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박정희 왕가’의 건축 곳곳에 들어서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4.06.1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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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민족정기 회복 기치 현충사·광화문·불국사 대규모 복원

흔히 건축하는 이들이 1970년대 관제 건축을 일컬어 ‘박조건축’이라고 부르며 비아냥거린다. 사실 박조건축이란  ‘박정희 왕가의 건축’이란 말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던 유신 시대에 ‘전통의 현대화’라는 테제로 한국의 전통과 민족문화의 창달을 위해 일로매진하던 시절의 건축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런 비판에는 자기비하 성격이 묻어난다. 이런 건축의 중심에 한국 건축계의 원로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민족문화 창달’과 ‘민족정기 회복’ 기치 아래 현충사(1967년), 광화문(1968년), 불국사(1969~73년), 오죽헌(1975년) 등을 복원하는 대규모 역사가 펼쳐졌다.

국립극장 ⓒ 정준모 제공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 재건은 역사의 복원 또는 전통 계승 사업의 실증적 사례다. 광화문은 6·25 때 폭격으로 소실됐다. 정부는 1968년 3월15일 재건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11일 완공했다. 재건된 광화문은 철근콘크리트로 지어졌고 재건 당시 광화문을 중앙청에 맞추며 3.5도 정도 틀어졌다. 또 도로가 있었던 탓에 원래 자리에서 14.5m 정도 뒤로 물러났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가 든 현판까지 문제가 되면서 2006년 재건된 광화문을 철거하고 3년 8개월 만인 2010년 8월15일 새롭게 복원했다.

2006년 해체된 시멘트 광화문의 속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놀랐다. 시멘트로 속을 채워넣는 타설 방식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부재를 시멘트로 성형해서 마치 일일이 각 부분을 제작 조립하는 전통 한식 목구조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재를 아끼고 총독부 건물을 가리려고 재건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졸속 재건이라고 비아냥거리던 사람을 머쓱하게 했다. 

문화까지 통치하던 박정희 시대

‘전통 방식 그대로 복원했다’는 숭례문의 졸속·부실 복구(2008~13년)를 보면서 복원과 재건의 의미를 한번 되돌아보자. 복원이란 ‘원래대로 회복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수리와 수복, 이건(移建) 등으로 나뉜다. 복원이란 옛날 그대로의 모습과 상태로 되살린다는 것인데 실제로 이게 가능할까. 불가능한 복원보다는 ‘콘크리트 광화문’의 재건이 오히려 적절하고 타당한 것은 아닐까. “문화재를 복원하는 데 기준은 없다. 중창이나 재창이라는 말을 써야 하며 ‘옛날 그대로 되살린다’는 뜻의 복원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한, 불국사 수리 복원 건축 설계를 맡았던 김동현 한국전통문화대 석좌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1973년 6월 완공된 불국사 복원공사도 실은 통일신라 시대의 전통적인 가람 배치와 건축 양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불국사의 주요 전각과 회랑은 기록이 남아 있는 고려와 조선 시대 건축 양식에 1970년대 한국 건축가의 상상력이 조합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통의 재건은 전통문화의 수집과 보존으로 이어져 많은 박물관이 세워진다. 부여박물관(1965~68년)에 이어 국립중앙박물관(1966~72년), 공주박물관(1972~74년), 경주박물관(1968~75년)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전통의 현대적 해석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김수근이 설계한 부여박물관은 땅에서 솟아오른 ‘사람 인(人)’자형의 맞배지붕이 곧 건물을 이루며 노출 콘크리트로 처리한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다. 하지만 경사 지붕과 지붕 위 시멘트 뼈대 그리고 계단과 정문이 일본 신사의 ‘도리이’를 연상케 해 ‘왜색 논쟁’으로 번졌다. 논란의 배경에는 30대 초반에 당시 정권 실세인 JP(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김수근에 대한 시샘도 있었다. 그는 결국 지붕에 한식 기와를 올려 절충한 끝에 논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광화문 재건 당시 설계를 맡았던 강봉진(1917~98년)은 1966년 문화재관리국이 발주한 국립중앙박물관 현상 설계에 당선됐다. ‘지상 5~6층, 지하 1층 건물로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해 콤포지션 및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 여러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음’이라는 공모 요강에 많은 건축가가 반대할 때 그는 혼자 충실히 이를 따랐다. 그는 9개의 전통 건축물, 즉 불국사 청운교·백운교와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을 각각 재현해 조합한 안을 제출했고 이것이 당선돼 완공됐다. 하지만 한국 근현대사 ‘최악의 건축물’이라는 혹평에 언론, 건축가들, 시민사회까지 가담하면서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야 했다.

ⓒ 정준모 제공
‘한국적 민주주의’와 쌍 이룬 ‘전통 현대화’

혜화동 성당(1960년)과 절두산 순교복자성당(1966~67년) 등 걸출한 종교건축을 완성시킨 건축가 이희태(1925?81년)는 남산의 국립극장(1969년)과 경주박물관, 공주박물관을 통해 전통 건축 어휘를 현대적 언어로 번안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경복궁 경회루의 하부 열주를 자신의 건축 아이콘으로 삼았다. 국립극장도 전면부에 열주를 내세웠다. 1966년 1월 대통령 연두교서에서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을 천명하면서 비롯된 국립극장은 북한의 인민문화궁전(1974년), 만수대예술극장(1976년)을 의식한 것이기도 했다. 국립극장은 ‘과거의 현대적인 재해석’이라는 화두를 바탕으로 기단과 열주, 처마가 독특한 형태로 디자인됐다. 경주박물관도 경회루를 원용해 48개의 연꽃 모양의 주두를 갖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상륜을 얹었다. 건축가 김봉렬은 이를 두고 “1960년대 이희태의 고전 건축 어휘의 현대화가 민족주의적인 복고주의와는 구별되는 시도”라고 평가했지만, 건축가 김원은 국립극장을 향해 “고전의 오해이며 고전적 정신에의 모독”이라고 비판했다. 세종대왕기념관(1968~70년)과 국기원(1971~72년)도 현대화된 전통 건축의 모양새를 취했다.

1960~70년대 기념비적인 공공건축물에서 한국 전통 건축의 현대적 해석과 변용을 탐구하는 동안 한국현대미술에서도 이는 화두가 되었다. 전성우·하종현·한영섭·함섭·김인환·김한 등의 기하학적이면서도 오방색을 주조로 한 추상화가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점에서 전통의 현대화는 당시 예술계 전반의 고민이었던 셈이다. 전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일제 강점기에 생긴 핍박과 상실의 트라우마다. 그래서 역으로 단절된 민족문화의 정체성과 전통에 집착했던 것은 아닐까. 

전통과 창조는 결국 시대와 주체의 문제다. 전통은 ‘과거’가 아닌 ‘지금’, ‘우리’가 아닌 ‘나’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난과 힐난을 감수하고라도 전통에 대해 자유롭게 고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아예 그 뜨거운 감자 ‘전통’을 애써 외면하거나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예술비평가 존 러스킨의 말을 떠올려본다. “중요한 문제에서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건축에서 언젠가 위대하고 아름다웠던 것을 복구하는 것은 마치 죽은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불가능하다. 내가 앞 장에서 생명의 전부라고 주장했던 그것, 오직 장인의 손과 눈으로만 주어지는 그 정신을 결코 다시 불러들일 수 없다. 다른 시간대는 다른 정신을 만들고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건물이다.” 그렇다. 보여주고 설명하는 공간이 아니라 당대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숨 쉬는 공간, 그것이 한국 건축이 살려내야 할 전통의 참맛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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