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기관차가 ‘복고적 미래’ 싣고 왔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
  • 승인 2014.03.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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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편입된 ‘사소한 취향’ 스팀펑크… 아날로그 기술과 가상의 기계 결합

세상이 복잡하게 분화하면서 다양한 신인류가 등장하고 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특이한 취미를 가진 이들이 각각 동호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는가 하면 수십 년 전만 해도 ‘약간 이상한 사람’으로 몰렸을 법한 일을 취미로 즐기고, 여기에 자신의 시간과 경제력을 쏟아붓는다. 이렇게 취미에 열중하는 이들을 보면 취미를 위해 직업을 갖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들 마니아로 인해 세상은 다양해지며 새로운 종의 번식을 통해 신선하고 때로는 뜬금없는 작은 놀라움으로 우리는 즐거워진다. 물론 때로는 불쾌함을 던져주는 경우도 있지만. 

기성세대에게 이런 새로운 놀이(?) 또는 취미는 생소하고 하찮아 보이며 다소 엉뚱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들은 주위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 아니 무시한다. 그들의 취미는 중심을 향하기보다는 주변을, 공적이기보다는 사적이며, 종합적이기보다는 파편적이다.

토마스 윌포드의
이런 ‘사소한 취향’이 문화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피규어나 스팀펑크 같은 것이 그들이다. 최근엔 레고도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대부분 혼자서 놀던 것들이 인터넷이나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같은 매체를 통해 조직화·집단화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언더가 아니다. 이들은 이제 세상에 당당히 얼굴을 들고 자신의 취미·기호를 이야기한다. 한국 사회가 그만큼 분화되고 이들을 수용하며 인정하는 관용의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우센버그의
시대적 배경은 미국 서부 개척 시대

새롭게 등장한 취미 중 하나가 스팀펑크(Steampunk)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대중문화의 한 경향으로, 시대적인 배경은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시대나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다. 내용은 역사적인 것을 다루고 아날로그적인 경향을 지닌다. 하지만 시대를 넘는, 즉 20세기 산업 발전의 바탕이 되는 내연기관이나 전기 동력 대신 증기기관과 같은 과거 기술이 크게 발달한 가상의 과거, 또는 그런 과거에서 발전한 가상의 현재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그래서 사이버펑크와 대립되는 증기기관의 스팀(Steam)을 합쳐 만든 합성어로서 스팀펑크는 시대적으로 ‘과거’지만 시제는 ‘오늘’이나 ‘미래’라는 초현실적인 속성을 지닌다. 사물이나 존재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를 박탈해버리고 새로운 창조적 관계를 맺어줌으로써 기발하고 때로는 기상천외한 사물로 전환 또는 전복시킨다.

물고기와 새가 산속에 있고, 사막에 고래가 사는 식이다. 시대착오적인 기술 또는 복고풍의 미래가 상존한다. 19세기 사람의 패션·문화·건축·예술에 대한 관점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당시의 진화된 기술보다 더 진보된 가상의 기계를 등장시켜 ‘복고적 미래’를 완성한다.

우다가와 야스히토의
스팀펑크를 살펴보면 정크아트(Junk Art)의 곁가지임을 알 수 있다. 폐품·쓰레기 같은 소재로 조합하고 결합해서 새로운 오브제로 만들어내는 정크아트는 입체주의 화가 피카소(1881~1973년)·브라크(1892~1963년)에 의한 파피에 콜레,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콜라주, 슈비터즈(1887~1948년)의 메르츠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라우센버그(1925~2008년)가 컴바인 페인팅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에 걸쳐 가난한 예술가들이 쓰다 버린, 아니면 버려진 쓰레기에서 잔해를 발견하고 이를 사용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버려진 그대로의 날것이 주는 질감을 살려 공업화되어가는 산업사회의 비정함을 노래했다. 마치 찰리 채플린의 영화처럼.  

 정크아트는 당시 크게 유행하던 추상 표현주의에 대한 반발과 자본주의 사회의 화려한 도회의 이면을 장악하고 있는 소비가 미덕인 세상에서 엄청나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쓰레기들을 고르고 모아 아상블라주(Assemblage : 모으기·집합·조립)라는 기법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로렌스 알로웨(1926~1990년)는 이런 작품을 보고 예술이 도회의 소비문화의 산물인 쓰레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으며, 특히 버려진 소비 물자를 오브제로 구체화시켜 재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크 문화, 정크아트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샘 반 올픈의
우다가와 야스히토의
이렇게 시작된 정크아트는 기발함과 전혀 다른 것들이 만나 새로운 것들을 탄생시키는 의외성, 사물의 속성을 간파하는 날카로운 시선 등이 조합을 이루며 시선을 끌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소재에 일상에서 늘 만나는 생활용품에서 얻는 것들이 많아 친근하고 익숙하다는 점에서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현대미술보다 편했다.

이러한 익숙함과 편리함이 복고풍 또는 빈티지를 지향하는 소비문화와 만나면서 등장한 것이 스팀펑크다. 하지만 스팀펑크는 발달한 컴퓨터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이를 유용한 도구로 사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로부터 탈출 또는 일탈을 꿈꾸는 자들의 도전 또는 도피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국 시대를 거스르고자 하는 반역·반동의 성과물인 것이다.

스팀펑크는 위안이자 도피처

거대한 세상과 과학 또는 전자 매체가 삶의 굴레가 되는 세상을 거슬려보려 하지만 그 달콤함과 안온함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음을 아는 이들에게는 스팀펑크가 작은 위안이 된다. 얼굴을 보거

우다가와 야스히토의
나 만나지 못하는, 아니 알지도 못하는 이와 SNS를 통해 대화하면서 친구를 만난다고 착각하고, 이모티콘이 유일한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창구가 되는 이들에게 스팀펑크는 일종의 탈출구인 셈이다.

누구나 위안을 필요로 하고 얻고자 한다. 오늘날 홀로이면서 홀로이지 못하는 모순의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스팀펑크는 위안이자 도피처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위안은 될지언정 영원한 안식은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스팀펑크는 신기루다. 하지만 우리는 홀로 자동차를 운전해 가면서 남들 모르게 듣는 뽕짝류의 메들리 가요에서 큰 위안을 얻기도 한다.

스팀펑크는 아직은 마이너 장르다.

펄사 프로젝트의
다만 영화나 대중소설과 같은 대중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접점이 넓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문화 각 분야에 지금보다 더 큰 지문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스팀펑크를 조망할 수 있는 <스팀펑크 아트전>(~5월18일)이 열린다. 그래픽과 입체 작품, 영화 클립을 통해 스팀펑크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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