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바다에서 누가 석유를 파려는가”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4.05.2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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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곳곳에서 중국인 테러 발생…남중국해 영유권 마찰 격화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와 너무 기쁘다.” 5월20일 오후 4시, 873명의 중국인을 태운 ‘쯔징(紫荊)12호’가 하이난다오(海南島) 하이커우(海口) 시 슈잉(秀英) 항에 도착했다. 일부 탑승객은 배에서 내리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이로써 베트남에서 벌어진 반중(反中) 소요 사태를 피해 중국 정부가 자국민을 귀국시킨 대피 작전이 모두 완료됐다. 5월11일부터 베트남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군중 시위로 중국인과 타이완인이 각각 2명씩 사망하고 130여 명이 다쳤다.

중국 정부는 15일부터 전세기를 이용해 자국민을 실어 날랐다. 18일에는 1만톤급의 대형 여객선 5척을 급파했다. 중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2000여 명은 인접국인 캄보디아로 대피했다. 21일까지 본국으로 철수하거나 캄보디아로 넘어간 중국인은 9000명을 넘어섰다.

홍콩에서 동남쪽으로 320㎞ 떨어진 해상에 설치된 중국해양석유총공사 소속 석유시추선 해양석유 981호. ⓒXinhua 연합
타이완·싱가포르·한국 사업장도 피해

금세기 들어 해외에서 일어난 최악의 반중 시위는 5월2일 중국해양석유총공사(CNOOC)가 남중국해 분쟁 도서 중 하나인 시사군도(西沙群島·파라셀 군도)에 원유 시추 시설을 설치하면서 시작됐다. CNOOC의 시추 시설은 10억 달러에 달하는 고가 장비로 심해 굴착이 가능하다. 중국 해사국은 “오는 8월까지 원유를 시추하겠다”며 “타국 선박의 주변 접근을 금지한다”고 선포했다. 해안경비대 감시선, 민간 선박 등 80여 척과 헬기를 동원해 시추 시설 보호에 나섰다.

베트남은 즉각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 이뤄지는 원유 시추가 불법이라며 반발했다. 연안경비대 초계함, 어업지도선 등 20여 척을 현장에 급파해 맞불을 놓았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선박이 충돌해 일부가 파손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중국은 10일과 11일 이틀 동안 전투기까지 발진시켜 베트남 함정을 위협했다. 또한 시설 보호 구역을 종전 5~7㎞에서 10~15㎞로 확장하고 감시선과 선박을 130척으로 늘렸다. 이에 분노한 베트남 민중은 수도 하노이와 남부 호찌민·다낭·후에 등지에서 반중 시위를 벌였다. 시민사회단체가 주도한 시위는 5월13일부터 공단 노동자들이 참여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특히 중남부 지역에서는 시위대가 수백 명씩 몰려다니며 중국 및 타이완 기업에 난입해 노동자들의 파업을 유도하고 시설을 파괴했다.

본래 시위대의 표적은 베트남에 투자한 중국 기업이거나 사업장이었다. 하지만 타이완인과 싱가포르인도 중국인으로 간주되면서 타이완과 싱가포르 업체로 불똥이 튀었다.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한국 기업도 희생양이 됐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타이완 업체로, 무려 224개사가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가 발생한 하띤 성의 철강단지 건설 현장은 타이완 재벌 기업인 포모사 플라스틱이 투자한 곳이다. 건설 공사를 중국 제19야금건설이 하청받아 진행 중이었다.

우리 업체가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주호찌민 한국총영사관과 한인상공인연합회에 따르면, 80여 업체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일부 기업은 피해 규모가 컸다. 의류업체 아펙스는 수출하기 위해 창고에 쌓아두었던 제품을 모두 약탈당하고 공장 기물과 장비가 파괴됐다. 안종화 아펙스 사장은 “상당 기간 정상 조업이 불가능해 재기할 수 없는 상태”라고 밝혔다. 피해를 입은 상당수 업체는 보험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현지 보험사들을 이용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베트남 전역으로 번져가던 시위는 공안 당국이 강경 대응에 나서면서 잦아들었다. 5월17일 응웬 떤 중 베트남 총리는 “애국심의 표현은 정당하지만 폭력 행위는 자제해달라”고 호소했다. 18일 주요 도시에서 예정됐던 시위가 공안 당국의 원천 봉쇄로 무산됐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들은 “중국이 베트남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달라고 촉구하고 있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이번 사태를 촉발한 시사군도는 하이난다오 싼야(三亞)에서 336㎞ 떨어져 있다. 이에 반해 베트남에서는 445㎞ 동쪽에 있어 중국과 가깝다. 시사군도는 20세기 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였다. 프랑스가 축출된 뒤에는 남베트남이 관리했다. 1974년 1월 중국군이 진격해 섬에 주둔해 있던 남베트남군을 쫓아냈다. 시사군도는 가장 큰 섬인 융싱다오(永興島)의 면적이 1.68㎢일 정도로 작고 가치가 없다. 하지만 광대한 EEZ에 막대한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다.

중국은 1988년 싼야에서 무려 1000㎞나 떨어진 난사군도(南沙群島·스프래틀리 군도)에도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비록 베트남 함정 2척이 침몰하고 병사 70여 명이 숨지는 등 중국의 승리로 끝났지만 동남아 국가들이 중국에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시사군도는 중국이 실질 지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난사군도는 베트남 29개, 중국 9개, 필리핀 9개, 말레이시아 5개 등 6개국이 각기 다른 섬을 점유하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중국과 베트남은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영유권 분쟁을 벌여왔다. 베트남 정부는 “이번 시위로 인해 중국이 입은 피해는 보상하겠다”고 밝히면서도 영유권과 관련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일 쯔엉 떤 상 베트남 국가주석은 현지를 방문한 일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에게 “독립국가연합(CIS) 회원국들이 남중국해 문제에서 베트남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중-월 갈등 커질수록 가까워지는 미-월

베트남은 아세안 회원국과의 공조도 굳게 다지고 있다. 5월2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동아시아 지역 포럼에서 응웬 떤 중 베트남 총리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국제사회가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응웬 떤 중 총리는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과 만나 공조 방안을 협의하기도 했다. 필리핀은 츠과자오(赤瓜礁·존슨 산호초) 등 일부 도서를 둘러싸고 중국과 분쟁을 벌이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을 끌어들인 것은 가장 큰 외교적 성과다. 5월13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과의 전화통화에서 “중국이 시사군도에 원유 시추 시설과 정부 소유 선박을 보낸 것은 도발 행위”라며 “남중국해 사태에 강한 우려를 표명한다”고 말했다. 이에 왕 부장은 “미국은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지켜라”고 맞받아치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미국은 최근 베트남과 군사 교류를 강화하고 있다. 3월에는 허버트 칼리슬 미국 태평양공군사령부 사령관이 하노이를 방문해 도 바 띠 베트남 참모총장과 만나 다각적인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4월에는 구축함·구조수색선 등 7함대 소속 함정이 베트남 다낭에 입항해 닷새간 군사 교류 활동을 펼쳤다. 미군은 베트남 3군구 해군사령부 함정과 합동훈련을 실시하고 수색 구조,  재해 대응, 함정 정비 등의 노하우와 경험을 교환했다.

베트남이 무력을 사용해 중국의 원유 시추를 저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중국은 베트남의 최대 무역 파트너로 경제적 의존도가 높다. 베트남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과의 무역 규모는 전년보다 22% 증가한 502억 달러에 달했다. 대중국 수출액은 132억 달러, 수입액은 369억 달러로 전체 비중의 10%와 28%를 각각 차지했다. 더구나 이번 소요 사태로 베트남에서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 일부 타이완 기업인들은 집단 철수론을 제기하며 제3국으로의 공장 이전을 타진하고 있다.

사상자가 발생한 포모사 플라스틱은 전체 사업비가 200억 달러에 달하는 베트남 사상 최대의 외자 프로젝트였다. 베트남 대외 수출에서 외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64%에 달한다. 만약 외국 기업이 떠나거나 신규 투자를 중단할 경우, 베트남 경제는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베트남 정부는 한국·중국·타이완 등 주재 대사관 측에 깊은 유감과 사과의 뜻을 전달했다. 세금 감면, 우대금리 대출 등의 방법으로 피해 기업에 배상하겠다고 밝혔다. 5월19일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은 신임 중국대사를 접견하면서 “베트남은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며 “포괄적 협력 관계를 맺자”고 강조했다. 그러나 양국 간에 갈등의 골이 워낙 깊은 데다, 베트남인들의 반중 감정이 뼛속까지 사무쳐 있어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은 더욱 가열될 전망이다.


2000년간 침략에 시달린 베트남 저항사 


베트남과 중국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지난 수십 년간 분쟁과 화해를 거듭해왔다. 1975년 미군을 쫓아내고 통일을 달성한 베트남은 남베트남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화교 20만명을 강제 추방했다. 1978년 소련과 우호협력 조약을 맺고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중국과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의 관계가 불편한 데다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을 후원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작은 친구가 말을 안 들으면 엉덩이를 때려야 한다”며 베트남을 침공했다. 1979년 2월 중국은 보병 20만명, 탱크 200여 대, 항공기 170여 대를 앞세워 베트남 국경 지역 26곳을 넘어갔다. 중국군은 도시 5곳을 점령했지만, 17일 만에 돌연 승리를 선언하며 부대를 철수시켰다. 공식 사망자만 베트남군 8000명, 중국군 1만3000명에 달하는 중국의 명백한 패배였다. 더군다나 베트남은 정규군이 아닌 변경수비대와 민병대 10만명으로 중국군을 막아냈다.

1980년대 초 베트남은 중국에 이어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1988년 시사군도에서 중국과 해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이듬해 캄보디아에서 철군하며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1991년 도므어이 당 서기장과 보 반 키엣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정상화 이후 중월전쟁의 전장이었던 베트남 랑썬과 중국 요이관(友誼關)은 하루 수천 명의 보따리상이 왕래하는 무역 교류지로 변했다.

돈독해지는 경제 분야와 달리 양국의 정치·외교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시사ㆍ난사군도를 둘러싼 영유권과 육지 국경 분쟁이 핵심 사안이었다. 육지 국경은 오랜 반목 끝에 1999년 획정 조약을 맺고, 2009년 양국 역사상 최초로 국경선을 확정했다. 이에 반해 영유권 분쟁에서는 한 치의 양보 없는 충돌이 계속됐다. 2011년 6월 중국 함정이 베트남 석유가스개발공사 시추선의 케이블을 절단하고 베트남 어선에 사격을 가하면서 양국 관계가 수개월간 냉각됐다. 이번 소요 사태도 양국 간에 장기간 찬물을 끼얹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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