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블랙홀’, 정치권 집어삼킨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04.2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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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참사로 지방선거 판세 흔들…여당에서 ‘지방선거 연기론’ 등장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어디까지 갈는지. 잘못하면 전면 개각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사퇴하느냐 마느냐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그렇긴 하지만, 6월 지방선거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진도 여객선(세월호) 침몰 사고 이튿날인 4월1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새누리당 친박계 핵심 당직자가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여권 내 전략가로 통하는 그는 이번 사고가 지방선거에 미칠 영향을 묻는 질문에 “일단은 상황을 좀 지켜보자”면서도 “지금처럼 정부가 우왕좌왕하고 불신을 받게 되면 해보나 마나”라고 혀를 찼다.

6·4 지방선거가 50일도 채 남지 않았지만 여야 정치권은 4월16일 저녁부터 사실상 선거운동을 전면 중단했다. 1993년 10월 발생한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이후 20여 년 만에 발생한 초대형 사고로 온 국민이 충격과 비탄에 빠진 상황에서 정상적인 선거운동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새정치연합)은 각각 지방선거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 명의로 각 지역에 “당분간 일체의 선거운동을 중단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4월17일 전남 진도실내체육관을 방문해 진도 여객선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 사항을 듣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사실 정치권은 사고 발생 당일인 16일 점심 무렵까지만 해도 그다지 긴장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전 11시가 넘어가면서 안산 단원고 학생들 전원이 구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가 밝힌 구조자 숫자도 오후 2시엔 당시까지 알려진 승선 인원의 80%가 넘는 368명이었다. “사람들이 빨리빨리 구조돼서 다행이다”는 기자의 말에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박근혜정부가 안전 문제 하나만큼은 제대로 하지 않느냐”고 호기를 부렸을 정도다.

여당, “안전 문제만큼은” 호기 부리다 ‘멘붕’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오후 4시30분을 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중대본이 구조 인원을 기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64명으로 정정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해양경찰청과 해군 함정, 민간 어선 등이 구조에 함께 나서다 보니 구조 인원이 중복 계산됐다”는 이경옥 안전행정부 2차관의 해명이 나오자 정치권은 크게 술렁였다. 새누리당은 실무진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황우여 대표가 최경환 원내대표와 상의한 후 곧바로 진도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새정치연합도 기초연금 여야 협상안 수용 여부를 논의하던 비공개 의원총회를 중단했고, 안철수 공동대표가 진도로 내려갔다.

여야는 곧바로 당내에 이번 사고를 지원할 대책위원회를 꾸렸고, 양당 사무총장 간 통화에서 선거운동을 중단하기로 뜻을 모았다. 비슷한 시각, 새누리당 서울시장 경선 후보인 정몽준 의원과 김황식 전 총리, 경기도지사 후보인 남경필 의원 등이 차례로 선거운동 중단을 선언했고, 새정치연합에서도 경기도지사 후보로 나선 김진표·원혜영 의원과 김상곤 전 경기교육감 등이 선거 관련 일정을 중단했다.

국회 의사 일정도 올스톱됐다. 여야는 정부 측에 한목소리로 사고 수습에 만전을 기해달라며 이번 사고 유관 상임위 개최를 연기했고, 이에 따라 17일로 예정된 안전행정위원회와 교육문화관광위원회 회의 등이 모두 취소됐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제명안 처리를 위해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소집한 윤리특위도 무기한 연기됐다.

여야 정치권은 이번 사고의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벌써부터 ‘지방선거 연기론’을 거론하는 이들도 있다. 한 여권 인사는 “지금 분위기로 보면 당분간은 정상적인 선거운동이 불가능할 것 같다. 새누리당이 광역단체장 경선 일정을 일주일 정도 연기했는데, 다음 주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겠느냐. 차라리 큰 선거가 없는 하반기로 미루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게 아니라면 여야가 진지하게 논의를 해볼 필요도 있다”고 밝혔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4월16일 여객선 침몰 사고 부상자들이 있는 전남 진도실내체육관을 찾았다(왼쪽 사진).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가 17일 목포한국병원을 방문해 세월호 부상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4년 전 천안함 기억…선거 역풍 우려

이번 사고와 관련해 여권의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이 사실상 바닥을 드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장 대형 재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수습 대책을 총괄하는 중대본이 사고 당일부터 우왕좌왕함으로써 실종자 가족들을 포함한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사고 후 7시간 30분이 넘도록 구조자 숫자는 물론 전체 탑승 인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사고 현장에선 구조 상황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해 실종자 가족들의 원성을 자초했다.

박근혜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개편하고 안전관리본부를 신설했다. 또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을 대폭 개정해 중대본을 명실상부한 재난 대응 총괄·조정 기구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실제 대형 참사가 벌어진 상황에선 이전보다 나아진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국회 안행위 소속 한 새누리당 의원은 “여당 의원인 내가 봐도 울화가 치미는데 국민이나 특히 유가족들이 보기엔 어떻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목되는 건 이 같은 분위기가 지방선거에 미칠 파장이다. 당장은 여당인 새누리당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어 보인다. 박근혜정부의 위기 대처 능력에 대한 비판 여론이 선거 과정에선 새누리당 후보들에게 투영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의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은 “이번 사고는 어린 학생들도 목숨을 잃은 참사라 그 충격이 오래갈 수밖에 없고, 게다가 4년 전 천안함 폭침 때도 경험했지만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라 마무리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미숙한 초기 대응으로 국민적 불신이 커진 상태여서 솔직히 선거만 놓고 보면 악재 중 악재다. 필요하다면 개각을 통해서라도 민심이 더 나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야 정치권에선 이번 참사를 보면서 4년 전인 201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3월26일 터진 천안함 침몰 사건을 떠올리는 이가 적지 않다. 성격은 다르지만 이번에도 지방선거의 판세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 만한 대형 해상 참사가 발생했다는 점에서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진도 여객선 침몰 사고가 올해 지방선거의 판세를 가름할 결정적인 변수가 될 가능성은 상당해 보이지만, 야당도 이를 선거 이슈화하는 데는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4년 전 천안함 침몰 사고 때 이를 안보 이슈로 삼는 등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려던 여당에 결국 자충수가 됐음을 야당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이번 참사가 개각을 포함한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지방선거 판세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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