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고 명예 얻고, 남한의 엘리트 됐수다”
  • 정락인 기자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14.03.1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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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20인 성공 스토리…국회·군·대학·연예계 등에서 맹활약

탈북자 2만5000명 시대가 됐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지역에서 북한 말씨를 쓰는 ‘탈북자’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TV 또는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이방인이 아니라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이다.

남북 분단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탈북자는 ‘귀순자’로 불렸다. 이때까지는 중국을 경유하기보다는 휴전선을 넘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 주민보다는 북한 체제에 반대했거나 불법을 저지른 반체제 정치인 또는 군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우리 정부도 귀순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대접을 했다. 1962년 4월 ‘국가유공자 및 월남귀순자 특별원호법’이 제정돼 귀순자에게 국가유공자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진다. 북한이 최악의 경제 위기에 직면하자 ‘생계형’ 탈북자가 급증했다. 배를 이용해 국경을 넘기도 했으나, 대다수는 중국을 경유해 남한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가족을 동반한 ‘가족 탈북’이 이어졌다. 최근엔 중국을 경유한 제3국으로의 탈북이 증가하는 추세다.

북한 주민들이 탈북 러시를 이루면서 이들에 대한 대접도 달라졌다. 정착금을 줄이고 지원 규모도 대폭 축소했다. 시대에 따라, 정권에 따라 탈북자 명칭도 바뀌었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1월부터는 ‘북한 이탈자’로 불리다가,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1월부터 ‘새로운 터전에서 삶을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인 ‘새터민’이 됐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인 2008년 11월에 다시 ‘북한 이탈 주민’으로 바뀌었다. 박근혜정부에 들어와서는 ‘탈북자’가 널리 쓰인다. 정작 탈북자들은 ‘자유 이주민’으로 불리기를 원하고 있다.

탈북자들은 국내로 들어오면 국정원이 주축이 된 합동신문조에서 조사를 받은 후 하나원에서 교육을 이수하면 한국 국적을 취득한다. 정부는 탈북자 1인당 기본 정착금으로 700만원씩을 지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들어온 탈북자들의 면면을 보면 직업과 계층이 다양하다. 북한 권부의 핵심에 있던 당 간부부터 군·국가안전보위부·호위사령부·인민보안부 등 권력기관 간부도 있다. 남한의 광역단체에 해당하는 지방 행정 간부나 의사, 교수, 외교관도 있다. 

북한 고위 엘리트 출신들은 남한에서도 일정 정도 예우를 받았다. 국가 기관이나 공공기관 등에 특채돼 전문성을 살리는가 하면 탈북자단체 등에 헌신하기도 했다.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도 나왔다. 대학교수, 의사, 박사, 국가대표 코치, 언론인 등 남한 사회에서 엘리트층으로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 중 남한 사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탈북자들은 누군지 살펴봤다.

 

● 안찬일

1979년 귀순

북한 : 민경대대 부소대장

남한 : 중앙대 교수

안찬일 중앙대 국제정치학과 교수는 북한군 민경대대 부소대장(상사)으로 복무 중이던 1979년 철책선을 넘어 귀순한 후 건국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탈북자 출신 ‘1호 박사’라는 수식어도 이때 붙여졌다.

 

● 김형덕

1993년 탈북

북한 : 청년돌격대원

남한 :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 소장

김형덕 소장은 1993년 청년돌격대원으로 활동하다 노동교양소에 투옥됐으나 탈출에 성공한 후 중국·베트남·홍콩을 거쳐 남한에 들어왔다. 1996년 북측에 살고 있는 가족을 만나려고 중국으로 밀항을 시도하기도 했다.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을 앞둔 2001년 당시 민주당 김성호 의원의 인턴 비서관으로 채용됐다. 탈북자 출신으로는 최초의 국회의원 비서관이었다. 대성그룹 기획팀을 거쳐 2005년 남북 평화 문제를 연구하는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를 설립했다. 김 소장의 아내는 공인회계사다.

 

● 조명철

1994년 탈북

북한 : 김일성종합대 교수

남한 : 새누리당 국회의원(비례대표)

조명철 의원은 남한 국회의원이 된 최초의 탈북자다. 조 의원은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있다가 1994년 탈북했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냈다. 2011년 6월 통일교육원장에 임명됐다가 2012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했다.

 

● 강명도

1994년 탈북

북한 :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 합영회사 부사장

남한 : 경민대 북한학과 교수

강명도 교수는 강성산 전 북한 총리의 사위다. 그는 평양외국어대를 졸업하고, 금수산의사당 경리부 산하 합영회사 부사장을 지냈다. 1994년 탈북해 경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한 문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 최주활

1995년 귀순

북한 : 인민무력부 상좌

남한 : 탈북자동지회 회장

최주활 탈북자동지회 회장은 인민무력부 상좌(대령) 출신이다. 1979년 체코 주재 북한 대사관 부무관으로 파견돼 3년간 근무했다.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부부장으로 복귀해 인민무력부 수뇌부의 통역 업무를 10년 정도 맡았다. 1995년 인민무력부 후방총국 산하 륭성무역회사 합영부장에 임명됐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그해 귀순했다. 통일정책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탈북자단체인 탈북자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다. 


● 현성일

1996년 망명

북한 : 김일성종합대 교수

남한 :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현성일 수석연구위원은 현철해 북한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의 친조카다. 김일성종합대 외국어문학부 영어과를 졸업한 뒤 이 대학에서 8년간 교수로 근무했다. 1989년 외무성으로 자리를 옮겨 잠비아 주재 북한 대사관 3등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중 1996년 남한으로 망명한 고위 엘리트 출신이다. 2006년 경남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탈북자 출신 2호 박사가 됐다. 현철해 부부장은 지난해부터 숙청설이 나돌았다. 김정은 제1위원장의 공개 시찰에 수행하지 않았고, 최근 열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서도 빠져 숙청설이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 이철수

1996년 귀순

북한 : 공군 책임비행사

남한 : 공군 대령

이철수 대령은 북한 공군 제1비행사단 57연대 2대대 책임비행사로 근무하던 1996년 5월23일 서해 북한한계선(NLL)을 저공비행으로 넘어 수원비행장으로 귀순했다. 그후 소령 계급장을 달고 한국군 장교로 새 출발해 공군전투발전단과 조종훈련 교육기관 등에서 근무했다. 2010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 이애란

1997년 탈북

북한 :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식품품질감독원

남한 :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장

이애란 원장은 자수성가형 탈북자로 꼽힌다. 그는 북한 신의주경공업대학 식료공학부를 졸업하고,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식품품질감독원에서 13년을 근무했다. 1997년 탈북해 남한에 정착했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했고,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탈북 여성 1호 박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 이윤걸

2001년 탈북

북한 : 호위사령부 청암산연구소

남한 :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

이윤걸 대표는 북한 권력의 핵심 부서인 호위사령부 청암산연구소(김일성장수연구소)에서 근무했다. 2001년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몽골을 거쳐 남한으로 들어왔다. 북한에서의 전공을 살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충남대에서 농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땄다. 2010년부터 최신 북한 정보를 소개하는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를 운영 중이다.

 

● 한필수

2002년 탈북

북한 : 탄광 광부

남한 : 한성무역 대표

함경북도 출신의 한필수 대표는 북한에서 탄광 광부로 일하다 2002년 탈북했다. 남한에 와서는 청계천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한국 샴푸를 중국에 팔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착금 등 1500만원을 사업 밑천으로 삼았다. 중국 동북 3성과 화남 지역을 대상으로 세제 등 생활용품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매년 매출이 급신장했다. 지금은 약 5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견 기업으로 성장했다.

 

● 김영희

2002년 탈북

북한 : 정준택원산경제대학 졸업

남한 : 정책금융공사 북한경제팀장

김영희 팀장은 북한 정준택원산경제대학을 나온 경제 전문가로 북한에서 회계 관련 일을 한 엘리트다. 2002년 탈북해 남한에 온 후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2007년 산업은행 경제연구소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했다. 지난해 2월에는 동국대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조수아

2007년 탈북

북한 : 병원 외과의사

남한 : 통일교육원 강사

북한 고위층 자녀 출신인 조수아씨는 청진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함경북도 온성의 군(軍) 병원에서 외과의사로 일하다 2006년 탈북해 중국에 체류했다. 2007년 남한에 들어온 뒤 연세대 간호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2010년에는 탈북자 최초 대한민국 인재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서울대 의대 대학원을 수료했다. 현재는 통일부 안보 전문 강사로 활동 중이다.

 

● 이경희

2007년 탈북

북한 : 리듬체조 선수

남한 : 국가대표 리듬체조팀 코치

국가대표 리듬체조팀 이경희 코치도 탈북자다. 이 코치는 1990년대 북한 리듬체조의 간판 스타로 활약했다. 1991년 하계유니버시아드 3관왕에 올랐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2007년 탈북해 중국을 거쳐 남한으로 왔다. 지난해 5월 국가대표팀 코치로 영입됐다.

 

● 신경순

2008년 탈북

북한 : 일반 주민

남한 : 신영무역 대표

신경순 신영무역 대표는 성공한 탈북자 사업가다. 신 대표는 1999년 탈북해 중국에 머무르다 2007년 북송된 후 신의주로 끌려갔다. 그후 가까스로 재탈북해 2008년 남한에 정착한 후 약단밤 수입회사에서 통역 일을 했다. 회사가 부도나자 새터민 정착 지원금과 취업 장려금으로 회사를 인수해 직접 경영에 나섰다. 중국어에 능통한 것이 사업 밑천이었다. 이 회사 브랜드인 ‘키즈약밤’은 자타가 공인하는 약단밤 업계 1위다. 국내는 물론 일본·미국·유럽·동남아시아 등에 수출하고 있다.

 

● 기자 3인방

강철환(조선일보)·주성하(동아일보)·박진희(KBS)

탈북자 출신 언론인으로는 강철환 조선일보 객원기자, 주성하 동아일보 기자, 박진희 KBS 기자 등이 있다. 강철환씨는 1970년대 후반부터 10년 동안 요덕 정치범수용소에서 생활하다 1992년 북한을 탈출했다. 2000년 조선일보 북한 전문 사이트인 NK조선에 글을 쓰다가 정식 기자로 채용됐고, 지금은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북한전략센터 대표도 맡고 있다.

김일성종합대 출신인 주성하 기자는 1998년 탈북해 4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하다 2002년 남한에 들어왔다. 2003년 동아일보 공채로 입사해 북한의 생활상 등을 알려왔다. 박진희 KBS 북한전문기자도 김일성종합대를 나온 엘리트다. 2008년 국내에 입국했다.  

 

● 귀순 1세대 사업가

김용(한아홈쇼핑 회장), 전철우(스페로스 대표)

남한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탈북자도 여러 명이다. 초창기 그러니까 탈북자가 ‘귀순자’로 대접받던 시절 ‘성공’의 대명사는 모란각 냉면으로 유명한 김용씨다. 그는 자강도 강계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북한의 명문대인 김책공대를 졸업했다. 평양국립교향악단 바리톤 솔로 가수로 활동했으며, 중앙당 간부까지 지냈으나 1991년 10월 스위스로 망명한 후 남한으로 왔다. 대중가수, 냉면집 사장, 유통회사 대표를 하며 ‘성공한 탈북자’로 이름을 날렸다.

그에게는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실패와 좌절을 맛봤다. 모란각은 전국 곳곳에 매장을 열었고, 한때 96개까지 체인점이 늘어났다. 김용씨는 2000년 모란각 체인점 중 국내와 해외 체인점 2개만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김용이 망했다’는 말도 이때 떠돌았고, 김용의 성공담도 사라졌다. 그가 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은 2009년 베트남 홈쇼핑 사업에 진출하면서다. 2011년 베트남 홈쇼핑 업체(HSV)를 인수했고, 이듬해에는 캄보디아 홈쇼핑(HSC)을 설립했다. 지금은 HSV 홈쇼핑 본사인 ‘한아홈쇼핑주식회사’ 회장이다. 

귀순 1세대 연예인으로 불리는 전철우씨는 개그맨으로 활동하다 사업가로 변신했다. 전씨의 남한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냉면집을 차려 대박이 났지만 지인에게 사업을 맡기면서 사기를 당했다. 그후 사업체를 조직폭력배에게 빼앗겨 2~3년 만에 40억원을 잃었다. 지금은 재기에 성공해 냉면·갈비탕을 생산하는 식품 제조 공장 (주)스페로스 대표다.

 


ⓒ 시사저널 임준선
김용화 대표는 북한에서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부) 대위로 일했다. 그가 북한을 탈출한 것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김 대표는 평양에서 태어나 강건종합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인민군 중위로 제대했다. 그후 북한 권력기관 중 한 곳인 사회안전부 교화국 대위가 됐다. 함흥 철도국 단천기관차대로 옮겨서는 2호 열차 지도원을 맡았다. 북한에서 ‘1호 열차’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김정은이 탑승하는 전용 열차다. ‘2호 열차’는 김 부자와 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군수열차를 말한다. 

1988년 7월13일 2호 열차가 시설 노후로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김 대표는 문책을 피하기 위해 북한 탈출을 결심했다. 이때부터 쫓고 쫓기는 12년간의 험난한 여정이 펼쳐진다.

김 대표가 있던 혜산시는 양강도 중부 압록강 연안에 있다. 그는 이곳에서 압록강을 헤엄쳐 중국으로 탈출했다. 중국에서 베트남까지 약 2만㎞는 걸어서 이동했지만 베트남 도착과 동시에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중국으로 송환되면 북한으로 강제 추방될 것을 우려해 화장실을 가는 척하다가 도주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5년 6월 남한으로 밀입국했지만 ‘탈북자’가 아닌 ‘조선족’으로 분류됐다.

김 대표는 ‘탈북자’임을 인정받으려 당국을 상대로 22차례에 걸쳐 재판을 벌였으나 결국 불법 입국자로 판명돼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았다. 중국으로 송환되면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는 탈출을 감행해 1998년 4월 전남 진도에서 쪽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한다. 일본에 도착해 밀항 혐의로 체포되고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병보석으로 가석방됐다. 그 후 한국 정부로부터 1년간 체류허가를 받아 2000년 2월 재입국했다. 12년간의 도피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김 대표는 그 후 북한 주민들의 탈북을 도왔고, 지금까지 3000여 명을 탈북시켰다고 한다.

 

요즘은 누가 많이 탈북하나.

군(軍) 쪽에 있던 사람이 많다. 현역으로 있으면서 뇌물을 받고 탈북을 도와주던 사람들이다. 또 행정 간부도 많이 오는데 돈과 연관된 사람들도 있다. 일반 행정 간부들의 경우 권력이 없는 간부가 대다수다.

브로커 비용으로 얼마를 지불하고 있나.

중국 접경 지역은 250만원, 함경북도 일대는 600만원, 평양은 1000만원 정도가 들어간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면서 국경수비대 등을 대폭 교체하는 등 탈북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자꾸 바꿀수록 우리한테는 유리하다. 자본주의 돈맛을 본 군인이나 행정 간부들은 계속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새로 교체돼 오면 돈으로 매수하고 사진을 촬영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한테 협조하게 돼 있다.

최근 재입북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유는 무엇인가.

가족을 탈북시키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갔다가 국가보위부 등에 유인돼 납치당할 수 있다. 또 가족을 볼모로 협박해 입북을 강요한다. 이런 것을 막기 위해서는 북한이나 중국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정부 어느 곳도 그런 것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상황이 변한 것도 모르고 무작정 중국으로 갔다가 함정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다. 안보 교육, 재입북 교육 등을 통해 재입북자의 실상을 탈북자에게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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