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군 장군, ‘돈 싸움’에 구천 떠돈다
  • 정락인 객원기자 (pressfree7@hanmail.net)
  • 승인 2014.06.11 13:5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96년 일본에서 유골 봉환 후 18년 방치…지자체·동학단체, ‘예산 타령’만

전북 전주시 효자동 ‘전주 역사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있는 동학군 장군 유골이 올해 안으로 안장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년 만이며, 이 유골이 국내로 봉환된 지 18년 만이다. 안장지는 정읍시 덕천면에 있는 ‘황토현 전적지’가 유력하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곳이다.

동학군 장군 유골은 지금까지 18년 동안 방치돼 있었다. 그 이면에는 지방자치단체와 동학단체들이 정부 예산을 타내기 위한 꼼수가 있었다. 동학단체들은 그동안 “왜 유골을 안장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사업 운영이 어렵다” “예산이 없다” “예산 신청을 했지만 반영이 안 됐다” 등의 말을 되풀이했다. 안장할 돈이 없어 안장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는 볼멘소리만 했던 것이다. 시사저널은 2012년 8월27일자에서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방치된 동학군 장군 유골의 실상’을 보도한 바 있다. 당시에도 동학단체들은 예산 타령만 했다.

지난 5월31일 동학농민군 전주 입성일에 열린 동학군 장군 유골 안장 촉구대회. ⓒ 정락인 제공
유골 안장 예산 반영 안 되면 ‘나 몰라라’

과연 돈이 없어서 안장을 못 한 것일까. 동학군 장군 유골은 1995년 7월25일 일본 홋카이도 대학 인류학교실의 옛 표본고에서 처음 발견됐다. 헌 신문지에 싸인 종이 상자 안에 여섯 구의 머리 유골이 있었는데, 다섯 구는 일본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것이었고, 한 구가 동학군 대장의 유골이었다. 유골 표면에 붓글씨로 ‘조선 동학당 수괴의 수급. 1909년 사토 마사지로로부터’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에 식별이 가능했다. 유골 속에는 ‘1906년 9월20일, 전라남도 진도에서 채집했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이런 사실이 일본 언론에 보도되자 1996년 유해봉환위원회(위원장 한승헌 변호사)가 결성되고,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단체협의회와 천도교중앙총부 등이 나서 같은 해 5월 유골을 국내로 봉환했다. 처음에는 정읍 황토현 기념관 사당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2002년 지금의 전주 역사박물관으로 옮겼다. 유골은 ‘진도에서 채집했다’는 문서를 근거로 망자의 고향인 진도 안장을 추진했다. 진도군도 처음에는 안장에 적극적이었다. 2005년에는 ‘묘역 조성과 공원화 계획’ 등 학술 용역까지 마쳤다. 그러다 2009년 진도군수가 바뀌면서 상황이 변했다. 진도군은 “유골의 신원이 확실하지 않아 진도에 안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유골을 놓고 지방자치단체와 동학단체들 간에 신경전이 끊이지 않았다. 처리 방법을 놓고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서로 정부 예산을 타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다 예산이 반영되지 않으면 ‘나 몰라라’ 하는 식이었다. 지금까지 전라북도·전주시·진도군·동학농민기념사업회·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간에 의견이 엇갈린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자체와 동학단체들의 정부 예산을 타내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정읍동학혁명계승사업회와 정읍 공무원노조는 2010년 8월 성명서를 내고 정부에 해결책을 요구했다. 예산을 달라는 것이었다. 정부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2년 후인 2012년 정읍시와 동학혁명기념재단 측은 중앙 부처에 예산을 요청했지만 반영이 되지 않았다. 지난해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도 유골을 안치한다며 7억원의 예산을 요구했지만 역시 부결됐다. 사업회 측은 김제시 원평면 구미란에 있는 무명 동학농민군 묘역 인근에 안장을 계획하고 특수지원을 요청했었다. 단지 유골 안치가 목적이었다면 1000만원에도 가능했다. 이에 대해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인 혜문 스님은 “주객이 전도됐다. 당장 급한 것은 100년 넘게 구천을 떠돌고 있는 유골을 안장하는 것이다. 일단 따뜻한 곳에 안장했다가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면 그때 가서 묘역이나 추모공원을 조성하면 된다”며 “지자체나 동학단체들이 마음만 먹으면 최소의 예산으로도 안장할 수 있었는데, 예산만 타내려다 보니 지금까지 방치됐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주 역사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 중인 동학군 장군 유골. ⓒ 정락인 제공
혜문 스님 박물관 찾아가 담판 후 입장 바꿔

예산 타령만 하던 동학단체들이 안장을 적극 검토한 것은 지난 5월이다. 혜문 스님은 5월19일 전주 역사박물관을 방문해 이동희 관장과 문병학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사무처장 등을 만나 “동학군 장군 유골을 20년간 방치한 행위는 반인권적 처사일 뿐만 아니라 헌법 161조 사체 보관 및 유골 영득에 관한 조항 위반이다. 조속히 안장 결정을 하지 않으면 검찰에 형사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혜문 스님은 또 감사원에 유골 보관은 반인권 행위란 취지로 공익감사를 청구했다.

전주시에도 관련 민원을 넣어 압박했다. 전주시는 유골 소유권을 갖고 있는 ‘동학농민기념사업회’에 공문을 보내 이사회 의결을 통해 해결 방안을 공식적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5월23일 기념사업회 측은 전주시에 공문을 보내 ‘동학농민군 지도자 유골 안치에 대한 회신’을 통해 “동학농민기념재단 등 각급 관계기관과 협력해 2014년 6월 중 ‘동학농민혁명지도자유골영구안치추진위원회(가칭)’를 구성하고, 올해 안으로 유골을 영구적으로 안치하는 사업을 마무리하겠다”고 답변했다.

그 후 동학단체들이 만나 올해 안으로 안장하는 것에 합의했다. 이로써 18년간 구천을 떠돌던 동학군 대장의 유골이 영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혜문 스님이 전주 역사박물관을 찾은 지 일주일도 안 돼 내린 결정이었다. 이것은 동학군 장군 유골을 안장하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학단체들이 ‘염불보다 잿밥’에 욕심을 내면서 생긴 일이었던 것이다. 혜문 스님은 “동학 농민군 최고 수뇌부 장군의 유골 안장을 20년간 방치하면서 예산 부족 탓만 했다. 부패한 정부와 탐관오리의 수탈에 항거했던 동학운동의 정신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라며 분개했다.

5월31일은 동학군이 전주성에 입성한 날이다. 이날 전주 역사박물관 앞에서는 전주 시민과 혜문 스님 등이 참여한 가운데 ‘동학군 장군 유골 안장 촉구’ 행사가 열렸다. 이동희 박물관장은 “(동학군 장군 유골을) 황토현 전적지에 안장하기로 정읍시와 협의를 시작했다”며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이제는 홀가분하다”는 소감을 밝혔다. 동학군 장군은 살아서는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하고, 일본군의 칼날에 목이 베어졌으며, 죽어서는 후손들의 ‘돈 싸움’에 두 번 죽고 말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