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파벌 싸움이 지어준 그 이름 ‘빅토르 안’
  • 조유빈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4.02.2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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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수 부자와 빙상연맹의 8년 전쟁

안현수가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쇼트트랙 개인 1000m 금메달, 1500m 동메달을 획득해 러시아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토리노올림픽 이후 8년 만이다. 차가운 얼음 바닥에 입을 맞춘 그는 이내 러시아의 삼색기를 흔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러시아 쇼트트랙 역사상 첫 번째 금메달이었다. 뒤이어 ‘안현수 현상’이 일어났다. 국적을 바꾸면서까지 자신의 꿈을 성취한 것에 대한 응원과 열광, 그를 내친 빙상연맹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다. 특히 아버지 안기원씨가 아들의 귀화 원인으로 지목한 전명규 대한빙상경기연맹 부회장(한국체대 교수)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빙상연맹의 파벌 싸움과 비리가 과장됐다”거나 “안현수가 개인의 삶을 위해 선택한 것뿐”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빙상연맹 관계자들과 쇼트트랙 대표팀 선수들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안현수 현상을 일으킨 핵심적 키워드가 국민의 공통적 공분을 사는 ‘불공정’ ‘불합리’ ‘부조리’였기 때문이다. 쇼트트랙의 일인자로 꼽히던 대한민국의 안현수가 왜 러시아의 ‘빅토르 안’이 됐을까.

2월5일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딴 안현수가 러시아의 삼색기를 들고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안현수의 귀화가 이슈로 떠오른 것은 2011년이다. 안현수는 “일단 러시아 무대를 경험한다는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새로운 무대에서 쇼트트랙 스케이팅을 계속하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 당시부터 안현수는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게 훨씬 중요하다. 내 가슴에 어느 나라 국기가 달리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규정에 따라 다른 나라의 대표로 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지에서 1년간 거주한 후 체류 국가 빙상연맹의 동의를 받아 국적을 신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에서 1년간 거주한 후 양국 빙상연맹의 합의에 의해 체류 국가가 국적 획득 여부에 상관없이 국가대표 자격을 주는 것이다. 안현수는 전자를 택했다. 이중국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좋아하는 운동을 더 나은 환경에서 마음 편히 집중해서 하고 싶다”며 빅토르 안이 됐다.

그의 선택을 응원하고 이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귀화 이야기가 안현수가 아닌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비판의 목소리도 높았다. ‘돈 보고 러시아로 갔다’ ‘귀화는 절대 아니라더니 귀화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조국을 배신했다’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그가 다시 왕좌에 오른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 ‘안현수 돌풍’에 휩싸였다.

곪고 곪은 쇼트트랙 내부 파벌 싸움

그가 ‘한국 선수’로서 이룩한 올림픽 3관왕과 세계선수권대회 5연패의 영광. 그 이면에는 곪고 곪은 쇼트트랙 내부의 파벌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2002년 안현수는 쇼트트랙계의 유망한 새싹이었다. 일찌감치 김기훈과 함께 ‘전명규의 수제자 라인’에 속해 있었다. 전명규 부회장이 대표팀 감독을 맡던 시절 김기훈 선수는 금메달을 휩쓸었다. 그 때문에 안현수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쇼트트랙 특성상 단순히 속도와 기술만으로 실력을 평가할 수 없기에 “누구 라인을 타야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당시 안현수는 164cm의 왜소한 체격임에도 단번에 한국 빙상계의 기대주로 떠오르며 김동성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됐다. 한국 쇼트트랙이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금·은메달을 2개씩 따는 데 그치는 최악의 성적을 거뒀지만 전명규 부회장은 안현수라는 재목을 발견했다는 것에 흥분했다. 모두들 안현수가 5000m 계주 정도나 나설 것으로 예상했지만 전 부회장은 1000m 경기에 출전하는 두 명의 선수 중 하나로 안현수를 택했다. 정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안현수는 인상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그리고 곧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 이후 세계 남자 쇼트트랙에서 안현수는 최고가 됐다.

2003년 안현수가 한국체육대학교에 수시전형으로 입학하면서 안현수는 확실한 ‘한체대’ ‘전명규’ 라인으로 분류됐다. 교수직 보장 등 다른 대학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음에도 은사인 전명규 부회장이 교수로 있는 한체대를 선택했다.

당시 안현수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나를 키워준 전 감독님께 지도받게 돼 편하다”며 “열심히 훈련해 2006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 3개 이상을 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안현수는 2003년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 3관왕을 비롯해 2003년 폴란드 세계쇼트트랙선수권대회 4관왕 등 출전하는 대회마다 금메달을 3~4개씩 따냈다. 세계선수권에서는 2003년부터 3년 연속 정상에 올라 토리노의 금맥을 일찌감치 예고했다.

이번 안현수의 금메달 획득으로 문제가 다시금 수면에 떠올랐지만 ‘파벌’이라는 쇼트트랙의 이면이 부각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5년 유니버시아드대회 때는 금메달을 양보해달라는 선배의 요구에 불응한 안현수가 구타를 당한 적도 있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을 앞두고는 한체대와 비(非)한체대 파벌의 갈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당시 한체대 학생인 안현수는 한체대 출신의 박세우 코치가 있는 여자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호석·서호진 등 ‘비한체대파’ 선수들과는 대화도 없었고, 식사도 혼자 해야 했다. 반면 여자 대표팀의 비한체대파 진선유와 변천사 선수는 비한체대파 송재근 코치가 있는 남자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코치에 따라 파벌이 나뉜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국제 대회에서도 두 집단 간의 갈등은 정점을 찍었다. 안현수가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 한국 팀 내에서는 희비가 엇갈렸다. 심지어 다른 파벌의 선수 레이스를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린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국제 대회에서의 경쟁 상대가 ‘국내의 다른 파벌 선수’였던 셈이다.

‘한체대-비한체대’ 간의 파벌 다툼으로 고심하던 빙상연맹은 ‘개인 코치제’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 당시 안현수의 개인 코치가 지금의 전명규 부회장이다. 토리노올림픽 3관왕을 차지한 안현수는 1년 뒤 중국 창춘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도 1000m, 1500m에서 금·은메달을 따며 최고의 실력을 보여줬다. 빙상계의 갈등은 시끄러웠지만 항상 좋은 결과로 무마됐다. 금메달만 따면 해결됐다. 한국 빙상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개선하라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이러한 싸움이 지속적으로 일어남에도 대한민국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었다.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쇼트트랙 선수가 된 안현수는 한체대 졸업을 앞두고 쇼트트랙 인생의 갈림길에 섰다. 전 부회장은 당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졸업을 앞둔 안현수의 진로 문제를 고민 중”이라며 “운동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되느냐가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안현수 선수의 모든 부분에 전 부회장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전 부회장은 유학은 선수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으며, 기존 실업팀에 들어가는 것도 무리라고 설명했다. 그는 “일단 대학원에 입학해 학교에서 운동할 여건을 마련하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최적의 진로를 모색할 것”이라고 밝혔다.

실업팀 선택한 것이 불화의 원인

그러나 안현수는 성남시청을 선택했다. 전 부회장이 제안한 ‘대학원 진학’이 아닌 ‘실업팀’으로 갔다는 이유로 안현수는 이후 빙상연맹의 눈총을 받게 된다. 그의 아버지 안기원씨에 따르면 “당시 전 부회장이 실업팀을 창단하고 스카우트한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졸업을 하고도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기다리던 중 성남시청이 좋은 조건으로 꾸준히 스카우트 제안을 했고, 입단하고 나니 전 부회장이 자신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불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후 성남시청이 재정 적자를 이유로 운동부를 해체하면서 갈 곳이 없어진 안현수는 백수 신세가 되지만 국내 빙상계에 미운 털이 박힌 안현수를 부르는 팀은 없었다. 팀 해체가 결정적인 귀화 동기는 아니었으나 안현수는 ‘선수’로서 살기 위해,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러시아행을 택한다. 러시아는 토리노올림픽 3관왕 안현수에게 ‘특례 조항’을 적용해줬다. 최고 선수에 걸맞은 예우로 선발전 없이 국가대표로 발탁하겠다는 뜻을 전해오기도 했다.

안기원씨는 ‘파벌’보다 중요한 문제를 ‘전횡’이라고 지적했다. 2010년 3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안기원씨는 “이정수 선수가 2010년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개인전에 불참한다고 한 자필 사유서는 강압에 의한 조작”이라고 말했다. 또 “파벌 문제는 유태욱(당시 용인시청 감독)·전명규 두 사람이 동시에 연맹의 부회장으로 선임되면서 끝났다. 지금은 이 두 명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코치도 마음대로 선임한다”고 주장했다.

쇼트트랙 승부 조작과 외압 논란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구성된 공동조사위원회는 빙상계의 담합 행위를 공식 인정하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쇼트트랙의 나눠 먹기 관행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다만 빙상연맹 고위층의 외압 여부에 관한 증거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놓아 논란이 됐다.

토리노올림픽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딴 것과 비교하면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의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당시 한국 선수들은 금메달 2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땄다. 특히 여자는 쇼트트랙 출전 사상 처음으로 노 골드에 그쳤다. 밴쿠버올림픽 부진을 계기로 다시 쇼트트랙계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질적인 파벌 다툼 때문에 우수한 선수가 국제 대회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다수 종목은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여러 차례 치르고 마지막 선발전의 배점을 가장 높게 매겨 평가한다. 쇼트트랙 역시 과거 올림픽 선발전을 두 차례 치렀다. 그러나 당시 대한빙상연맹은 올림픽을 10개월 앞둔 4월, 단 한 차례의 선발전만으로 출전 선수를 확정지었다. 안현수 선수가 부상에서 미처 회복되기 전이었다. 선발된 대표 선수들은 모두 비한체대 출신이거나 재학생이었다.

파벌 논란은 과연 전명규 부회장이 몰고 온 문제일까. 이전부터 전 부회장이 꾸준히 파벌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됐지만, 그는 억울하다는 입장을 표명해왔다. 전 부회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억울하다”며 “20년 동안 빙상계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다 좋은 선수가 나오니 과거에 독과점을 누리지 못한 쪽에서 시기한 것”이라며 억울해했다.

전 부회장은 일찍부터 ‘한국 쇼트트랙의 대부’로 통했다. 1987년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을 맡아 기초를 닦고, 한국 팀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모교인 한체대로 자리를 옮겨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금메달을 제조했다. 이강석·여상엽을 비롯해 이상화·모태범·이승훈도 그의 제자다.

안현수 역시 전 부회장의 애제자였다. 김동성의 은퇴 후 안현수가 한국 대표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는 데는 사실상 전 부회장의 영향이 컸다. 창춘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안현수가 실격당한 것을 가장 안타까워하던 사람도 전 부회장이었다. “중국이 비디오 판정 시설을 준비하지 않은 것 자체가 의혹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전명규-비전명규’ ‘한체대-비한체대’ 등 쇼트트랙 파벌의 뿌리가 전명규 부회장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쇼트트랙계에서 안현수가 ‘황태자’ 대접을 받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선발전을 치르지 않고 대표팀에 발탁되는 등 전 부회장의 편애를 받은 수혜자이기도 하다.

정부는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대해 전면 감사를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빙상연맹의 비리와 파벌, 지도자 선발 방식 등의 시스템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파벌주의와 줄 세우기, 심판 부정은 분명 척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끓어오른 국민 여론을 의식한 눈치 보기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이로 인해 소치의 수많은 감동 스토리가 빛을 잃고 있다. 


왼쪽부터 진선유·이정수·변천사 ⓒ 연합뉴스
안현수와 함께 토리노올림픽 3관왕이었던 여자 쇼트트랙의 진선유 선수는 일찌감치 은퇴한 ‘안타까운 천재’로 꼽힌다. 진선유는 선두와의 반 바퀴 격차를 따라잡을 정도로 파워 스케이팅을 구사했던 선수다. 그러나 당시 코치가 자신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선수들에게 “진선유를 방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표팀에 발탁되지 못한 진선유는 2011년 23세의 어린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이정수 선수는 세계선수권대회를 이틀 앞두고 빙상연맹의 압력에 의해 ‘발목 부상’을 이유로 출전포기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정수 선수는 밴쿠버올림픽 쇼트트랙 2관왕에 올랐던 실력파다. 토리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변천사 선수 역시 체벌을 빙자한 코치진의 폭행과 계속 부각되는 파벌 문제로 24세에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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