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재난 매뉴얼 2800권 낮잠”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4.04.30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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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권 때 컨트롤타워 역할 행안부로 넘겨…위기관리센터 권한도 축소

“안전한 사회, 유능한 정부, 성숙한 자치. 안전행정부가 함께합니다.” 안전행정부에 전화를 걸면 들을 수 있는 통화 대기음이다. ‘유능’이나 ‘성숙’보다 ‘안전’이 먼저 언급된다. 이처럼 유난히 안전을 강조하는 박근혜정부의 위기관리 시스템이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심각한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사고의 주범은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선원이지만,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 정부도 공범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유가족의 분노는 선장보다 정부를 향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적되는 게 정부의 고장 난 위기관리 시스템이다. 박근혜 대통령조차 세월호 참사 후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부의 위기 대응 시스템과 초동 대처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국민은 묻는다. 정부는 제대로 된 위기 대응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가.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엉망이 된 정부 위기관리 시스템을 파악하기 위해선 과거 사고와 대응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지금의 재난 대책 시스템은 참여정부 및 이명박(MB) 정부의 그것과 상호 연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용욱 해양경찰청 정보수사 국장이 4월19일 오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 공식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시사저널은 참여정부와 MB 정부 시절 재난 관리 분야 관계자들의 증언과 관련 연구보고서 등을 통해 당시 만들어진 위기관리 매뉴얼과 현 정부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대응 시스템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MB 정부 이후 위기 대응 매뉴얼 훈련 끊겨

2010년 11월28일 오후 4시 반. 경북 안동에서 양돈장을 운영하는 김 아무개씨는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상황실에 “구제역으로 의심되는 돼지가 있다”고 신고했다. 다음 날인 29일 오후 2시 검역원은 구제역임을 확인했고 확산을 막기 위한 긴급조치가 필요했다. 구제역은 현장을 오가는 차량에 대한 방역 및 통제 조치가 급선무다. 농림부가 이를 위해 국방부에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국방부장관의 대답은 “노”였다. 결국 두 달이 지난 후에야 군 병력이 투입됐고 돼지 350여 만 마리가 살처분되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참여정부에서 MB 정부로 넘어오면서 2800여 권의 위기 대응 매뉴얼은 사장됐고 청와대의 재난 관리 컨트롤타워 역할이 없어졌다. MB 정부 때의 구제역 사태는 그 폐해를 노골적으로 보여준 결과”라고 류희인 전 청와대 위기관리비서관 및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노무현 정권에서 위기 대응 매뉴얼 작성 과정을 총괄했던 인물이다. 그는 MB 정부에서 일어난 구제역 사태를 예로 들며 위기 대응 매뉴얼과 범부처 차원의 컨트롤타워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위기 대응 매뉴얼이 만들어진 것은 NSC 사무처 창설과 관련이 있다. NSC 사무처는 김대중 전 대통령 집권 첫해인 1998년 3월 신설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기구의 주 업무는 회의에 관한 사무를 주관하는 역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2003년 참여정부 인수위가 꾸려졌고 이때 기존 외교안보수석실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됐다. 통일부·외교부 등 각각 다른 부서에서 파견된 직원들이 대통령의 정책 방향보다는 자기 부처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경향이 짙게 나타난 것이다. 이른바 부처 이기주의였다. 당시 인수위에 참여했던 류 전 차장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실 근무는 길어야 3년이고, 그들은 결국 자기 부처로 돌아가 평생을 일해야 했기 때문에 나왔던 당연한 결과”라고 전했다. 결국 외교안보수석실이 폐지되고 그 역할을 NSC 사무처가 흡수하게 됐다.

NSC 사무처는 기존 외교안보수석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부처가 아닌 기능 중심으로 전략기획실·정책조정실·정보관리실·위기관리센터 등 4개 부서로 꾸려졌다. 이때 만들어진 위기관리센터가 위기관리 시스템과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만들고 재난 및 위기관리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게 됐다. 참여정부 때 NSC 사무처가 재난 관리 역할을 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이 위기관리센터를 지칭하는 것이다. 위기관리센터는 우선 대피소에 불과하던 지하 벙커에 첨단 장비를 갖춘 종합상황실을 만들었다. 경찰청, 소방 당국 등에서 다루는 정보를 실시간 대형 화면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했다. 하드웨어 정비를 마친 위기관리센터는 소프트웨어 정비에 나섰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거론되고 있는 위기 대응 매뉴얼은 이 단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위기관리센터는 재난 등 국가 위기를 33개로 분류하고, 이것들이 평균 9개 부처·기관과 연관된다는 것을 파악했다. 이후 이 자료를 바탕으로 총 2800권의 위기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만들어진 매뉴얼은 상당히 정교했다고 한다. 재난이 터졌을 경우 각 기관이 현장에 출동해 유기적으로 각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돼 있었다는 전언이다. 이뿐만 아니라 훈련을 통해 해당 내용을 각 기관이 체화하도록 했다. 당시 위기관리센터장을 맡았던 류 전 차장은 매뉴얼보다 훈련 과정이 더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아무리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도 책으로만 존재한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위기관리 통합 연습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실제 매뉴얼대로 훈련을 하다 보니 오류가 생겼고 이 부분을 수정해나가며 매뉴얼을 보완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관련 부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체적으로 필요성을 느껴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조치가 아쉽게도 MB 정부 이후 뚝 끊겼다.”

박근혜 대통령이 4월17일 진도실내체육관을 방문해 진도 여객선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 사항을 듣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참여정부 위기관리센터 요원 좌천”

2008년 참여정부에서 MB 정부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위기관리 시스템은 큰 변혁을 맞게 된다. 인수위 때부터 이른바 ‘10년 좌파 정권’(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색깔 지우기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NSC 사무처를 손보는 일이었다. 당시 류 전 차장이 직접 인수위를 찾아가 매뉴얼을 폐기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먹히지 않았다. 위기관리 부문 중 전통 안보 분야를 제외하고 재난 부문에 대한 권한을 모두 당시 행정안전부(지금의 안전행정부)로 이관했다. 2800여 권의 재난 대응 매뉴얼 중 재난 부문에 해당하는 3분의 2가량이 트럭에 실려 행안부로 실려나갔다. 재난 발생 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위기관리센터도 수술 대상이었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국방보좌관실에 몸담았던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솔직히 당시는 ‘노무현이 한 것은 다 안 하겠다’는 분위기였다. 인수위 기간 동안 위기관리센터를 폐지하기로 했는데, 그때 마침 숭례문 화재 사고가 터졌다. 그때를 계기로 살아남긴 했지만 센터장의 급을 낮추고 재난 부문을 모두 행안부가 가져가도록 했다. 위기관리센터 요원들은 하루아침에 좌천돼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교육을 받는 신세가 됐다. 그때 재난 통합 관리 체계가 무너지고 재난 대응 매뉴얼도 사실상 수명을 다하게 된 것이다.”

NSC 사무처는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으로부터 월권을 행사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도 NSC 사무처 권한 축소 내용을 담은 NSC법 개정안에 서명했다. NSC 사무처는 이후 결국 폐지됐다.

진도 세월호 참사 현장에서 해난구조대(SSU) 대원들이 수색 작업을 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청와대가 직접 통제해야 효율적”

MB 정부에서 박근혜정부로 넘어오면서 매뉴얼은 다시 손질 과정을 거친다. 백두산 화산 폭발 등 몇 가지 케이스가 보완돼 3000여 권에 이르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매뉴얼 자체보다 훈련과 체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들은 이미 ‘죽은 매뉴얼’이 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MB 정부 때 폐지됐던 NSC 사무처도 다시 설립됐다. 겉으로 보기엔 과거 NSC가 부활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재난에 대한 컨트롤타워 역할은 못하고 있다. MB 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재난 관리 민간 TF 위원을 맡았던 위험 관리 분야 전문가 정지범 한국행정연구원 행정관리부장의 말이다.

“참여정부 때의 NSC 사무처와 현 정부의 NSC 사무처는 차이가 있다. 노무현 정권 때의 NSC 사무처는 지금과 달리 대통령 직속으로 안보와 함께 부분적으로 재난에 대한 컨트롤타워 기능도 했다. 반면 현재 국가안보실 산하에 있는 NSC 사무처는 철저히 안보 중심이고, 예전보다 (재난 관리 부문에) 전문성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현재의 NSC 사무처는 재난 관리 부문에서 컨트롤타워 역할 자체를 하지 못한다. MB 정부 때 그 역할이 행안부로 모두 넘어가버렸기 때문이다. NSC 상임위원장인 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최근 “국가안보실은 재난 관리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도 위기관리센터가 존재하지만 MB 정부와 현 정부의 손을 거치며 기형적인 형태로 이름만 남았다. 재난 담당 직원이 한 사람뿐이고 실제로 재난 발생 시 컨트롤타워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참여정부의 위기관리센터에는 30명의 직원이 상근하며 위기관리 컨트롤타워 업무를 맡았다.

현재 재난 관리 부문은 모두 안전행정부가 떠맡고 있다. 그러나 재난 분야 특성상 한 부처가 재난에 대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모두 맡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설명이다. 부처 이기주의가 팽배한 상황에서 타 부처 장관과 관계자들 및 군·경이 안행부장관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으로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다. 차관급을 지낸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장관들은 자기 부처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해서는 대통령 앞에서도 싸운다. 때문에 청와대가 직접 통제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각 부처에 ‘청와대가 실시간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경각심을 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가장 많이 지적되는 부분은 군·경·관이 우왕좌왕하고 늑장 대응을 한다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재난 관리를 안행부에 떠맡기는 지금의 방식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세월호 참사를 통해 입증됐다고 강조한다. 만약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에서 대통령이 실시간 현장을 보고 있었다면 이렇게 우왕좌왕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류 전 차장은 “참여정부 때는 해경의 웬만한 배에 달려 있는 카메라는 위기관리상황실에서 실시간 그대로 다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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