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사치한 옷차림에 집안 살림 무너진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
  • 승인 2014.05.0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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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정권 잡은 박정희, 구호와 포스터로 국민 계몽

이승만의 제1공화국은 선동 정치와 부정 선거로 스스로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4·19혁명과 함께 맞이한 제2공화국은 국민의 기대는 높았지만 경제 파탄과 절대 빈곤은 여전했다.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이끄는 일단의 젊은 장교는 1960년 9월 쿠데타를 모의하고 1961년 5월16일 새벽,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육국사관학교 8기생이 중심이 돼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 기관을 점령했다. 그리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해 전권을 장악하면서 반공과 민생고 해결, 민정 이양 등 6개 항의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그 후 대한민국은 세계가 놀랄 만큼 괄목할 만한 경제 성장을 이뤄 절대 빈곤을 퇴치했다는 찬사와 함께  혁명이 아닌 쿠데타로, 경제를 위해 민주화를 희생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등 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다.

이런 평가 이면에는 그가 대중 앞에 섰을 때의 첫인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는 5·16 당일 아침 뒷짐을 진 채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날 아침 햇빛이 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짙은 선글라스가 그의 눈을 가리면서 사람들은 그의 속내를 몰라 매우 답답한 동시에 불안했다. 상대방의 눈을 볼 수 없을 경우 그 사람의 생각이나 관심사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박정희도 혁명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거사에 나서면서 한편으로는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그런 속내를 보이거나 들킨다면 반대 세력이 더욱 거세게 저항할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나약한 모습 또는 속내를 숨기기 위해, 아니면 가차 없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소품이었을 수도 있다.

문맹 시대에 그림은 강력한 선전·선동 수단

민정 이양 이후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선글라스를 벗고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가 혁명 초기부터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군인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던 그때는 국민이 ‘계몽의 대상’이자 깨어나야 할 ‘눈 뜬 장님’이었다. 1961년 1인당 국민소득이 82달러에 불과했지만 취학률은 1959년 전국 학령 아동의 95.3%에 달했다. 하지만 성인이 문제였다. 일제 강점기 2000만 국민 중 80%에 가까운 1600만명이 문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성인 위주의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해 광복 당시 80%에 달했던 문맹률을 22%로 낮췄다. 미 군정 시기(1945~48년)부터 시작된 문맹 퇴치 운동은 5·16 이후 설립된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관한 문맹 퇴치 운동, 대학생들의 농촌 계몽 운동과 함께 계속된다.

당시 국민재건운동본부는 국민들에게 가)용공 중립 사상의 배격, 나)내핍 생활 실천, 다)근면정신 고취, 라)생산 및 건설 의식 증진, 마)국민 도의 앙양, 바)정서관념 순화, 사)국민 체위 향상 등을 주문했다.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에서 진행된 국토 재건 운동, 쥐잡기 운동, 식량증대를 위한 퇴비 증산 운동, 질병 퇴치 운동, 각종 정부시책이 담긴 담화문과 표어, 포스터는 우리 국민을 ‘계몽시키는’ 주요 통치 수단이었다. 

근검절약을 유도하고 사치 풍조를 배척하기 위한 ‘의복 간소화 운동’이 5·16 이후 전개된다. 이 운동의 홍보를 위해 간소복을 입은 여배우가 시가행진을 벌이고 ‘사치한 옷차림에 집안 살림 무너진다’ ‘너도나도 검소한 옷, 새나라 건설’ 등의 구호가 내걸린다. 농사원 교도국에서는 평상복 홍보 리플릿을 만들어 평상복을 만드는 법, 한복과 비교한 평상복의 장점 등을 집중 홍보했다.

이정재 등 정치깡패 소탕 

결핵은 1960년대에는 못 먹어서 생긴 영양부족에 의한 면역결핍이 원인이 되어 발생했다. 그래서 위생과 결핵의 예방과 치료는 심각한 문제였다. 정부는 결핵 퇴치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씰’을 발행해서 결핵퇴치기금을 모금했다. 또 일본뇌염은 손써 볼 틈 없이 죽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그래서 보건사회부는 리플릿을 만들어 일본뇌염의 전염 경로, 증상 등을 소개하고 뇌염 예방을 위해 주변을 소독하고 모기장을 치고 잘 것을 당부했다. 또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국민 체력 향상을 위해 재건체조를 만들고 순서대로 체조 동작과 체조 방법을 설명하는 홍보 리플릿을 만들어 보급했다. 직장과 학교, 가정에서 모든 국민은 시간에 맞춰 체조를 해야 했다.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모든 생활을 일사불란하게 정돈하고자 했다. 따라서 사회악을 선정해 이를 근절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때 이정재 등 정치깡패를 소탕하고 이들을 국토건설단에 배치해 소양강댐 건설과 제주도 5·16도로 건설 등에 투입했다. 이와 함께 ‘명랑한 거리 만들기’와 ‘사회악 제거의 달’을 정했다. 당시 경제나 세금 징수 체계가 빈약했던 탓인지 밀수·마약·탈세·폭력·도벌 등이 5대 사회악으로 지목됐다. 이런 운동이 한창이던 1966년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을 밀수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나라 꼴을 갖춰나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땔감이 부족한 데 따른 도벌로 도처가 민둥산이었다. 나무를 몰래 베는 일은 당연히 사회악에 해당했다. 한편으로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민둥산에 나무를 심는 식목 사업을 국가적으로 전개했다. 이때 주요 사방림으로 아카시아나무와 오리나무, 리기다소나무 등 속성수를 심었다. 당시에는 사방의 날이 있었고 소나무를 고사시키는 송충이를 잡는 것이 학생들의 일과나 방과 후 숙제로 주어지는 등 국가 총동원 체제였고, 국민들도 이를 당연시했다. 

쥐잡기도 범국가적 사업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시·도 단위로 펼쳐지던 쥐잡기 운동에 의해 1970년 1월26일 전국이 동일 시간에 쥐약을 놓아 범국민적으로 쥐를 잡기도 했다. 쥐 잡는 날 전에 홍보물을 만들어 쥐의 종류, 쥐약을 놓는 법, 쥐덫 설치법 등 쥐를 잡는 다양한 방법을 설명했다. 1971년 3월25일 오후 7시 대대적인 2차 쥐잡기 운동이 벌어져 4667만마리를 잡았는데 여기에 투입된 예산만 1억9000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최근 다시 등장한 이도 큰일이었다. 1940년대부터 발진티푸스의 매개체인 이는 골칫거리였다. 지금은 독성 때문에 제조·판매를 금지하고 있는 살충제 DDT는 당시로서는 미군이 건네준 귀한(?) 약이었다. 위생을 위해 재래식 화장실을 위생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알리고 분변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교양하는 포스터도 배부됐다. 저축 장려 운동과 부정 식품 단속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생활을 정부가 간섭하고 ‘지도’했다.

이러한 교화와 집단 운동으로 훈련된 국민이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을 통해 그 역량(?)을 드러냈던 것일까. 이미지란 국민을 계도하고 동원하는 데 중요한 선전·선동의 도구라는 점에서 언제나 유효하다. 하지만 이제 국민 계몽 시대는 지났다. 아직도 이런 계몽주의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이들이 가끔, 아니 자주 눈에 띄니 어찌 된 일일까. 이들은 시간을 거스르는 자들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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