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 같은 차승원이 여자가 됐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06.1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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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감독의 감성 누아르 <하이힐>

<하이힐>의 주인공 지욱은 완벽한 남자의 조건을 갖춘 강력계 형사다. 거칠고 남자답기로 유명한 그는 동료 경찰뿐 아니라 범죄조직 사이에서도 전설로 통한다. 남들은 이런 지욱의 기질이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후천적인 것이다. 그가 일부러 거친 길만 택해 걸어온 이유는 결코 남자답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여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애써 억누르고 감추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지욱이 더 이상 거짓 노력이 아닌 진짜 바람대로 살고자 하는 순간, 그가 아끼던 사람들이 범죄조직에 희생된다. 분노한 지욱은 복수를 감행한다.

지욱을 연기한 배우는 차승원이다. 코미디부터 액션, 스릴러, 사극까지 다양한 장르를 종횡무진한 베테랑 배우인 그에게도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는 출연을 선뜻 결정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였다. 단순히 여성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관객에게 캐릭터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극 전체가 무너져 내릴 여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비단 배우에게만 낯설고 어려운 과제는 아니었다. 이 영화는 그 등장만으로도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길 것이 분명했다. 희화된 모습으로 혹은 극히 작은 역할로 트랜스젠더를 그린 작품은 있었지만 트랜스젠더가 되고자 하는 주인공을 상업영화 전면에 등장시킨 경우는 전례를 찾기 어려워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하이힐>의 장르는 명백한 누아르다. 거친 남자의 세계에서 의리와 배신 그리고 복수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액션의 강도로만 보자면 근래 한국 영화에서 보았던 것 중 최고 수위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독특한 점이라면 사건이 인물의 외부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그러니까 심정적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핵에는 한 인간의 근본인 ‘정체성’이 있다. 여타 누아르와는 영화의 톤이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실제로 <하이힐>은 지욱의 내면과 감성에 더욱 집중한다. 여기에서 오묘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이 영화만의 이율배반적 ‘톤 앤 매너’가 생긴다. 영화는 거칠지만 감성적이고 웃기지만 슬프고 판타지 같지만 적나라하다. 그럼에도 이 모든 조합이 어색하진 않다. 이질적인 요소를 씨실과 날실을 엮듯 직조하면서 인물의 상황에 빠져들게 만드는 연출과 연기 모두 탄탄하다. 모두에게 환영받는 작품이 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누구에게나 공감의 여지는 심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거칠지만 감성적이고, 웃기지만 슬픈…

이토록 쉽지 않은 작업에 도전한 용감한 연출가는 연극과 영화, 뮤지컬과 방송까지 넘나드는 이야기꾼 장진 감독이다. 남북 분단(<간첩 리철진>(1999년))이나 살인 청부(<킬러들의 수다>(2001년)), 시한부 인생(<아는 여자>(2004년))같이 조금은 묵직한 주제를 기막힌 농담과 독특한 시선으로 이야기해온 그다. 장진 감독은 <하이힐>을 통해 “사회가 말하는 보편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영화를 “세상의 편견에 부닥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한 남자가 겪는 슬픔을 대중적으로 풀어낸 감성 누아르”라고 말한다.

누구나 남성과 여성 성향 가지고 있다

<하이힐>은 장진 감독과 차승원이 호흡을 맞춘 세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박수칠 때 떠나라>(2005년)와 <아들>(2007년)에서 연출가와 배우로 만났다. 그들은 <하이힐>을 촬영하기 전 마주 앉아 “서로 양보하지도, 지지도 말고 질릴 때까지 치열하게 한번 찍어보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1990년대부터 영화계에 몸담으며 본의 아니게 찾아온 듯한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보자는 약속이었다. 차승원은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왜 하려고 하는지를 고민했다”고 말한다. 그러다 그가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한 생각은 이런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남성과 여성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때문에 지욱을 100%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진심을 다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지욱이 결국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몰라 느끼는 헛헛함을 표현해보고자 했다.”

능히 짐작하겠지만 <하이힐>에는 지욱이 여장하는 장면이 있다. 즉, 배우 차승원의 여장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얼마나 충격적일지에만 관심의 방점이 찍혀 있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장면일지도 모른다. 물론 상황을 무거운 분위기로만 몰아가지 않으려는 감독의 재기로 빚어낸 약간의 웃음 포인트도 있다. 한데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그가 여장한 모습은 충격적이기보다는 꽤 슬퍼서 탄식이 흘러나올 정도다. 지욱의 진심 어린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덕분이다. 지욱이 이미 트랜스젠더가 된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다 “신이 우리를 버렸나 보죠”라고 힘겹게 입을 떼는 순간, <하이힐>은 웃고 넘길 수 있는 판타지가 아닌 마음 찡한 현실이 된다.

차승원은 농담처럼 “여장은 그저 ‘견뎌보자’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말한다. “대신 내가 견디면 남들도 나를 어색하게 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분장보다는 감성으로 지욱이 가진 여성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장진 감독이 덧붙인 말에서 현장 분위기를 더욱 자세히 느낄 수 있다. “현장에 있는 100여 명의 스태프 모두가 ‘차승원이 나타나도 절대 웃지 말자’고 다짐했을 정도다. 그런데 이 마초 같은 남자가 여장을 하고 나타났는데 이상하리만치 멀쩡하더라.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짜 여성성을 지닌 사람이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차승원이 연기를 하는 순간 그의 외모가 제약이 되지 않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독의 말대로다. 우습거나 어색하지만은 않다. 혹시나 이 영화에 편견을 가졌다면 버려도 좋다. 그러고 나면 몹시 색다른 영화 한 편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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