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N 제국’이 가라앉고 있다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4.06.1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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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색 강한 폭스뉴스·MSNBC에 밀려…사실만 전하는 뉴스 외면받아

1991년 걸프전은 CNN의 전쟁이었다. 시청자들은 전쟁을 생중계로 볼 수 있게 해준 ‘방송 혁명’에 환호를 보냈고, CNN은 그 이름 그대로 ‘케이블 뉴스 네트워크(Cable News Network)’의 대명사가 됐다. 시청자들이 정확하고 빠른 뉴스를 보기 위해 CNN을 찾는다는 ‘CNN 효과’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세계적 신드롬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런 CNN의 현실은 요즘 위태롭기만 하다. 걸프 만에서 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이 흐른 지금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고 있다.

경쟁 뉴스 채널인 폭스뉴스(FoxNews)와 MSNBC에 1~2위 자리를 내준 지는 이미 오래다. 물론 그 사이에 잠깐의 반등도 있었다. 실종된 말레이시아 항공기 보도에서 반짝 특수를 누렸다. 매시간 속보로 방송하며 관련 전문가들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뉴스를 내보냈다. 미국 시청률 조사업체인 ‘닐슨’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런 대규모 지원 덕분에 사고 발생일인 3월8일부터 21일까지 하루 평균 30만명이던 시청자 수는 두 배 이상 늘어나 77만명에 이르렀다. CNN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말레이시아 실종기 사건에 물량을 퍼부었다.

하지만 4월21일 이후부터 시청자 수는 점점 감소해 42만명 선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5월은 더 잔인했다. 5월28일 뉴욕타임스는 “CNN은 가장 시청자 수가 많아야 할 저녁 9시 등 주요 뉴스 시간대의 시청자 수가 35만명대로 떨어지는 등 5월 시청률이 폭스뉴스와 MSNBC는 물론, 같은 계열사인 HLN에도 뒤처져 4위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가 보여주듯, 위기를 느낀 CNN은 5월 말 미국 애틀랜타 본사에서 진행하던 자사의 간판 프로그램인 ‘CNN 뉴스룸’을 포함해 보도 관련 방송을 8월 초부터 뉴욕 지사에서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평일 오전 9시부터 7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되는 ‘CNN 뉴스룸’은 1980년 미국에서 최초로 도입된 24시간 뉴스로 CNN의 상징과 같은 프로그램이다.

‘의견 없는 뉴스’에 시청자 등 돌려

본거지를 옮긴다고 위기가 해결될 수 있을까. CNN의 추락은 어쩌면 화려한 인터넷 시대가 열리면서 나타난 운명적인 결과일지 모른다. CNN은 사실 보도와 현장 보도 위주로 속보성을 앞세우며 시청자들을 휘어잡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디지털 매체들이 등장하고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들이 등장하면서 CNN의 장점은 빛을 잃고 말았다. 정보나 사건을 재빠르게 알기 위해 CNN을 보거나 CNN 홈페이지에 접속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CNN은 네티즌이 참여하는 ‘ireport’ 등의 서비스를 개설해 시청자 참여 콘텐츠를 첨가하면서 만회에 나섰지만 추락의 대세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는 비단 CNN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케이블 뉴스 채널이 전반적으로 추락세에 접어들었다. 최근 ‘퓨리서치’ 보고서에 따르면, CNN·폭스뉴스·MSNBC 등 3대 뉴스 채널의 시청률은 지난해보다 11% 하락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유독 CNN의 추락세는 두드러졌다. CNN이 추락하면서 1위에 오른 곳이 폭스뉴스다. CNN은 창설 초기부터 ‘사실의 중립적인 보도’를 모토로 삼았다. 저널리즘의 가장 우선적인 원칙인 객관성과 중립성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이를 두고 ‘의견 없는 뉴스’라고 생각했다. 과거에는 속보성 뉴스를 앞세워 객관성과 중립성을 지키는 원칙이 먹혀들었지만 이제는 굳이 CNN이 아니라도 정보를 얻을 곳이 많은 상황에서 단순히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시청자는 급감했다. 미국인들이 CNN에서 고개를 돌리게 하는 이유였다.

CNN의 끝 모를 추락에는 창업자인 테드 터너의 변하지 않는 철학도 한몫했다. 그는 “CNN은 비록 시청률에서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자극적인 기사보다는 ‘튼튼한 뉴스(Hard News)’를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두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튼튼한(hard) 뉴스’는 시청자들의 눈에는 ‘딱딱한(hard) 뉴스’로 여겨졌고 시청자들의 시선은 점점 멀어져갔다.  

폭스뉴스는 정반대의 전략을 펼쳤다. 자신들의 확고한 입장을 뉴스 보도에 그대로 반영했다. 이미 친(親)공화당 등 보수 진영을 대변하는 뉴스로 자리매김한 폭스뉴스는 부시 정부의 이라크전쟁을 계기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뉴욕타임스가 ‘부시의 치어리더’라고 비아냥거렸을 정도로 폭스뉴스는 애국심을 강조했다. 전쟁의 정당성을 홍보했고 반전주의자들에 대해 보도하면서 앵커가 “역겹다(disgusting)”는 말을 반복할 만큼 태도를 분명히 했다. 확고한 보수를 내세웠고 직설적으로 뉴스를 진행하며 정치색이 가미된 폭로 저널리즘 시대를 연 게 폭스뉴스였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후 폭스뉴스의 보수 색채 내세우기는 더욱 강해지고 있다. ‘오바마케어’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보도와 좌담회는 폭스뉴스의 주요 메뉴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는 이미 민주당 인사들 공격에 직접 나섰다. 2012년 9월 리비아 벵가지 미국 대사관 피습 사건을 부각시키며 오바마 대통령은 물론, 유력한 민주당 잠룡인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공격하고 있다. 불공정해 보이는 보도지만 시청률은 여전히 변함없는 1위다. 미국 국민들이 단순한 사실을 전하는 뉴스보다는 분명한 입장을 밝히고 해석이 가미된 뉴스에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 폭스뉴스를 통해 확인된 셈이다.

“가장 편견이 심한 매체를 가장 신뢰”

폭스뉴스와는 반대로 다소 진보적 입장에서 뉴스를 전하는 MSNBC가 CNN을 제치고 2위 자리를 차지한 것도 일맥상통한 현상이다. 기존 저널리즘의 전통이었던 객관성과 중립성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객관성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을 제쳐놓은 새로운 종류의 저널리즘”이라고 비판했지만, 이는 분명히 새로운 현실이 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6월3일 미국 로버트모리스 대학교는 하나의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5월6~13일 미국 전역에서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18.4%가 폭스뉴스를 가장 신뢰한다고 답했다. CNN은 14.1%를 얻어 2위에 올랐고, MSNBC는 4.4%를 얻는 데 그쳤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신뢰한다는 폭스뉴스에 대한 인식이다. ‘편견(bias)이 있다고 생각하는 매체는 무엇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폭스뉴스라는 응답이 47.8%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MSNBC는 37.1%, CNN은 36.6%를 기록했다. 편견이 반영된 뉴스에 신뢰를 보내는 것, 지금 미국에서 뉴스를 소비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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