력을 의심받았다. 국정원과 검찰의 증거 수집 과정에 대해 대대적으로 의혹이 불거지기까지 한 상황이다. 당사자는 억울함을 호소한다. 재북 화교 출신의 한 탈북자에게 붙였던 ‘간첩’ 꼬리표에 대해, 훗날 역사는 어떤 평가를 내릴까. 향후 진행될 재판 결과가 주목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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