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해서 등 떠밀었는데 ‘뒷목’이 서늘
  • 양정대│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4.04.09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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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계 新‘남·원·정’에 거부감…지방선거 승리 시 레임덕 앞당길까 불안

이른바 신(新)‘남·원·정’이 지방선거 정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새누리당의 남경필 경기도지사 예비후보와 원희룡 제주도지사 예비후보 그리고 정몽준 서울시장 예비후보를 말한다. 과거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 시절 소장 개혁파의 기수였던 남경필·원희룡·정병국 등 세 사람이 ‘남·원·정’으로 불렸음을 감안하면 ‘2014년판 남·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병국 경기도지사 예비후보 대신 정몽준 후보가 포함됐는데, 이는 최근 지방선거 경선 판세 구도와 무관치 않다.

과거 남·원·정은 낡고 고루하고 수구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한나라당에서 젊음과 역동성의 상징이었다. 야권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복지·노동·통일·경제민주화 분야를 거침없이 제기하는 개혁의 기수였다. 강경 보수 성향의 선배 의원들과 얼굴 붉히고 논쟁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기개가 있었다. 한 여권 인사는 “2002년 이회창 후보의 대선 패배 이후 침몰 위기였던 한나라당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데는 이들의 공이 크다”고 평가했다.

(왼쪽부터)3월31일 경기도 수원 경기도청을 찾은 남경필 후보가 취재진과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3월16일 원희룡 후보가 출마 선언 기자회견 후 지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4월2일 정몽준 후보가 ‘한국YMCA 100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뉴시스
그랬던 남·원·정의 명성은 그들이 중진 의원 대열에 들어서면서 빛이 바랬다. 특히 이명박 정권 시절엔 ‘친이(親이명박)계’의 핵심이면서 사실상 권력의 한 축이었다. 정병국 후보는 당 사무총장에 문화관광부장관까지 지내며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원 희룡 후보도 ‘영일대군’ 이상득 전 의원의 지원 속에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나마 남경필 후보 정도가 계파 싸움이 극에 달했던 당시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었을 뿐이다. 국민들은 남·원·정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였고, 이들 스스로도 서로의 공통분모를 유지하지 않았다.

신‘남·원·정’은 출발 자체가 다르다. 선거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조합이 만들어졌고, 그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외부에서 회자되고 있다. 세 사람을 관통하는 정치 색깔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굳이 공통점을 따진다면 권력을 쥐고 있는 ‘친박(親박근혜)계’ 핵심 그룹이 이번 지방선거를 겨냥해 이른바 ‘중진 차출론’으로 호출해낸 정도다.

“눈엣가시들, 지방 내려보내려 했던 것”

 특이한 건 이들의 모호한 위치다. 친박 핵심부가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되는’ 선거에 내세울 만큼 나름의 경쟁력을 갖춘 인물들이지만, 그렇다고 권력 핵심 인사들과 가깝지도 않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친박계의 거부감이 강한 ‘비박(非박근혜)계’ 인사들이다. 당초 지방선거 출마 의사가 없던 이들이 사실상 떠밀려 출마하게 됐을 때 한 비박계 의원은 이런 얘기를 했다. “한마디로 눈엣가시 같던 사람들을 방패막이로 쓰려는 것 아니겠느냐. 당에 있으면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청와대와 각을 세우려 할 것이라고 보는 거지. 그래서 지방으로 내려보내려고. (선거에서) 이기면 좋고 져도 자신들(친박)은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신‘남·원·정’에 대한 친박계의 거부감을 엿볼 수 있는 예는 많다. 우선 공천관리위원회가 논란 끝에 제주도지사 경선을 100% 여론조사로 결정하자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공천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강력히 항의했다는 설이다. 100% 여론조사는 원 후보에게 단연 유리하기 때문이다. 성격상 확인이 쉽지 않은 얘기지만, 우근민 제주도지사가 지난해 11월 여당에 입당할 당시 청와대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광역단체장 후보 등록일 연장, 서울시장 경선 후보 2배수 압축 시도 등 김황식 후보가 ‘박심(朴心)’ 논란에 휩싸인 몇 가지 계기가 실은 정몽준 후보에 대한 청와대의 불편함에서 비롯된 것이란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한 청와대 관계자의 말이다. “굳이 따지자면, 이전부터 틈만 나면 (박근혜) 대통령과 각을 세웠던 원희룡 후보는 감정적으로 싫은 것이고, 재벌 총수인 정몽준 후보는 본인이 이미 대통령인 양 행세하니 곱게 보일 리 없고, 정도가 좀 덜하긴 하지만 남경필 후보 역시 태생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한 식구로 보긴 어렵다.”

당선되면 당장 ‘차기 잠룡’으로 부상

신‘남·원·정’ 역시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남 후보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정치 현안에 대한 발언을 가급적 자제해온 것도, 서울시장 후보 경선전에서 ‘박심’ 논란을 소재로 김황식 후보를 몰아붙이던 정 후보가 ‘7인회’(박 대통령의 최측근 원로그룹) 멤버인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를 선대위원장으로 영입하려다 무산된 해프닝도 따지고 보면 친박계를 의식한 행동이다. 원 후보가 제주도지사 출마 선언 전에 친박계 핵심 의원들을 잇따라 만나 협조를 요청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를 두고 한 비박계 중진 의원은 “각자도생하는 법을 익힌 것”이라고 촌평했다. 스스로는 자체 경쟁력이 있더라도 지금의 여권 내 권력 구도상 친박계와 각을 세우는 건 실익이 없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칫 정치적 발언권조차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 후보나 원 후보는 현재 당내 경선 구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지만, 정 후보의 경우 경선 패배는 사실상 정계 은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모두 본선에서 승리한다면 청와대와 친박계에선 상당한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당장이야 이들 3인의 당선은 곧 여당의 지방선거 승리를 보장하는 수순이어서 당분간 정국의 주도권을 유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는 ‘양날의 칼’이다. 일반적으로 5년 단임제 대통령제에선 임기 중반이 넘어가면서 ‘레임덕’이 시작되고, 차기 권력을 중심으로 세력이 재편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청와대나 친박계와 교감하기 어려운 신‘남·원·정’ 세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 있고, 게다가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서울시장 자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대통령과 ‘맞짱’을 뜰 수 있는 자리”(서울시의 한 국장급 간부)다. 그만큼 정치적 무게감이 크다는 얘기다. 10년 넘게 대권 주자 반열에 있었고,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선 주자 선호도 1위에 오른 정몽준 후보라면 언제든 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리란 게 여권 내부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남경필 후보 역시 주변에서는 이미 경기도지사 재선 이후 ‘차차기’ 대권에 도전하는 구상을 하고 있다.

원희룡 후보는 이미 제주행을 결심하면서부터 대권 플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원 후보 측 관계자는 “굳이 고향에 내려가는 이유가 뭐겠느냐”고 했고, 원 후보 스스로도 “도지사를 거쳐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공언했다. 최근 몇 년간 중앙 정치 무대에서 명성에 금이 간 만큼 그로서는 제주도지사 4년을 화려한 서울 복귀 준비 기간으로 삼을 공산이 크다. 친박계가 이들 세 사람을 기피하는 직접적인 이유다. 정치적 능력은 있지만 결코 식구는 아닌 것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친박계 입장에서 보면 대중성이 큰 인물을 키워내지 못한 결과 비주류들을 주요 광역단체장 후보로 내세운 건데, 당장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밀어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호랑이를 키운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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