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 부는 곳에 잡음 또한 들린다
  • 안성모·조해수·김지영 기자 ()
  • 승인 2014.02.2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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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대통령 시대를 맞아 여성 리더들이 주목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여성 인재 양성에 관심을 보였다. 이에 따라 박근혜정부는 출범 후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상당히 신경 쓰는 분위기였다. 여성 대통령이 취임한 지도 1년이 지났다. 그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시사저널이 정·재계 여성 고위직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새로운 여성 시대의 대한민국을 만들겠다.” 18대 대선 정국이 무르익어갈 무렵인 2012년 11월13일,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가 여의도 당사를 직접 찾았다. 여성 정책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여성 행복’을 목표로 3대 플랜과 6대 실천 과제가 제시됐는데, 이날 가장 주목받은 정책은 실천 과제 중 하나인 ‘미래 여성 인재 10만 양성 프로젝트’였다.

ⓒ 일러스트 임성구
임진왜란 전 율곡 이이가 주장한 ‘10만 양병설’을 연상시키는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실현하겠다는 것일까. 박 후보는 “여성 장관과 정부위원회의 여성 위원 비율을 대폭 확대하고 정부의 각종 요직에 여성을 중용하겠다”고 밝혔다. 또 “공공기관에 여성 관리자 목표제를 도입해 평가 지표에 반영하고 여성 관리자 비율이 높은 민간 기업에는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여성 관리자의 비율을 높이겠다”고 약속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에도 여성 인재 양성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여성가족부는 정부 출범 직후 가진 2013년 업무보고에서 관계 부처 및 민간과 협력해 사회 각 분야에서 준비된 여성 리더 양성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구체적으로 4급 이상 관리직 여성 공무원 비율을 2012년 9.3%에서 2017년 15%까지 확대하고, 공공기관의 경우 목표제를 도입해 결과를 경영 평가에 반영하기로 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월4일 ‘2014 여성계 신년 인사회’에서 참석자들과 건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재계 휩쓰는 우먼파워…윤진숙 낙마로 ‘삐걱’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과연 박 대통령의 약속대로 여성이 당당하게 각자의 꿈을 펼치고 자아를 실현하는 ‘여성 시대’의 문이 열렸을까. 평가는 엇갈린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고위직에 오르기 어렵다는 관가에서 ‘여풍(女風)’이 불기 시작했다. 고위 공무원단에 속한 여성의 수가 증가하는 추세다. 행정고시(행시) 출신 여성 공무원 두 명이 처음으로 차관에 올랐다. 검찰과 경찰에서는 여성 검사장과 여성 치안정감이 탄생했다. 검찰 창설 65년, 경찰 창설 68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경제계에도 ‘여풍’이 불어닥쳤다. 여성 최초의 은행장이 탄생하는가 하면, 대기업 임원으로도 여성이 각광받고 있다. 또 자산 총계가 21조5000억원이 넘는 공기업 수장으로 여성이 발탁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견고하게 자리 잡았던 남성 중심의 인사 관행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그동안 한국은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가로막는 이른바 ‘유리 천장’이 가장 견고한 나라 중 한 곳으로 꼽혀왔다. 여기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고위직 여성의 수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아직 임기가 많이 남은 만큼 섣불리 예단하기 이르다는 주장이 나오는 반면, 임기와 상관없이 박 대통령의 약속 이행 의지를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첫 내각을 구성할 때부터 실망감을 안겨줬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신임 장관 17명 중에서 여성은 2명뿐이었다. 그것도 여성 몫으로 여겨온 여성가족부장관과 5년 만에 부활한 해양수산부장관이었다.

이마저도 1년을 채 못 넘겼다.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장관이 여수 앞바다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해 부적절한 발언 논란 끝에 취임 10개월 만에 낙마하면서, 현재 장관 중에서 여성은 조윤선 여성가족부장관 한 명만 남게 됐다. 비율로 따지면 5.9%에 불과하다.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4.9%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대다수 서유럽 국가의 여성 장관 비율은 30%가 훨씬 넘는다. 출범 초기 노무현 정부(21.1%)는 물론 이명박 정부(13.3%)와 비교해도 낮은 수치다.

윤진숙 전 해양수산부장관이 퇴임식에서 코와 입을 막고 기침하고 있다. ⓒ 연합뉴스
“승진 기준 1순위가 여성” 불만도

여성계에서는 윤 전 장관의 낙마가 여성 리더의 역량 부족으로 인식될까 우려한다. 그럴 경우 향후 여성 인재 등용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윤 전 장관 후임 자리를 다시 여성이 차지하지는 못하게 됐다. 박 대통령은 신임 해양수산부장관으로 4선 중진인 이주영 새누리당 의원을 내정했다. 윤 전 장관의 경우 박 대통령의 인사 실패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수첩 인사’의 부작용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그런 만큼 좀 더 다양한 여성 리더들과 교류를 가져 인재 풀을 넓힐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박 대통령이 ‘여성 인재’를 강조하면서 무리한 인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불만도 터져 나온다. “승진 기준 1순위가 ‘여성’이 돼버렸다”는 말은 공직 사회에 아직도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가 남아 있기 때문에 나오는 푸념일 수 있다. 하지만 능력에서 문제가 될 여지가 있다면 개선이 필요하다. 한 경찰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직접 경찰에 4대악(주폭, 가정 폭력, 학교 폭력, 불량식품) 척결을 주문했다. 4대악을 척결하는 데는 여성 간부가 제격일 수도 있다. 그런데 경찰이 4대악 척결만 할 수는 없지 않나. 강도·살인 등 강력 범죄를 막는 것도 경찰의 역할이다”라고 지적했다.

한 여성 고위 인사의 경우 업무와 그다지 큰 관계가 없는데도 청와대의 정책을 지지한다며 보도자료까지 만들어 배포해 내부에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현 정부에서 승진한 다른 여성 인사는 여당 의원과 여러 차례 만나 승진을 읍소하는 편지까지 전달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에 대해 한 사정 당국 관계자는 “여성이 대거 간부에 오르자 남성 중심의 기존 조직에서 반발심이 표출되고 있는 것뿐이다. 승진한 여성 간부 중에는 조직의 밑바닥부터 출발한 이가 많다. 오히려 여성 대통령 시대에 이들의 경력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헌정 사상 처음인 여성 대통령 시대에 맞춰 보여 주기 식 인사가 단행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여성 최초’ ‘여성 1호’ 등 타이틀을 유난히 강조하는 데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동안 견고하게 막아섰던 ‘유리 천장’을 깨고 여성의 역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분명 큰 의미가 있지만, 그러한 타이틀을 달아주기 위한 인사가 이뤄지는 것은 주객전도라는 지적이다.

보여 주기 식 인사는 민간 영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한 금융사 대표는 “여성이 대통령이다 보니 간부도 여성이 대세다. 일부러 괜찮은 여직원을 추천하라고 해서 이번에 처음으로 지점장을 맡겼다. 앞으로 이런 인사 경향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털어놓았다. 한 시중 은행의 고위 관계자도 “내부적으로 이번 인사에서 여성 간부 3명 중에서 임원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고 전했다.

“역량 키워나갈 환경부터 마련해야”

특정 여성단체의 영향력이 인사에 반영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고위 공무원 인사를 앞두고 한 여성단체에서 특정 여성을 고위직에 올리기 위해 로비를 펼쳤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박근혜정부 들어 승진한 금융권 인사 중 상당수는 한 여성 금융 단체의 회원이었다. 이 단체의 한 회원은 “비주류로 있다가 최근에 회원들이 고위 간부직에 많이 등용되면서 대세가 됐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해 이 단체의 행사에 축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월11일 가진 업무보고에서 ‘여성 대표성 제고 및 인재 양성’ 계획을 밝혔다. ‘4급 이상 여성 관리자 임용 목표 15% 달성’ ‘공공기관의 여성 관리자 목표제 수립’ 등 1년 전에 내놓은 계획이 다시 보고서에 올랐다.

전문가들은 여성 인재를 얼마나 많이 등용시키느냐도 중요하지만 이에 앞서 여성이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데 좀 더 나은 환경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특정 분야의 일만 맡기는 관행이 바뀌지 않으면 ‘유리 천장’을 깨고 위로 올라서더라도 꿈을 펼치고 자아를 실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새로운 ‘여성 시대’를 맞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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