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해 보이는 곳, 속살은 썩었다
  • 하재근│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4.05.21 13: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드라마 <밀회>에서 드러난 예술계 파벌 싸움 서울대 음대 파행 사태와 ‘오버랩’

JTBC 드라마 <밀회>는 처음에 자극적인 불륜 드라마로 널리 알려졌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김희애가 남편의 어린 제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였다. 우아한 이미지의 중년 여배우로 주부의 로망인 김희애와 어린 꽃미남 유아인의 로맨스는 여성 시청자를 자극했다. 특히 김희애와 유아인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격정적으로 치는 장면이 여성 시청자에겐 웬만한 베드신 이상으로 ‘야하게’ 다가가기도 했다.

하지만 연상연하 불륜 멜로는 <밀회>라는 작품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작품은 <하얀 거탑> 안판석 PD의 작품이다. <하얀 거탑>은 상류층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남자 주인공의 욕망을 통해 병원 사회의 파벌 문제 등을 다뤄 한국 최고 드라마라는 찬사를 받았다. <밀회>는 상류층이 되려고 몸부림치는 여자 주인공의 욕망을 통해 음대의 파벌 문제 등을 다뤘다. 멜로 드라마를 빙자한 사회 드라마인 셈이다.

여주인공 김희애는 재벌그룹 예술재단의 실무 책임자로 모두가 선망하는 인물이다. 그는 탁월한 일처리 능력과 예술 감각으로 재단을 이끌고, 그의 남편은 일류 음대의 교수로 탄탄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겉보기만으론 마치 한국 사회의 신귀족인 것 같지만 그 실상은 비참하다.

의 한 장면. ⓒ JTBC 제공
예술의 장막 뒤에서 벌어지는 욕망 난타전

김희애는 사실상 재벌가의 ‘우아한 노비’ 같은 신세다. 회장의 지저분한 여성 문제를 처리해주고, 회장 부인이 점을 치고 투자하는 비자금 계좌를 관리해주고, 회장 딸의 모욕과 구타를 참아가며 1억원 남짓한 수입을 얻는다. 번듯한 집도 외제차도 모두 회장 집안이 임시로 내준 것이다. 남편인 교수는 무능력하고 콤플렉스투성이인 인물로 학장의 비위를 맞추며 오로지 처세에만 열중한다.

작품 속에서 음대는 예술기관이나 교육기관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세속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재단을 통해 회장 부인, 회장 딸 등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거기에 학교 내부의 간부와 교수가 끼어들어 파벌을 형성한다. 어떤 자리가 나면 각각의 파벌이 경제적 혹은 정치적 이유에서 저마다 자기 사람을 심으려 대립하거나 타협한다. 학생 선발도 각 파벌의 이해관계에 의해 정치적으로 결정되며, 제도적인 선발 과정은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실제 선발은 사전에 암암리에 이루어진다.

유일하게 딱 한 사람 김희애와 사랑에 빠지는 유아인만이 파벌의 직접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선발된 ‘순수한’ 학생인데, 이마저도 정치적인 계산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교가 부패 의혹으로 추락할 위기에 처하자 정말로 재능을 지닌 순수한 학생을 상징적으로 한 명 뽑아 부패 의혹을 덮자는 데 모든 파벌이 합의한 것이다. 거기에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김희애의 남편은 재능 있는 학생을 제자로 키움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철저하게 속물적인 욕망의 판 위에서 예술대학이 운영되는 것이다. 

 오직 권력자를 부모로 둔 제자만 교수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다. 교수에게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는 투자분석가의 딸은 학교에 출석하지 않아도 교수가 알아서 학점을 맞춰준다. 심지어 장차 교수가 되도록 키운다는 말까지 나온다. 반면 교수가 사라는 비싼 악기를 못 산 제자는 미운털이 박혀 학교에 열심히 나와도 레슨을 받지 못해 F학점 위기에 처한다. 심지어 고급 악기라며 싸구려 제품을 억대의 돈을 주고 사도록 교수가 학생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제자들은 아무리 부당한 일이 벌어져도 교수 눈치만 볼 뿐 감히 항의 한번 하지 못하는 신세다. 교수에게 찍히면 파벌 구조에서 왕따당해 음악 인생이 끝난다.

서울대 음대 학장 뇌물 상납 형사 입건

 드라마가 음대를 이런 식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 극적 표현이 과도하다거나 학교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비판은 별로 제기되지 않았다. 그 반대로 한국 상류층과 예술대의 실상을 소름끼치게 그려낸 명작이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극 중에서 재벌 딸로 출연한 김혜은은 음대를 나왔는데 최근 한 인터뷰에서 “실제 음대의 상황은 드라마 속에서 묘사된 것보다 심하다. 그런 정의롭지 못한 일들도 내가 음악을 그만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해 작품의 신빙성을 더욱 높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예술대학은 도대체 어떤 상황일까. 최근 서울대 음대 학장이 형사 입건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저소득층 학생 예술교육 지원을 위한 국가 예산의 일부를 공무원에게 상납하는 데 일조했다는 혐의다. 공무원과 짜고 서울대가 관련 지원 사업에 내정되도록 하고 그 대가로 법인카드 등을 건넸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세월호의 선사 청해진해운은 안전연수비로는 연간 54만원을 쓴 반면 접대비로는 6000만원 이상을 썼다고 한다. 평소 선박 안전 검사도 부실하게 진행되는데 그 과정에도 접대가 끼어든다고 한 관련자가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이렇게 접대, 상납, 유착, 마피아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 고질병이 이 나라 최고 예술대학이라는 서울대 음대에서 그대로 나타난 셈이다. <밀회>엔 학내 파벌 문제만 그려질 뿐 공무원과 국가 예산 관련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김혜은이 현실은 더 심하다고 했던 걸까.

이번에 서울대 음대 학장이 비리 의혹을 받은 것이 더욱 충격인 것은 서울대 음대가 이미 파행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대 학장은 그 파행을 수습할 정상화 특별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이었는데 이렇게 정상화 위원까지 추문에 휩싸이는 상황에서 과연 음대 운영이 정상화되겠느냐는 탄식이 나온다.

서울대 음대는 지금 신임 교수 채용이 중단된 상태여서 학생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문제는 2013년 봄에 터졌다. 신임 교수 채용을 놓고 시비가 붙어 채용이 무산된 것이다. 1차 심사를 단 한 명이 통과했는데 그가 받은 일종의 미국 문화아카데미 이수 증서를 박사 학위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과 함께 “사실상 미리 내정됐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내정’이란 단어는 곳곳에 등장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밀회>에선 학생 선발 과정이 요식행위일 뿐 합격생은 파벌들 간의 사전 담합을 통해 ‘내정’되는 것으로 그려졌고, 서울대 음대 학장은 공무원과 짜고 서울대가 정부 지원 사업에 ‘내정’되도록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교수 채용 논란도 내정 의혹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서울대 음대 출신으로 에 출연했던 배우 김혜은이 대학 시절 겪었던 음악계 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 JTBC 제공
‘마피아 짬짜미’ 세월호 참사 원인

지난해 가을 다시 신임 교수를 채용하려 했는데 내정 의혹을 받았던 지원자가 또다시 지원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이번에도 채용은 무산됐고 그 후 계속 논란이 이어지며 지금은 아예 신임 교수 채용을 중단해버렸다. 이른바 한국 최고 대학이라는 곳이 교수를 채용할 능력마저 상실한 것이다. 신임 교수 채용 문제가 이렇게 커진 건 파벌 싸움 때문이다. 한 서울대 성악과 졸업생은 인터뷰에서 “원래부터 파벌이 너무 심해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서로 얘기도 안 하고 그랬다”고 했다. 그런 긴장 관계가 유지되던 차에 최근 잇따라 교수 자리가 비면서 그곳에 자기 라인을 심으려다 보니 파벌 간 전쟁이 터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한 학생이 빨리 교수를 충원해 학교를 정상화시켜달라는 청원서를 내려고 하자 “만약 그 청원서가 학교 인사위원회에 올라갈 경우 너의 음악 인생은 끝난 줄 알라. 아버지까지 잘릴 줄 알라”는 협박전화가 올 정도로 상황이 살벌하다. 이런 와중에 신임 교수 채용 문제를 주도했던 한 교수가 성희롱 의혹, 고액 과외 의혹 등으로 직위해제되면서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처음 신임 교수 지원자의 학위 자격 등 대의명분을 두고 터졌던 문제가 개인 추문으로 이어지며 진흙탕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또 발생한 것이 앞서 언급한 음대 학장의 형사 입건이다.

 성희롱 의혹 등을 받은 교수는 혐의를 부정하고 제자들은 교수가 파벌 싸움의 희생양이라면서 침묵시위를 벌였다.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거리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학생들이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첫째, 정말 교수가 죄가 없고 억울해서일 수도 있고, 둘째, 파벌의 권력 구조상 학생은 무조건 교수를 옹호할 수밖에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얀 거탑>에서도 교수가 위기에 처하자 제자들이 일제히 궐기해 교수를 옹호하는 장면이 나왔다. 예술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는 거의 주종 관계와 다름없다고들 한다. 한 음대 학생은 “교수는 학교에서 거의 왕과도 같아요. 저희는 (관계가) 평생이에요”라고 했고, 이번에 청원서를 내려다가 협박전화를 받은 학생은 “선생님한테 찍히기 시작하면 제 앞길은 없는 거예요”라고 했다고 한다. 마치 조폭과도 같은 수직 패거리 구조에서 학생들이 무조건 지도교수를 편드는 모습이 나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서울대 음대 안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제3자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파벌 싸움이 한국 최고 대학의 운영을 마비시킬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니 <밀회>가 학교를 음험한 정치판처럼 그린 것이 공감을 얻는 것이다. 파벌 의혹은 음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예술계의 일반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고 체육계도 예외는 아니다. 쇼트트랙·유도·권투 등 많은 종목에서 파벌 문제가 나타났고 이 때문에 안현수나 추성훈 같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한국을 떠나기도 했다. 한 태권도 선수의 아버지가 판정에 항의하며 자살한 사건도 있었다. 파벌에 의해 승자가 사전에 ‘내정’됐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번 세월호 사태에선 한국이 ‘마피아 짬짜미’ 사회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끼리끼리 작당해 밀어주고 끌어준다. 직장 선후배 관계로 뭉치고, 고향으로 뭉치고, 출신 학교로 뭉친다. 정부에서 어떤 사업자를 선정해 발표하면 ‘내정’ 의혹이 터지는 일이 부지기수다.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의 2009년 조사에선, 직장인의 80%가 사내 파벌문화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그런 사회에서 문화계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밀회>는 그런 한국 사회의 속살을 드러내보였다. ‘가장 우아해 보이는 곳, 가장 순수해야 할 곳마저 다 똑같이 썩었다’는 진실 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