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의 습격 “EU를 파괴하라”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6.0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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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EU 극우주의자와 유로 회의론자 급부상한 유럽의회 선거

투표함이 열리자 탄식이 터져나왔다. 5월25일, 이탈리아를 마지막으로 나흘간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가 막을 내렸다. 5년에 한 번, 모든 유럽연합(EU) 회원국 시민이 751명의 유럽의원을 직접 뽑는 중요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213개 의석을 가져간 중도 우파 성향의 국민당그룹(EPP)이었다. 그러나 반쪽짜리 승리였다. 2009년에 비해 의석수가 52개나 줄어들었다. 중도 좌파 사회당그룹(S&D)은 지난 선거에 비해 소폭 증가한 189개 의석을 얻어 2위 자리를 지켰지만 역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유럽의회의 문을 열어젖힌 불청객의 기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 불청객의 이름은 ‘반(反)EU’, 그들의 목표는 ‘EU 해체’다.

“프랑스 정치권에 지진이 일어났다”

유럽인들은 EU에 불만이 많다. 이주민 문제, 문화적 정체성 같은 굵직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일상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이없는 규제들이 EU를 향해 냉소하게 만든다. 1988년 발효된 1677·88호 규정이 상징적이다. 복잡한 규정 번호를 모르는 유럽인들도 ‘오이 규정’ 한마디면 대번 실소를 터뜨린다. 이 규정은 EU가 정한 최상품 오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EU가 정한 최상품 오이는? ‘모양이 좋고 실용적으로 곧은 모양이어야 하며 굽은 정도는 10cm당 최고 10㎜를 넘어선 안 된다’고 적시했다. 이 규정은 2009년에 폐기됐지만, 여전히 EU의 불합리성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오이 규정이 품질 기준으로 적용되면서 자연 상태에서 이리저리 굽고 뒤틀리기 마련인 멀쩡한 오이는 소비자의 외면을 받고 폐기됐다.

영국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1위로 도약한 극우 성향의 영국독립당(Ukip) 당수 나이젤 패러지(왼쪽 두 번째)가 5월26일(현지 시간) 선거결과를 전해듣고 당원들과 환호하고 있다. ⓒ AP 연합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 쓰이는 고무젖꼭지용 줄에 관한 안전규정(DIN EN 12586)도 비슷한 경우다. 고무젖꼭지 하나를 위해 무려 A4용지 52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규정을 정했고 이는 현재 28개 회원국에서 효력을 발휘 중이다. 그런데 사실 유아가 고무젖꼭지용 줄로 인해 사고를 당한 사례는 아직까지 보고된 바가 없다. 이렇다 보니 시민들뿐 아니라 EU에서 일하는 유럽의 엘리트들 역시 자괴감에 빠진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EU본부 인턴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석 달간 온 힘을 다해 일을 해 수백 쪽 분량의 보고서를 만들면 EU 규정에 한 줄 반영될까 말까다. 솔직히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선거에서 반EU 정당의 첫 출발은 좋지 않았다. 5월22일 유럽 국가들 중 가장 앞서서 선거를 치른 네덜란드에서 헤이르트 빌더스(자유당 당수)가 예상 밖의 부진을 보였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극우파 자유당(PVV)은 2009년에 비해 4%가량 떨어진 13.2%의 득표율을 기록해 유럽의회에 4명의 의원을 보내는 데 그쳤다. 그는 지난해 11월 마린 르펜 프랑스 국민전선(FN) 대표와 만나 “EU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하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처럼 과격한 행보는 오히려 유권자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노동당 산하 정책연구소인 비아르디 벡만 재단의 르네 쿠페르스는 “평범한 네덜란드 유권자에게 빌더스의 EU 및 유로존 탈퇴, 국경 폐쇄 등은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들렸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군소 정당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일부 유권자도 있지만 기성 정당에 보내는 경고장의 의미로 표를 던지는 이도 많기 때문이다.

메르켈 탓으로 선거 패배 돌리는 올랑드

그러나 빌더스의 파트너 르펜은 극단적인 반EU 전략으로 프랑스에서 대승을 거뒀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전선이 25%의 득표율을 올려 21%를 획득한 보수 성향의 대중운동연합(UMP)과 사회당(SZ)을 제치고 제1당이 되는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할당된 74개 의석 중 24개가 FN 몫이 되었다. 마뉘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이를 두고 “프랑스 정치권에 벌어진 지진”이라고 표현했다. FN의 득표율이 불과 5년 만에 20% 가까이 올랐기 때문이다. FN의 유럽의회 선거 승리가 지니는 의미는 단순히 득표 수만으로 따질 수 없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개혁 정책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주도하는 재정 긴축 역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선거 직후부터 르펜은 올랑드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선거 당일 저녁에 “현 국회는 대표성을 잃었다”며 국회 해산을 요구한 데 이어, 이틀 후 BFMTV와의 인터뷰에서는 “올랑드 현 대통령은 모든 정당성을 잃어버렸다”며 간접적으로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르펜은 “내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한 발짝 더 나갔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여론조사 기관인 IPSOS의 투표 행동 분석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의 35세 이하 유권자 중 30%가 FN을 뽑았다. 반면 사회당을 뽑은 비율은 15%에 그쳤다. “FN은 프랑스 청년의 제1당”이라는 르펜의 발언이 사실로 확인된 셈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회당의 핵심 지지층마저 FN에 빼앗긴 것이다. 프랑스의 노동자와 일용직 각각 48%와 38%가 FN에 표를 던졌다. 사회당에는 고작 8%와 16%만이 표를 준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정치판에서 르펜은 ‘체크메이트’를 외치며 단숨에 ‘킹’의 목숨을 노리는 ‘퀸’의 자리에 등극한 셈이다.

패장 올랑드는 유럽 정치의 방향 전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EU는 긴축 정책 대신 성장·고용·투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며 메르켈 독일 총리가 주도하는 유럽의 긴축 정책을 선거 패배 원인으로 돌렸다. 이것은 프랑스인들의 정서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선거 당일 르몽드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분명해진다. 프랑스 국민의 52%는 “국내 경제 위기가 EU로 인해 더욱 악화됐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르펜도 공공연히 ‘메르켈의 유럽’이라는 표현을 쓰며 독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해묵은 적대감을 부추겨왔다. 이번 유럽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엔 “EU의 정치 중심이 (독일에서)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고까지 말했다. 또 다른 ‘퀸’ 메르켈을 체스판 위로 불러내려는 발언이다.

이번 선거는 영국에도 커다란 충격을 줬다. 이른바 ‘브릭싯(Brixit)’이라 불리는 영국의 EU 탈퇴가 현실화될 위험성이 커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보수당)는 지난해 초 “2017년에 EU 회원국으로 남을지 여부를 국민투표로 결정하겠다”며 EU 탈퇴론에 불을 붙였다. EU를 탈퇴하면 분담금 부담이 줄어들고, EU의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올해 초에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인에 대한 EU 내 취업 이주 제한이 풀리자 “영국의 복지 혜택을 노린 빈곤층 이민을 막아야 한다”며 외국인에 대한 복지 차별 정책을 노골적으로 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번 선거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은 보수당이 아닌 영국독립당(Ukip)이었다. 나이젤 패러지가 이끄는 Ukip은 27%의 득표율을 기록해 영국에 할당된 73개의 유럽의회 의석 중 무려 24개를 가져갔다. 영국에서 양대 정당인 보수당과 노동당을 제치고 제3당이 1위를 차지한 것은 1906년 보통선거가 실시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섣부른 EU 위기론에 제동 거는 목소리도

반EU 정당이 유럽의회에 진출한다고 해서 EU가 당장 안에서부터 무너질 가능성은 작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유럽의회 내에서 이들은 소수다. EU에 반대하는 각국 정치인들이 정치 그룹을 결성하고 목소리를 높여도 실제 영향력은 미미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두 번째로 유럽의회는 보통의 의회와 달리 권한이 적다. 28개국 각료와 외교안보 정책 대표가 모인 유럽 이사회나 집행위원회가 여전히 유럽 시민들의 투표로 선출된 유럽의회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유럽의회에 진출한 반EU 정당들은 시시포스와 같다. 그나마 시시포스의 돌은 굴러가기라도 했지만 유럽의회는 어디서 회의를 개최할지조차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는 곳”(독일 차이트 온라인)이라며 섣부른 EU 위기론에 제동을 걸었다. 시시포스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로 영원히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간 바위는 곧 반대편 골짜기로 굴러 내려간다. 권한도 적은 유럽의회에서 소수 그룹이 일대 변혁을 일으키기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유럽 각 국가들이 필연적으로 정치의 방향을 새로 정립해야 할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하다. 기성 정치권을 향한 시민의 불신과 EU의 긴축 재정에 대한 불만이 더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당장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엉거주춤 유로 회의주의(euroskeptic)를 차용하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다. 선거를 통해 항의의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은 기왕이면 ‘오리지널’을 뽑기 때문이다. 독일 기독사회연맹(CSU)이 단적인 예다. 어설프게 독일대안당(AfD)을 모방하던 CSU는 이번 선거에서 지지율이 7.6%나 떨어졌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 역시 노동당 내부에서 퍼지고 있는 유로 회의주의를 겨냥하며 “Ukip의 반EU 기조나 반이민 기조를 따라간다면 지지자들을 혼란케 하고 어떠한 지지도 더 이끌어낼 수 없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이뿐만 아니라 이는 결국 EU의 자기 부정과 해체를 초래한다.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은 선거 일주일 전에 부랴부랴 솅겐 조약(유럽 국가 간 무비자 출입국을 가능하게 한 조약) 무효화 등을 담은 백서를 내놓았다. 자신이 소속된 정당 대중운동연합(UMP)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마지막 안간힘을 다했지만 “프랑스의 전직 대통령이 극우 정당의 공약집을 베꼈다”는 비아냥거림만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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