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돈에 파리의 자존심 팔려나가다
  • 최정민│프랑스 통신원 ()
  • 승인 2014.06.03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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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해’ 작품전 열린 루브르와 베르사유,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파리 남서쪽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건물. 아마도 프랑스의 문화 유적 중 가장 화려한 곳은 베르사유 궁전일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전인 이곳은 절대 왕정을 확립한 루이 14세가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정원 설계사였던 앙드레 르 노트르와 함께 만든 걸작이다. 그만큼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명한 건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리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15유로(약 2만원)만 내면 궁전 내부를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고, 두툼한 수표책이 있다면 하루 동안 궁전의 아름다운 방을 통째로 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는 할리우드 스타의 결혼식으로 잠깐 시끄러웠다. 5월24일 모델이자 영화배우인 킴 카다시안은 유명 래퍼인 카니예 웨스트와 결혼했다. 이탈리아 피렌체 인근의 궁전에서 열렸는데 전날인 23일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결혼식 전야제가 열렸다. 결혼 전부터 ‘100계단’으로 유명한 오랑주리 궁을 빌릴 것이라는 뉴스가 쏟아졌는데, 당시 연예 매체들은 임대료만 7만 유로(약 9700만원)에 달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12년 9월18일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왼쪽에서 두 번째)이 앙리 루아레트 당시 루브르 박물관장(맨 왼쪽)과 함께 새로 연 루브르 이슬람관을 둘러보고 있다. ⓒ AP 연합
프랑스 문화예술의 자존심이 자본의 논리에 영락없이 팔려나가고 있다. 베르사유뿐만이 아니다. 프랑스가 전 세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루브르 박물관조차도 돈과 연줄만 있으면 얼마든지 전시가 가능하다. 경력이나 학계의 인정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주최 측에서 찬사를 곁들인 비평을 늘어놓으며 알아서 준비해준다. 이렇게 전시를 연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해’, 바로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사진전이다.

베르사유 관장이 눈여겨본 유병언 후원금

아해의 전시회는 프랑스의 예술계가 어떻게 자본에 종속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아해의 전시를 유치했던 앙리 루아레트 전 루브르 박물관장은 인터뷰에서 “아해의 작품을 통해 자연을 배웠다”고 언급하며 극찬했다. 심지어 전시회 오프닝 행사장에 유 전 회장이 나타나지 않은 것에서조차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아해의 행보는 베르사유까지 접수한다. 경로는 간단했다. 아해의 루브르 전시회 오프닝 행사를 지켜본 카트린 페가르 베르사유 관장이 그를 모시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베르사유의 관장은 아해의 작품이 아니라 루아레트 관장이 따낸 아해의 후원금에 감명을 받았다. 2012년 공개된 루브르의 후원금 내역을 보면 아해는 루브르에 110만 유로(약 15억3000만원), 베르사유에는 140만 유로(약 19억4600만원)를 기부했다. 프랑스 문화예술 심장부 두 수장의 철학은 모두 후원금 유치로 향하고 있었다.

앙리 루아레트의 이력은 화려하다. 2001년부터 2013년까지 13년간 루브르 박물관장을 역임했다. 그 사이 루브르는 연간 관람객 1000만명이라는 새 기록을 세웠다. 에펠 탑(연간 750만명)을 누르고 세계 1위 유료 관람객 유치 명소가 됐다. 랑스에는 루브르 분관을 건립했고, 첫 해외 분관인 아부다비의 개관도 곧 이뤄진다. 2012년에는 루브르 내에 이슬람관을 개관하기도 했다. 이런 장부상의 성공 뒤에는 무수한 논란이 뒤따랐다. 아부다비 분관을 두고 ‘문화재의 상업화’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랑스 분관에서는 사고도 있었다. 전시를 위해 랑스로 보내진 들라쿠르아의 미술 작품이 한 관람객의 손에 훼손되는 일이 발생했다.

페가르 베르사유 관장도 루아레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녀의 취임 때부터 말이 많았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사르코지의 자문위원 출신이었고 정통 우파 주간지인 ‘르푸앙’의 정치 기자로 잔뼈가 굵은 그가 문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전임 관장이었던 장 자크 아야공도 정치권에서 끌어온 인물이지만, 그래도 그는 문화장관 출신이었고, 프랑스의 대부호인 피노가 베니스에 미술관을 건립할 때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문화예술에 정통한 인사였다. 문외한이라는 비판을 줄기차게 받았지만 페가르는 강한 맷집으로 버티며 베르사유의 관장 자리를 꿰찼다. 영락없는 낙하산이었던 셈이다.

그의 이력은 베르사유 운영에 그대로 반영됐다. 예를 들어 아해의 전시를 두고도 기자 출신의 관록을 한껏 발휘하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베르사유의 각종 특별관들은 현재 임대 예약 접수를 받고 있는데 7000유로에서 7만 유로까지 상품도 다양하다. 베르사유 지역 일간지인 ‘코트이블린’이 “베르사유에서 결혼하고 싶다면 트윙고(르노의 소형차) 한 대면 충분하다”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베르사유는 상품이 됐다.

프랑스, 그것도 파리의 문화 유적이 정치 행사의 들러리가 되는 경우도 다반사다. 최근 프랑스를 방문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환영한 자리는 나폴레옹의 무덤인 앵발리드와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만찬과 오페라는 덤이었다. 시진핑 주석이 프랑스에서 사인하고 간 계약 규모는 180억 유로(약 25조200억원)였을 만큼 그는 귀한 손님이었다.

폐쇄적이고 권력과 밀착된 인사가 문제

외국 정치인 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인들도 문화 유적을 애용한다. 이민자 출신으로 법무장관에 올라 화제가 되었던 라시다 다티 전 장관은 재직 시절 자신의 자선단체를 발족시키며 앵발리드에서 디너쇼를 열었다. 파리의 호사가들 입에서는 “자선단체의 성공이라기보다는 라시다 장관이 파리 사교계 데뷔에 성공한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박물관이 정치 행사의 시녀로 전락했던 가장 극적인 사례는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카다피가 프랑스에 왔을 때다. 2007년 프랑스를 찾은 카다피는 오전에는 엘리제 궁에서 100억 유로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후 같은 날 오후 홀로 루브르를 방문해 <모나리자>를 감상했다. 일반 관광객은 영문도 모른 채 2시간 동안 통제를 받아야 했고 그러는 사이 독재자는 홀로 거장들의 작품을 유유히 음미할 수 있었다.

문화예술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정치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인사권과 관련된다. 프랑스 문화예술 관련 기관의 수장을 뽑는 절차와 방식은 철저히 폐쇄적이며, 권력과 가까운 인사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지난해 루아레트가 물러난 후 차기 루브르 관장 물망에 올랐던 인물 중에는 릴 시장인 마틴 오브리 전 사회당 당수까지 포함됐을 정도다. 프랑스의 대형 박물관과 권력의 밀착은 전 방위적이다. 케 브랑리 원시미술관, 퐁피두센터 그리고 베르사유와 쌍두마차를 이루는 퐁텐블로 성 등을 관리하는 수장들은 예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대부분 프랑스 국립행정학교(ENA) 출신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 보니 프랑스 출신의 큐레이터가 오히려 다른 나라로 떠나는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난다. 외국의 전문가를 끌어오지도 못하고 자국의 전문가마저 지키지 못하는 게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현실이다.

프랑스 문화예술계는 의외로 우리와 가깝다. 내년은 한국과 프랑스 문화 교류의 해이고 이미 내년 3월 파리의 중심부에 위치한 그랑팔레에서 열리는 ‘아트 파리’의 주빈국은 한국으로 내정돼 있다. 한국-프랑스 문화예술계의 움직임이 벌써부터 분주한 시기에 눈길을 끄는 점 한 가지는 프랑스 측 집행위원장이 바로 아해를 루브르에 데뷔시킨 앙리 루아레트 전 루브르 관장이라는 사실이다. 경력과 도덕성보다 ‘돈’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그가 어떤 교류를 보여줄지 눈여겨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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