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서·리영길·조경철 ‘반최룡해 연합’ 구축
  • 이승열│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 승인 2014.03.11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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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 처형 이후 급변하는 북한 권력 엘리트 합종연횡

지난해 12월12일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소가 재판을 열어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대한 사형을 판결하고 즉시 집행했다고 보도했다. 12월8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반당반혁명종파행위’로 낙인찍혀 회의장에서 끌려 나간 지 나흘 만에 장성택은 형법 제60조 ‘국가전복음모행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장성택의 숙청은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사망 이후 최대의 정치적 격변이었다. 장성택은 김정일 후계 체제의 선봉대로 지난 40년간 실질적인 권력 2인자로서 역할을 해왔으며, 백두혈통의 후견인으로서 장성택·김경희 부부는 유일 지도 체제가 완성되지 못한 김정은 권력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삼지연 비밀 회동에 최룡해·황병서 등 참여

장성택의 숙청은 놀라운 사실이지만, 이것은 김정일 사후 북한 정치 엘리트 구조에서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사건이다. 2008년 8월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뇌졸중 발병은 후계자의 조기 등장을 촉발했고, 이에 대한 김정일의 발걸음 또한 빨라졌다. 김정일은 자신과 달리 확고한 유일 지도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김정은에게 엘리트 간 충성 경쟁이라는 권력 구조를 선물했다. 김정일의 구상은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대회에서 구체화되었는데, 먼저 1998년 이후 선군정치의 최대 수혜자인 군부에 대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이를 위해 전후 세대인 리영호를 내세워 신군부 세력을 이끌도록 했다. 다음은 백두혈통인 장성택·김경희 연합을 통해 군부의 독주를 견제했다. 이때 김정일은 장성택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했고, 조직지도부 내 장성택 견제 세력인 리제강과 리용철을 각각 의문의 교통사고와 심장마비로 숙청했다. 이때부터 장성택의 행정부는 조직지도부를 능가하는 막강한 파워 집단으로 등장했다.

북한 김정은 조선로동당 제1비서가 장성택 처형 사건 이후 첫 공개 활동으로 인민군 설계연구소를 현지지도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엘리트 간 충성 경쟁 구조는 김정일 사후 권력투쟁으로 변질되었다. 먼저 장성택 그룹의 권력 게임이 시작되었다. 2012년 7월15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신군부의 리더였던 리영호가 전격적으로 숙청되면서 장성택에게로 힘의 중심이 급속히 기울었다. 무엇보다 리영호의 숙청은 경제적 이권과 깊은 관련이 있다. 2012년 4월6일 김정은은 “모든 경제권을 내각으로 이전하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동안 선군정치하에서 군부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무엇보다 군부에 무역권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권력 게임에서 이긴 장성택은 가장 먼저 군부에 집중된 무역권을 축소하고, 대신 자신의 이권을  팽창시켰다. 리영호는 무역권 이전에 끝까지 반대했고, 그 결과 당 행정부의 장성택, 정치국의 김경희, 총정치국의 최룡해가 ‘반(反)리영호 연합’을 구성해 숙청한 것이다. 이에 대한 군부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군부의 반격은 2013년 이후 시작됐다. 우선 2012년 장성택과 김경희는 김정은의 현지지도 수행 횟수에서 부동의 1, 2위를 지켰다. 그러나 2013년 9월 김경희가 건강 악화로 러시아로 출국한 사이, 장성택은 현지지도 등 실질적인 권력 주도권을 점차 잃어가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장성택이 관리했던 권력 연합도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장 눈에 띈 변화는 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가 장성택을 제치고 2013년 현지지도 수행횟수 1위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최룡해는 2012년 4월 장성택과 김경희의 도움으로 민간 당료이면서도 총정치국장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이 속해 있는 군부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따라 장성택의 행정부와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반(反)장성택 연합’의 선두에 서게 됐다. 

군부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군사적 긴장 국면을 고조시켰다. 2012년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2013년 2월 3차 핵실험, 연이은 남북 정전협정 파기와 불가침협정 무효화를 주장했고, 급기야 남북 화해의 상징인 개성공단마저 폐쇄하는 강경 노선을 고집했다. 물론 장성택은 김경희 등과 함께 장거리 로켓 발사도 반대했고 3차 핵실험도 반대했다. 북한 당국이 밝힌 장성택의 국가전복음모행위 혐의란 군부가 핵과 장거리 로켓으로 선군정치를 강화할 때 대화를 주장했던 장성택을 “미국의 ‘전략적 인내’에 편승하였다”고 비난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지난해 11월18일 국가안전보위부는 장성택을 가택 연금시켰고, 11월21일에서 26일 사이 장성택의 최측근인 리용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을 공개 처형했다. 군부는 장성택 연합을 제거하기 위해 조직지도부와 손을 잡았다. 김정은은 장성택 숙청을 앞두고 11월30일 노동당 간부들과 은밀히 백두산 삼지연에서 비밀 회동을 했는데, 여기에는 최룡해 총정치국장과 김원홍 국가안전보위부장,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제1부부장과 황병서·박태성 부부장 등이 동행했다. 결과적으로 군부의 최룡해와 조직지도부의 조연준·황병서, 국가안전보위부의 김원홍이 ‘반장성택 연합’을 구축한 것이다.

황병서 부각은 최룡해에 대한 통제 강화 의미

해가 바뀌면서 올해 1, 2월 사이에 ‘반장성택 연합’ 내에 새로운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장성택 이후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 등장한 최룡해가 올 1~2월 김정은의 현지지도 수행 횟수에서 조직지도부 황병서 부부장과 총참모장 리영길에게 밀려 3위로 추락했다. 자유북한방송 보도에 따르면, 최근 북한 군 장성들에게 최룡해 총정치국장을 비판하는 내용의 극비 자료가 배포되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 김정은은 지난 2월24일, 10년 만에 열린 제8차 사상일꾼대회에서 현대판 종파 척결을 재차 강조했다.

이와 같은 정황만으로 북한 권력 서열 2위인 최룡해의 실각을 예단하기는 성급한 것 또한 사실이다. 북한도 지난 3월5일 조선중앙TV를 통해 최룡해가 김정은의 포사격 경기대회 관람을 옆에서 수행하고 있는 화면을 방송해 최룡해 실각설이 신빙성이 없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북한 권력 엘리트 집단 내 갈등 구조에서는 최룡해 실각설은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사건이다. 무엇보다 조직지도부 군 담당 부부장인 황병서가 김정은의 현지지도 수행 횟수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직지도부는 조선로동당의 최고 권력 기구로서 ‘당 중의 당’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북한 내 최고 권력 기구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황병서가 군부 담당 부부장이라는 점이다. 북한군에 대한 조선로동당의 지도는 조직지도부 13과에서 총정치국에 대한 직접적인 지도와 통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1998년 선군정치가 보편화된 이후 김정일은 총정치국에 대한 직할 통치를 실시했고, 이후 총정치국은 총참모부와 인민무력부를 넘어서는 군내 최고 지도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조직지도부의 군부 담당 부부장인 황병서가 권력 핵심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과거 조직지도부-총정치국 관계를 복원하는 것으로 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에 대한 당의 지도와 검열, 통제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황병서는 최룡해와 함께 지난해 말 장성택 숙청을 결정했던 삼지연 회의에 동행했던 핵심 실세이며, 군 경력이 전무한 최룡해와 달리 인민군 중장과 상장을 역임했다. 그는 김정일에 의해 총정치국에서 조직지도부 군 담당 부부장에 임명된 인물이다. 황병서는 2010년 4월 심장마비로 사망한 군 담당 제1부부장인 리용철을 대신해 군 담당 부부장을 맡고 있으며, 2012년까지는 김정은 공식 수행 횟수 10위에도 들지 못했으나, 2013년 2위에서, 2014년 1~2월 현재 1위로 급부상했다.

황병서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총정치국의 역할 축소와 함께 군부에 대한 당의 통제력이 직접적으로 강화될 가능성도 점쳐진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올해 현지지도 수행 횟수에서 2위를 기록한 리영길 총참모장이 최룡해를 3위로 밀어낸 것은 우연이 아니라, 조직지도부의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결과다. 즉 군에 대한 당의 통제가 총정치국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2인자인 최룡해 군 총정치국장(맨 오른쪽)에게 맞서 황병서 노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리영길 총참모장, 조경철 인민군 보위사령관(사진 왼쪽부터)이 연합전선을 구축하리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군 내에서 총정치국의 지도를 받지만, 역할 면에서 대립 관계에 있는 군 보위사령부의 조경철이 권력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조경철은 지난 2월16일 김정일 72주년 생일 기념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시 맨 앞줄에 섰고, 18일 최룡해가 불참했던 군의 공연 관람에서 맨 앞줄에 앉는 등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당, 총정치국 거치지 않고 군 직접 통제

결과적으로 최룡해가 장성택에 이어 실각한다면, 북한 권력 내에서 조직지도부 황병서-군부 리영길-군보위사령부 조경철이라는 새로운 ‘반최룡해 연합’이 등장하게 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 내 권력 엘리트 간의 합종연횡을 통한 권력투쟁이 김정은의 유일 영도 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지는 의문이다. 북한 권부 내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빈도가 높아질수록 김정은 권력의 취약성은 더욱 확대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어떤 연합이 나와서 또다시 누군가를 숙청할지 지켜볼 일이다.


아버지 최현의 험난한 말로 지켜본 최룡해 


장성택이 처형된 직후인 지난해 12월20일 북한의 로동신문은 2면 전체에 걸쳐 ‘백두 영장의 역사적 자욱은 어디서나 보인다’는 제목으로 최현을 미화하는 글을 실었다. 최현은 1907년생으로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동지다. 1912년생인 김일성보다 5년 선배인 최현은 소련 극동군 88정찰연단 한인정찰대에서 함께했다. 그의 부친 최화심은 홍범도 장군 아래서 독립군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현은 후배인 김일성 체제 구축을 위해 헌신했다. 1958년 종파 사건과 1968년 군부 숙청 사건 당시 김일성을 도와 1인 독재 체제를 굳건히 했다. 이런 공으로 그는 1969년 민족보위상, 1972년 인민무력부장에 발탁되며 한때 권력의 2인자 노릇을 했다. 그러다 1976년 오진우에게 밀려났고 1982년 사망했다.

로동신문은 그런 최현에 대해 ‘두 대전(항일투쟁과 6·25 전쟁)의 초연탄우(硝煙彈雨)를 헤쳐온 감때 사나운(생김새나 행동거지가 거친) 백전노장’이었다고 밝혔다. 1958년 종파 사건 당시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권총을 빼들고 김일성 지배 체제에 반기를 든 ‘종파분자’들을 위협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장군님(김정일)을 대하는 태도는 수령님(김일성)을 모실 때의 정중한 자세와 몸가짐 그대로였다’며 대를 이은 충성을 칭찬하기도 했다. 장성택 처형 직후 로동신문이 30여 년 전에 사망한 최현을 새삼 소개하고 나선 것은 그의 아들 최룡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때문이다. 장성택 제거로 평양의 실질적인 권력 2인자로 떠오른 최룡해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하지만 최현의 말로는 험난했다. 김정일로의 후계 체제 이전 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1976년 그는 오진우에 의해 자신의 인민무력부장 관저에서 체포됐는데 이 과정에서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북한은 1982년 4월10일 최현이 병사한 것으로 발표했지만, 김정일에 의한 독살 소문이 파다했다. 김정일로의 후계 세습 시기에 권력에서 밀려난 아버지의 좋지 못한 말로를 지켜본 최룡해가 과연 김정은 체제에서 언제까지 권력 2인자 노릇을 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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