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대학생들도 ‘안녕들 하십니까’
  • 모종혁│중국통신원 ()
  • 승인 2014.04.0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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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경제협력 강화 반대 데모…일자리 감소 등 고단한 현실 반영

#1. 4월3일 타이완의 수도 타이베이(臺北) 중심가에 위치한 입법원(국회) 청사. 학생운동단체 소속 활동가와 대학생 200여 명이 17일째 본회의장을 점거한 채 농성 중이다. 일부 학생은 장기간에 걸친 고립 생활에 지쳐 보이지만, 대다수 농성자는 질서를 유지한 채 경찰 진입에 대비하고 있다. 이들은 3월18일 밤 경찰 저지선을 뚫고 입법원에 들어왔다. 입법원 본회의장이 시위대에 의해 점거된 것은 타이완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2. 3월30일 타이베이 도심에서는 11만6000명(주최측 추산 50만명)의 시민이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였다. 검은색 옷을 입고 해바라기를 든 참가자들은 양안(兩岸·중국과 타이완) 협력을 감독하는 기구의 법제화, 시민 헌정의회 개최 등을 요구하며 “마잉주(馬英九) 총통 하야”를 외쳤다. 시위대는 타이완 정부가 중국과 벌이는 ‘밀실 협상’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검은색 옷을 입었고 ‘희망’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를 흔들었다. 이번 대규모 시위는 입법원에서 농성 중인 대학생들에 대한 연대 차원에서 열렸다.

3월23일 6일째 타이베이 입법원(국회) 점거 농성을 벌이고 있는 타이완 학생운동단체 지도부가 본회의장에서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 비준안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제난 타개 위해 중국과 ‘양안 협정’ 체결

중국 대륙 옆 작은 섬나라 타이완이 요동치고 있다. 200여 명의 대학생이 일으킨 점거 농성의 충격파는 대학가를 정치 이슈로 덮어버렸다. 이 물결의 선도자는 야당이나 시민사회단체가 아닌 학생운동조직이다. 2012년 결성된 ‘흑색도국청년진선(黑色島國靑年陣線)’으로 이번 입법원 점거 농성을 주도면밀하게 이끌었다. 이들이 댕긴 불씨는 대학가에서부터 번져나갔다. 3월24일 국립 타이완 대학, 정치대학, 칭화(淸華) 대학 등을 시작으로 28개 대학 학생들이 점거 농성 지지를 선언하고 동시 파업을 결의했다. 이에 자극받은 시민들도 행동에 나섰다. 날마다 입법원 주변과 가오슝(高雄)·타이중(臺中) 등 주요 도시는 시위대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다. 야당인 민진당의 쑤전창(蘇貞昌) 주석을 비롯한 차기 대선 주자들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잇따라 입법원을 찾아 농성자들을 격려했다. 흑색도국청년진선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게재하고 백악관 청원 사이트에 20만명을 온라인 서명시키는 등 대외 홍보전도 전개하고 있다.

타이완을 격랑으로 빠뜨린 이번 사태는 국민당 정부가 중국과 ‘경제협력협정(ECFA)’을 강화하면서 비롯됐다. 타이완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국제적 고립을 해소하겠다는 경제적 필요성과 양안 간의 정치적 통합을 위해 2010년 6월 중국과 ECFA를 체결했다. FTA와 유사한 성격이지만, 타이완과 중국은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국가 간 경제협정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ECFA 체결 및 발효를 기점으로 타이완은 글로벌 금융 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났다.

타이완의 경제성장률은 2009년 -1.8%에서 2010년 10.7%로 크게 상승해 1986년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비록 재작년과 작년에는 1.74%, 2.59%로 주춤했지만 대외 의존도가 높은 타이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분명하다. 이는 대외무역 통계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지난해 무역수지는 전년에 비해 7.9% 증가한 331억4000만 달러의 흑자를 냈다. 일본·한국·EU 등을 상대로는 적자가 많았지만, 중국과의 무역에서 무려 1159억 달러에 달하는 흑자를 거두면서 얻은 성과다.

국민당 정부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서비스 분야 추가 개방을 추진했다. 지난해 6월 양안은 서비스무역협정을 맺어 타이완은 중국에 64개 항목, 중국은 타이완에 80개 항목을 개방키로 했다. 전면적인 개방을 통해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더욱 굳건히 하려는 의도에서다. 하지만 투자이민 허용, 노동시장 개방 등을 염려한 야당과 대학생들이 거세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현재 타이완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국민당 정부는 공청회와 설명회를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3월17일에는 입법원 상임위에서 야당 의원들을 따돌리고 서비스무역협정 비준 절차를 강행하려 했다. 이 과정을 TV 생방송으로 본 대학생들이 위기의식을 크게 느꼈고 다음 날 입법원을 기습 점거한 것이다.

지난해부터 타이완 정부는 친여(親與) 성향 TV와 신문을 앞세워 여론몰이를 해왔다. “ECFA 체결 이래 중국 자본의 타이완 투자는 483건에 달했고 타이완인 9624명도 채용했으나, 중국인 관리자의 타이완 파견은 259회에 그쳤다”고 주장했다. “개방에 따른 자영업자들의 충격은 극히 미미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학생들의 입장은 달랐다. “투자이민을 기회로 가까운 미래에 중국인의 타이완 내 영구 거주가 가능해지고, 값싼 중국인 노동력이 유입돼 각종 일자리를 차지하면 청년 실업률이 증가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협상 과정과 비준 심사가 국민 및 산업계와의 소통 없이 진행됐고, 국회의 보고와 심사도 날치기로 통과됐다고 비난했다. 무엇보다 타이완 경제의 중국 예속이 가속화되고 타이완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우울한 미래를 우려했다.

마잉주 총통, 대학생들에게 “대화하자” 제안

이는 대학가에서 대자보 열풍으로 표출됐다. 3월26일부터 수도권 주요 대학 광장과 게시판에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인 의견을 적은 대자보가 나붙었다. 대부분 ‘?還好?(너 별일 없지)’로 시작되는 대자보에는 최근 벌어지는 입법원 점거 사태부터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 체결, 마잉주 총통과 국민당 정부의 소통 부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칭화 대학에 재학 중인 왕위덩(王昱登)의 제안으로 시작돼 정치·사회 문제에 대한 대학생과 청년층의 관심을 고조시켰다. 지난해 한국 대학가를 휩쓴 ‘안녕들 하십니까’의 타이완판인 셈이다. 칭화 대학 등 일부 대학 당국은 학교 규정을 이유로 대자보를 제거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면서 전체 대학가로 번지는 양상이다.

타이완 대학생들이 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고단한 현실과 어두운 미래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다. 타이완은 기업들이 중국으로 생산기지를 옮기면서 산업이 공동화되고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대학을 졸업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들고, 찾더라도 ‘22K’(2만2000 타이완달러, 약 76만8000원)의 낮은 초임을 감내해야 한다. 수년간 뼛골 빠지게 일해도 평균 월급은 지난해를 기준으로 4만5900 타이완달러(약 160만원)에 불과하다. 이는 12년 전에 비해 불과 9.2% 상승한 수치다. 설상가상으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부동산 때문에 내 집 마련의 꿈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2012년 현재 타이완 정부의 조세 수입률은 GDP(국내총생산) 대비 12.8%로, OECD 평균 24.6%, 한국 19.8%에 훨씬 뒤지는 세계 하위권 수준이다. 타이완 정부 예산도 70조원에 불과해 GDP가 타이완의 80% 수준인 태국(82조원)보다 적다. 정부 예산이 적다 보니 국민 복지 향상은 꿈도 못 꾼다.

집권 2기 임기 3년 차에 지지율 9%의 레임덕을 맞은 마잉주 총통은 학생운동단체 지도부와의 직접 대화를 제의하며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왕진핑(王金平) 입법원장도 “서비스무역협정의 날치기 통과는 결코 없을 것”이라며 여론 무마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장밋빛 미래’를 꿈꿀 자격조차 상실한 타이완 젊은이들의 불안감을 달래주지 못하는 이상 난국 돌파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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