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 만들면 뭐 하나
  • 윤길주 편집국장 ()
  • 승인 2014.04.30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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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언덕에 학교가 있습니다. 교문 앞 게시판에는 학생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메모지가 빼곡합니다. 누가 놓고 갔는지 조화가 수북합니다. 많은 사람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메모지에 적힌 글들을 읽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앉아서 통곡합니다. 외국인 일행 5명이 눈물을 글썽이며 한참을 있다 떠납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할아버지, 차를 운전하는 아저씨 모두의 얼굴에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4월22일 오후 안산에 다녀왔습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학교 앞에서 만난 학생·조문객, 누구에게도 차마 말을 걸지 못했습니다. 속으로 분노하고 울 뿐이었습니다. 모두 같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안산은 심훈의 소설 <상록수>가 태어난 곳입니다. 이곳에는 최용신기념관이 있습니다. 최용신은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입니다. 기념관 앞 심훈의 문학기념비엔 글 한 대목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침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그 종소리는 저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어두운 귀와 혼몽이 든 잠을 깨워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 울리겠지요….’<상록수 중에서> 그 종소리가 모두의 가슴에 울려 퍼져 희망을 찾게 되길 소망해봅니다.

1995년 6월29일 502명이 사망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터졌습니다. 매일 사고 현장으로 취재를 나갔습니다. 시민 구조대가 죽음을 무릅쓰고 건물 잔해 속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 민간 잠수부들이 생명을 걸고 우리의 아들딸을 찾기 위해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삼풍 사고가 난 지 19년, 세월호 참사는 그때의 데자뷰입니다. 탐욕스러운 오너 일가의 도덕 불감증까지 판박이입니다. 재난이 닥칠 때마다 정부는 위기관리 컨트롤타워를 만들고 매뉴얼을 제작했습니다. 그것들은 다 공무원 서랍 속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박근혜정부 또한 ‘안전 정부’를 표방하며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이름까지 바꿨지만 사고 대응은 미개국 수준이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조직·사람 바꾸고, 매뉴얼 잔뜩 만드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퍼펙트워크>(왕중추, 주신위에 지음)란 책은 디테일을 강조합니다. 책 표지에 ‘1%의 실수는 100%의 실수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습니다. ‘대충대충’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얘기입니다. 세월호 침몰 사고가 그렇습니다. 당국이 여객선 불법 개조를 막았더라면, 화물 과적 여부를 따지고 제대로

묶었더라면, 선원들이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해경 등에서 미적거리지 않고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면, 선장이 도망가지 않고 탑승객을 먼저 탈출시켰더라면…. 최소한 이 중 하나만 지켜졌더라도 이처럼 많은 사람이 희생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 살기 바빴던, 무사안일에 젖은 못된 어른들이 꽃다운 우리 아이들을 차디찬 바다에 잠기게 했습니다.

이들이 매뉴얼이 없어서, 매뉴얼을 몰라서 비극을 부른 게 아닙니다. 매뉴얼대로 실행하지 않은 게 문제입니다. 직업윤리가 없었던 겁니다. 삼류 국가 시스템을 개조하는 것, 꼭 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장 근무자들이 시스템을 실행할 의지가 없다면 이 또한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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