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 없는 노동이 감성 에너지 다 태워버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06.18 15: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진 증후군 처방전’ 낸 윤대현 정신과 전문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하지만 무엇인가 발목을 잡고 있다. 떠날 수 있는데도 못 떠나는 인생. 대신 밤늦게까지 일하는 습관이 몸에 붙은 듯 자연스럽다. 쉬는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경쟁은 나날이 치열해진다. 하나라도 실패할까 두렵고, 하나를 성공해도 부족하다는 생각에 숨이 턱 막혀온다. 쉴 줄 모르는 이들에겐 뭔가 고장 난 것이 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이 아니더라도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현대인 이야기다.

“서비스 업종에만 감성 노동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감성의 요구를 누르고 이성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따라가는 것이 감성 노동이다. 충전 없는 감성 노동은 감성 에너지를 다 태워버린다. 배터리가 나갔으니 아무리 최신 기종 스마트폰이라 한들 작동할 리 없다.”

ⓒ 민음사 제공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다”

대한민국에서 성공한 사람을 가장 많이 인터뷰했다는 의사,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윤대현 교수가 성공해도 행복하지 않은 현대인의 삶에 처방전을 내렸다. <윤대현의 마음 성공>이 그것인데, 과도한 업무량과 스트레스로 인해 뇌가 피로에 빠지는 ‘소진 증후군’이라는 진단과 함께 이를 극복할 해법을 제시했다.

“스트레스성 뇌 피로증은 현대인에게 암 이상으로 아찔한 문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일의 의미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다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능력마저 떨어진다. 이전에 즐거웠던, 행복했던 일들이 더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다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 아닌가. 그런데 행복에 대한 내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열심히 달리기만 하느라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현대인들. 왜 그들은 감성 에너지를 충전할 새도 없이 다 태워버려야 했을까.

“성공에 대한 대가가 크다. 불안 생존 시스템의 회전 속도가 떨어지는 것 자체도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연민과 이완을 받아들일 틈이 없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푼다는 것은 불안 생존 시스템의 속도를 늦추고 연민 이완 시스템의 나른함을 즐기는 것이다. 불안 생존 시스템만 맹렬히 돌아가는 삶은 쉽게 초조해지고 완벽주의에 빠질 우려가 크다. 세상을 제대로 즐기지를 못한다. 세상을 즐기기 위해 열심히 산 것인데 뇌의 상태가 세상을 전혀 즐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윤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과로하면 심장에 무리가 가듯 뇌도 과부하가 걸리면 고장이 난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감성이 원하는 것을 억누르고 이성이 시키는 대로만 자신을 다그치면 소진 증후군(burnout syndrome)에 빠지고 만다. 감성의 뇌에 쌓인 피로를 제때 풀어주지 않으면 감성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돼버리는 것이다. 특히 생존과 성공을 위해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진 증후군은 어느 때보다도 심각하다.

스트레스성 뇌 피로증이라고도 하는 소진 증후군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 좀처럼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진다. 짜증이 늘어나고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한다. 작은 자극에도 예민하고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내 마음이 고달프니 남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도 없다. 사람을 만나기가 싫고 주말에도 집에 콕 틀어박혀 있기 일쑤다. 무서운 것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내가 나를 근사하다고 느끼는 마음, 즉 자존감이 급격히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소진 증후군의 핵심 증상은 삶의 의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던 삶이 가치 없게 느껴지고 심하게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자기 파괴적인 생각까지 들게 한다.

모범생의 삶보다는 30%쯤은 ‘날라리’로

“내 진료 철학은 명확하다. 도덕적 규범보다는 내담자 입장에서 최대한 이기적으로 생각한다. 내담자가 세상의 중심이 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가장 합리적인 전략과 전술을 함께 논의한다.”

윤 교수의 심리치료는 정신병리를 찾아 진단하고 치료하는 기존 치료와 달리 인간이 살아가며 일상적으로 겪는 고통·불안·슬픔에 대해 심리철학·뇌과학·정신의학을 기반으로 이해와 위로를 제공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최근 들어 많은 자기계발서에서 긍정적인 사고를 강조한다. 걱정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내밀어 대항하라고 한다.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인 생각에 긍정적인 생각을 뒤섞어 뇌를 더 힘들고 복잡하게 할 수 있다. ‘걱정은 정상’이라는 생각에서 열쇠를 찾아야 한다. 우울한 감정 자체는 비정상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 또한 우리가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즐겨야 할 삶의 감성 콘텐츠다.”

쉬는 것도 해보지 않으면 잘 못한다. 윤 교수는 소진 증후군에 대한 예방책으로 ‘자기 연민’을 제안한다. 자기 연민은 ‘나는 근사한 사람’이라는 마음을 감성의 뇌에 내재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점차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윤 교수가 제안하는 자기 연민 훈련법은 이렇다. 순도 100퍼센트 모범생의 삶보다는 30퍼센트쯤은 ‘날라리’로 살아라, 하루 10분 자연을 느끼며 걸어라, 혼자만의 기차 여행을 떠나라, 3차원 우정을 쌓아라….

윤 교수는 ‘인간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철학자 파스칼의 말을 빌려 조언도 들려준다. “바캉스(vacance)는 라틴어로 자유를 얻는다는 말에서 유래했다. 자유란 연민 이완 시스템을 작동하는 열쇠다. 일하기 위해 바캉스를 가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바캉스를 위해 일하는 것이 옳은가. 심리철학적으로는 후자가 정답이 아닌가 싶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