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주석궁, 엔화의 유혹은 달콤했다
  • 진희관│인제대 통일학연구소 소장 ()
  • 승인 2014.06.1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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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손 덥석 잡은 김정은…과거사 배상금 80억 달러 눈독

북한이 일본과 수교를 전제로 정부 당국자 간 합의를 이끌어냈다. 동북아는 물론 우리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리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것은 김정은 정권의 대일 외교 노선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갑작스러운 변수에 의해 변화가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목적하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과 약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합의 내용을 보면, 북한은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진지한 협의를 진행하였다”(조선중앙통신 5월30일자)라고 밝히고, 우선 양측이 과거의 유해 및 납치자 문제 등에 대해 밝혀나가고, 이를 위해 북측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수시로 일본 측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진행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평안북도 소재 군수공장으로 알려진 ‘허철용 동무가 사업하는 기계공장’을 시찰했다고 5월27일 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더 이상의 납치자는 없다는 종래의 입장을 번복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2002년과 2004년 두 차례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납치자 문제는 해결된 것이라는 입장을 고집해왔다. 2002년 9월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가 방북했을 때 처음 일본인 납치 사실을 인정했고, 납치 피해자 5명이 일본으로 돌아왔다. 또 2004년 5월 고이즈미 총리의 2차 방북을 계기로 이미 귀국한 피해자의 가족들도 귀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가 모두 17명이라며 나머지 12명의 송환을 요구해왔고, 이에 대해 북한은 일본이 거론한 12명이 이미 사망하거나 북한에 입국한 적이 없다고 맞섰다. 북한이 이러한 종래의 입장을 번복한 것이며, 이번 합의문 내용에는 실질적으로 일본인 납치 피해자에 대해 재조사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 지난해 5월 이후 아베 실명 비난 끊겨

그렇다면 김정은 정권의 북한은 왜 이처럼 입장 변화를 하게 되었을까. 우선 2002년 9월 김정일 위원장이 처음으로 납치 문제를 인정하고 사과했던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당시 세계 여론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왜냐하면 북한이 과거의 납치 사실을 인정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최고지도자인 김정일의 입을 통해서 잘못을 시인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과거 맹동주의자들의 오류’라고 인정하며 사과하고, 북·일 양국은 이 문제를 포함해서 여러 현안들을 합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북·일 관계는 2004년 12월 요코다 메구미라는 납치자의 유골반환과 검시 과정에서 ‘가짜 유골론’이 불거지면서 악화일로를 치닫고 말았다. 아무튼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이 부정해오던 납치자 문제를 인정하는 큰 변화를 보인 바 있고, 이것이 최초의 북·일 정상회담과 북·일 평양선언의 발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 역시 종래의 입장을 번복하는 것이 어려운 일만은 아니라는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납치자는 없다는 입장에서 변화해 ‘전면적’인 조사를 진행할 것이며, 이를 즉시 일본 측에 통보하고 귀국시키겠다는 입장을 공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2002년 김정일의 ‘시인과 사과’가 상당한 놀라움을 주었다면, 2014년에 보인 종래의 입장 변화 역시 대단히 진일보한 결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북한은 북·일 평양선언을 지속하게 되고, 2006년 9월 핵실험 이후 일본에 의해 취해진 경제 제재 조치 해제 및 인적 왕래·송금(재일동포) 등의 제한이 풀리는 이득을 얻게 되었다. 여기에다 덤으로 일본으로부터의 인도적 지원도 확보하게 되었다. 특히 북·일 평양선언 당시 비공개적으로 합의했다고 알려진 과거사에 대한 배상금 규모가 80억 달러에 이르며, 따라서 이 선언이 속개될 경우 배상금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최근 재일총련 중앙본부 건물이 경매로 팔리게 된 것에 재일총련 측과 북한 측의 반발이 거세며, 따라서 이에 대한 삭감 또는 협의의 여지가 있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배상 규모와 방식 등에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으리라는 전망이다. 그럼에도 북한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제적 재화는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북·일 간의 합의는 1년 전인 지난해 5월14~17일 이지마 이사오(飯島勳) 관방참여의 방북으로 촉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의 갑작스러운 방북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방북 이후 북한 관영 매체의 변화는 더더욱 놀라운 일이었다. 이지마의 방북 이전까지 조선중앙통신은 아베 총리 임기 6개월 동안 27건에 이르는 기사를 통해 아베 실명을 거명하면서 “군국주의 극우익 광신자”(민주조선), “도덕적 저렬성”(조선중앙통신)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맹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그러나 이지마 관방참여의 방북 이후 6개월을 조사해보면, 이 동안에는 단 세 건의 기사에서 아베 총리의 실명을 거명할 뿐이며, 이 역시도 외신의 단순 인용에 불과하다. 이는 이지마 관방참여의 방북에서 양국 간 중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예측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지마 관방참여가 지난해 10월에도 중국 다롄(大連)에서 북한 측과 비밀 접촉을 가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본 언론을 통해 제기된 바 있어, 올해 북·일 간 당국자 대화에서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예견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북·일 간 합의는 지난해 5월 이지마 관방참여의 제안이 1년 만에 공식 합의에 이르게 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게 맞을 것이다.

5월30일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일 정부 간 협상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북한의 송일호 북일국교정상화교섭 담당대사. ⓒ 연합뉴스
김정일 시대 ‘북·일 합의’ 대 이어 실행

이는 김정은 정권의 대일 노선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란 전망이다. 선대 김정일 위원장의 합의를 ‘대를 이어’ 실행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며, 이를 김정일이 생존 시에 유훈으로 남겼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일본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이 확보될 수 있다면 북한이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북·일 평양선언이 있고 나서부터 12년 동안 북한이 단 한 차례도 선언의 폐기를 언급한 적이 없다는 점 또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2004년 12월 불거진 ‘가짜 유골’ 사건으로 최악의 관계에 빠졌을 때도 북한은 북·일 평양선언의 폐기를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폐기할 수 있다”는 정도의 표현만 유지해왔다. 이것은 이 선언이 실행되면 북한에 상당한 득이 될 수 있는 절실한 문제라는 점을 알게 해준다.

최근 북한 김정은 정권은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12년 출범 당시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과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 겹치면서 대외적으로 초강수를 던진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만, 2013년 2월 핵실험 이후부터는 대외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다. 이지마의 방북도 그렇고, 그 직후 남북 간에도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 바 있으며, 미국의 농구 스타를 초청하는 모습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이는 김정은 시대의 대외 관계에 대한 방향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뭔가 해보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다. 여전히 핵문제를 포함한 몇 가지 걸림돌이 있기는 하지만, 북·일 수교 교섭은 한반도와 동북아 변화의 진원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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