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얼굴 근육, 역할 따라 변한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04.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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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공주> 출연 범상치 않은 배우 천우희

우리는 간혹 세상을 놀라게 하는 비범한 연출 데뷔작을 만난다. 장담하건대, 사람들은 오래도록 그중 한 편으로 이수진 감독의 <한공주>를 논하게 될 것이다. 이제 고작 4월이지만 이 영화를 벌써부터 ‘올해의 영화’로 꼽는 영화인이 늘어나고 있다.

<한공주>는 공주라는 이름의 여고생에 관한 이야기다. 그야말로 이름만 공주인 소녀는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영화는 공주가 쫓기듯 전학을 오는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공주와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그 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영화는 과거의 사건을 성급하고 직설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는 대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공주의 현재를 비추며 조금씩 과거에 접근한다.

영화 한 장면. 가운데가 천우희. ⓒ 무비꼴라쥬 제공
공주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을 목격하게 되는 것은 극의 중반 이후다. 공주는 수십 명의 또래 남학생에게 몸과 마음을 끔찍하게 유린당했다. 그 일로 가장 친한 친구마저 잃었다. 그사이 부모와 함께 살 형편도 못 돼 여기저기 얹혀사는 공주의 사연 역시 서서히 드러난다. 작은 체구의 여자아이가 마음 편히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또 공주의 과거는 여전히 날카롭게 공주를 할퀴어대기 바쁘다. 조심스레 새로운 삶을 꿈꾸던 공주의 일상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산산조각이 난다.

<한공주>는 공주의 목소리와 몸짓과 표정을 섬세하게 좇으며 그가 느끼는 감정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생각을 화면 안에 풀어놓는다. 그 힘은 그 어떤 직설적인 화법의 영화보다 세다. 결국 이 영화는 공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주변 사람, 나아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이 아이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동안은 얼마나 안일하게 굴었던 걸까.

비범한 연출과 재능 많은 배우의 결합

연출도 비범하지만, 공주를 연기한 배우 천우희도 탁월하게 빛나는 영화다. 천우희를 통해 공주의 슬픔, 그럼에도 건강하게 삶을 이어 나가려는 강인함, 다시금 절망에 빠지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카메라를 응시하는 공주의 눈에서는 한꺼번에 여러 가지의 감정이 복잡하게 일렁인다. 그 눈이 날아와 꽂히고, 결국 관객의 가슴을 아프게 때린다.

천우희는 그런 공주를 처음부터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왠지 내가 연기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남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연기일 수도 있겠지만 난 도전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역할에 너무 몰입해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그는 공주를 무척 강인한 아이라고 이해했다. “공주는 그 큰 고통을 겪고도 부모님께조차 의지하지 못한 채 홀로 그 시간을 감내하잖나. 그러면서도 일상을 꿋꿋하게 이어 나간다. ‘아직 어린데 얼마나 빨리 철이 든 걸까’ 싶어 연기하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도 많았다. 그래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본능적으로 매우 강하고, 씩씩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더> <써니> <우아한 거짓말> 출연

천우희가 최근 들어 어디선가 툭 튀어나온 신인 배우는 아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년)에서 진태(진구)와 격정적으로 몸을 섞으며 태연하게 끝말잇기를 하던 여자가 천우희다. 좀 더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린 것은 강형철 감독의 <써니>(2011년)에서다. 수지(민효린)의 얼굴에 상처를 내는 ‘본드걸’ 상미를 연기하면서다. 최근 개봉한 <우아한 거짓말>에서도 천우희는 예의 그 특유한 존재감을 은은하게 빛냈다. 만지(고아성)의 친구이자 동생 미라(유연미)를 살뜰하게 보살피는 속 깊은 여고생 미란이를 연기한 것도 그다.

천우희는 늘 그의 얼굴이 아니라 역할로 먼저 기억되는 배우다. 그는 “맡은 역할에 따라 얼굴 근육 자체가 변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내 장점이자 단점이다. 기묘한 얼굴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심각한 역을 맡으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서 인상이 뒤틀리고, 마음이 편할 땐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이 된다. 배우로서는 강점인 것 같다. 사람들에게 지루함보다는 새로움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좋다.”

천우희의 연기를 유심히 보면 그가 매우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시선 처리, 몸짓 하나 어색한 구석이 없다.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에 완벽하게 동화돼버린다. 배우로서 타고난 기질도 있겠지만 천우희는 이것이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는 지금껏 그가 비교적 ‘센’ 역할을 맡았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넌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은데 뭘 믿고 연기하려고 하느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럼 배우를 못하는 건가 고민한 적도 있지만 오히려 단순하게 생각을 바꿨다. 배우의 본질은 연기니까 연기를 잘하면 되겠다고.”

그래서일까. 천우희와 함께 작업했던 감독은 결국 천우희라는 배우에게 반하고 말았다. 지금껏 모든 감독이 그에게 ‘꼭 한 번 다시 작업하자’는 말을 남긴 것이 그 증거다. 천우희는 “제발 빈말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당연히 빈말이 아닐 것이다. 그런 얘기는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다. “가끔은 상처받을 때도 있다. ‘넌 기능적인 배우라 극 안에서 그냥 이용당한 것일 뿐’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영화 안에서 내 기능을 다 했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언제나 내 연기가 영화 안에서 효과적인 재료로 쓰이길 바랄 뿐이다.”

<한공주>는 천우희가 좋은 재료로 쓰인 영화로 계속 언급될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무심히 지나친다면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괴물 같은 연출 데뷔작과 가까운 미래의 한국 영화계에 어떤 흐름을 만들어 갈 여배우의 빛나는 순간을 놓치게 되는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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