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파도에 집어 삼켜지는 ‘길환영호’
  • 이규대 기자 ·원성윤│허핑턴포스트코리아 뉴스에디& ()
  • 승인 2014.05.21 11:0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실질적 수장은 청와대”…KBS 기자협·노조 사장 퇴진 운동

“유가족들이 실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유가족이어도 KBS 꼴도 보기 싫을 거예요.”

KBS 구성원 가운데 처음으로 세월호 침몰 사고 보도 반성문을 쓴 입사 3년차 38기 기자 중 한 명인 강나루 기자. 그는 5월14일 정오, KBS 본관 민주광장에서 ‘청와대 부역사장 길환영 퇴진’을 주장하는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본부장 권오훈) 총회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강 기자는 “처음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팽목항에서 가족들과 같이 밥도 먹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팽목항에 갈 수가 없었다. 갈 때마다 가족들이 저희를 향해 눈을 흘기는 게 현장에서 바로 느껴졌다. 데스크에서는 그걸 느낄 수 없다”고 전했다.

공영방송 KBS가 침몰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국면에서 잇단 오보와 구설을 낳았던 KBS ‘길환영 체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흔들리고 있다. 청와대가 KBS의 보도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면서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KBS 양대 노조는 파업 찬반투표 등 길환영 사장 퇴진 행동에 본격 돌입할 방침을 천명했다. 급기야 5월16일 KBS 보도본부 부장단 18명 전원이 총사퇴를 표명하며 길 사장을 압박하고 나섰다. 부장단은 성명을 통해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정권과 적극적으로 유착해 KBS 저널리즘을 망친 사람이 어떻게 KBS 사장으로 있겠단 말인가”라며 길 사장의 즉각 퇴진을 촉구했다. ‘세월호 참사 불공정 보도’의 후폭풍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5월9일 길환영 KBS 사장이 김시곤 보도국장의 세월호 참사 관련 발언에 대해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에게 사과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

사건의 발단에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있었다. 김 전 국장은 세월호 참사와 교통사고를 비교한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100여 명은 지난 5월8일 김시곤 국장의 발언과 KBS의 불공정보도에 항의하기 위해 KBS 앞에서 상경 항의 집회를 열었다. 유가족들은 사장 사과와 보도국장 파면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청와대로 향했다. 결국 김시곤 보도국장은 사퇴 의사를 밝히고 길환영 사장은 유가족들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김 전 국장이 사퇴하면서 KBS 보도에 길환영 사장이 “사사건건 개입”했다고 주장하면서 사태는 확산되기 시작했다. 김 전 국장은 5월9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언론에 대한 가치관과 식견도 없이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온 길환영 사장은 즉각 자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같은 날 JTBC와의 인터뷰에서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라며 “권력은 KBS를 지배하려고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정성과 독립성을 생명으로 해야 할 공영방송 사장이 청와대의 지시를 받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내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이 때문에 KBS의 양대 노동조합인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와 KBS 노동조합은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고 길 사장 퇴진 투쟁에 돌입했다. KBS 기자협회도 12일 긴급 총회를 열고 길 사장과 임창건 보도본부장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제작거부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일수 KBS 기자협회장은 “길 사장은 공영방송의 위상을 현격히 추락시켰고 구성원들의 명예를 떨어뜨려 사실상 리더십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장으로 인정하지 못한다”며 “지금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다. 쫓기듯 떠나는 추한 행태를 보이지 말라”고 밝혔다.

KBS 안팎에서 길환영 사장 퇴진 요구가 이어지는 가운데 길 사장과 KBS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길 사장은 김 전 보도국장의 주장과 관련해 KBS본부가 공개질의서를 보냈지만 답변하지 않고 있다. 길 사장의 침묵에는 자진사퇴 거부의 뜻이 담겨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내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김시곤 전 국장이 물러난 뒤 새롭게 임명된 백운기 신임 보도국장 임명에 청와대가 관여한 정황이 포착됐다. KBS 노동조합은 13일 서울 여의도 KBS 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백운기 신임 보도국장이 5월11일 오후 3시쯤 청와대 근처에서 모 인사와 접촉했다”고 폭로했다. KBS 노조가 폭로한 KBS 내부 배차기록부를 보면, 11일 KBS 관용차 ‘탑승자’란에는 ‘백운기’라고 명시돼 있고 ‘행선지’는 ‘청와대’로 기록돼 있다. 관용차의 출발시각은 15시10분, 귀사시각은 16시50분이다. 백 국장이 KBS 관용차를 타고 청와대로 향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백운기 보도국장은 청와대 인근 카페에서 한 시간가량 청와대 인사와 접촉한 뒤 5시쯤 회사로 돌아왔고, 길환영 KBS 사장은 곧바로 부사장 등을 불러 신임 보도국장에 백 국장을 기용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현진 KBS노동조합 비대위 부위원장은 “불과 이틀 전 KBS 사장이 청와대의 하수인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후임 보도국장 인선까지 이렇게 노골적으로 개입했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KBS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방송 장악을 주도한 박준우 정무수석과 이정현 홍보수석을 즉각 해임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라”고 밝혔다.

“백운기 신임 보도국장 임명도 청와대 개입”

KBS 측은 즉각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백 국장의 차량 기록과 인맥이 의혹을 키우고 있다. 알려진 대로 백 국장은 이정현 홍보수석과 광주 살레시오 고등학교 동창생이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13일 논평을 내고 “KBS를 좌지우지하는 실질적인 수장은 여의도동 18번지가 아니라 청와대로 1번지에 있었다”고 성토하며 “길 사장은 ‘청와대의 꼭두각시’였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사태가 불거지자 KBS 기자들이 들고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지난 이명박 정부 이후 6년간 켜켜이 쌓인 불공정·편파 보도에 대한 반성과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재난 주관방송사 KBS가 보여준 보도 행태가 폭발한 것이라고 KBS 기자들은 입을 모은다. KBS는 이번 세월호 참사 보도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울부짖는 현장의 목소리를 담는 데 인색한 모습을 보였다. 일례로 박 대통령과 희생자 가족들의 만남을 보도할 때는 거친 분노와 절규 대신 박수와 함성 소리를 채워 넣었다.

지난해 입사한 40기 KBS 기자들과 윗기수인 39·38기 기자 30여 명이 5월7일 오전 KBS 사내 망에 ‘반성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서 “현장에서 KBS 기자는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뜻의 속어) 중의 기레기”라고 자괴감을 토로했다. “세월호 침몰 다음날 진도 체육관을 찾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실종자 가족들이) 박수를 치는 모습이 방송됐다. (하지만) ‘경사났어? 박수 치고 그래!’라는 실종자의 가족 반응은 편집됐다. 우리 뉴스에선 철저히 외면당한 목소리다.”

유가족들이 지난 8일 보도국장 사퇴와 책임자 사과를 요구하며 여의도 KBS를 항의 방문했지만 당시 길 사장은 이들을 외면했다. 그러나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향하자 그제야 머리를 숙이고 몸을 낮췄다. 그러나 이 과정에도 청와대가 개입했음이 드러났다. 김시곤 전 국장의 사퇴 직후 박준우 정무수석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와 만나 “KBS에 최대한 노력할 것을 요청했고, 그 결과 보도국장이 사의를 표명한 것”이라며 청와대의 개입을 시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KBS의 공영성이 의심받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구설이 잦았다. KBS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서는 이명박 정부를 ‘군사정권 이후 최악의 방송 장악’ 시기로 회자하는 목소리가 팽배하다. 2009년 김인규 사장의 취임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18대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의 참모(방송전략실장)였던 경력 탓에 ‘낙하산’ 논란이 불거졌다. 이후 잇따르는 ‘불공정 친여(親與)보도’ 의혹의 가운데에는 김인규 전 사장이 있었다.

2012년 선임된 이길영 이사장과 길환영 사장 역시 ‘낙하산 인사’라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이사장은 5공 시절 보도국장 등을 역임하고 여당 측 경북도지사 후보의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낸 이력이 논란이 됐다. 길 사장 역시 부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이승만·백선엽 미화 다큐 프로’ ‘이병철 탄생 기념 열린음악회’ 등 KBS의 공정성을 해친다는 논란에 휩싸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KBS 내부 구성원으로부터 88%의 불신임을 얻었음에도 사장에 취임한 것에 대한 반발이 상당했다. 현재 KBS 양대 노조는 길 사장이 취임 후 대선검증보도 결방사태, 명백한 대선 불공정 보도 등 수많은 공정방송 파괴를 자행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지난 2월 민경욱 전 앵커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전격 발탁된 것도 KBS의 독립성에 타격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메인뉴스 앵커 하차 후 불과 4개월밖에 안 된 시기에 정치권의 부름을 받은 것이 논란이 됐기 때문이다. 2003년 KBS 노사가 공동으로 제정한 ‘KBS 윤리강령’에서는 TV 및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는 하차 후 6개월 이내에 정치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공영방송 KBS 이미지’의 사적 허용을 막기 위해서다. 공영방송의 현직 간부(문화부장)로 재직 중인 인사를 정권의 ‘입’으로 끌어들인 점에 대한 비판 여론도 상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KBS 곳곳에 청와대가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수신료의 가치, 감동으로 전합니다.’ KBS가 프로그램 말미에 내보내는 자막 문구다. KBS는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다. 하지만 KBS가 청와대에 장악된 ‘청영방송’이라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공영방송 KBS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많은 시민들이 KBS ‘수신료의 가치’에 의문을 표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진행 중인 ‘KBS 수신료 거부 및 사장 사퇴 요구’ 서명운동 포스터.
의심받는 공영성, 땅에 떨어진 신뢰

이런 상황에서 여권이 밀어붙인 ‘수신료 인상’은 타오르는 반(反)KBS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새누리당은 5월8일 미래창조방송통신위원회 전체회의를 열어 TV수신료를 2500원에서 4000원으로 올리는 안을 상정했다. 법안 상정에 반대한 야당 소속 미방위 의원들은 불참한 상태였다. 세월호 사건 보도가 KBS 안팎의 공정성 논란에 휩싸인 상황에서, 여당이 주도하는 수신료 인상 움직임은 시민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세월호와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세대행동)을 중심으로 KBS 수신료 거부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여론의 질타가 거세지자 KBS는 진화에 나섰다. 세월호 사건 한 달 특집방송으로 진행된 5월15일 9시뉴스를 통해 공식적인 ‘내부 반성’에 나선 것이다. 보도 과정에서 대통령을 부각하고 희생자 가족의 입장을 소홀히 다룬 점, 사고 당일 투입된 구조인력에 대해 정부 발표를 받아쓴 점, 김시곤 전 국장이 길환영 사장 보도 개입을 폭로한 것을 다루지 않은 점 등을 언급하며 반성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정권 차원의 방송 통제 의혹에 대해 청와대와 KBS 사측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