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받은 진보, ‘통합’도 멀고 험난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4.06.25 11: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상정·오병윤·이용길 대표가 말하는 진보 정당의 위기와 방향

2004년 4월15일 오후 6시. 17대 총선이 치러진 그날, 민주노동당 관계자들이 당사 TV 앞에 모여앉아 출구조사 발표를 숨죽여 기다렸다. 분위기는 좋았다. 당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이었다. 탄핵 역풍이 거세게 불면서, 탄핵을 주도했던 제1야당인 한나라당(지금의 새누리당)과 제2야당 새천년민주당은 큰 위기에 몰렸다. 반면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대반전을 노리고 있었고, 여기에 편승해 진보 정당인 민노당 또한 첫 원내 진입을 기대하고 있었다. 샴페인도 미리 준비됐다. “5, 4, 3, 2, 1” 카운트다운 후 모니터에 나타난 결과는 놀라웠다. 민노당이 9~12개 의석을 차지할 것이란 예상이었다.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노회찬 선대본부장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다음 총선에는 100석 이상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되겠다. 방송사 출구조사보다 더 많은 의석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외쳤다. 이 선거에서 민노당은 무려 10석을 차지했다. 진보 정당 최초의 원내 진입은 이처럼 화려하게 이뤄졌다.

왼쪽부터 오병윤 진보당 원내대표·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이용길 노동당 대표 ⓒ 시사저널 포토·연합뉴스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지난 6월4일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고 했던가. 10년 전 환호성은 온데간데없고 진보 정당 주변에는 한숨만 가득했다. 광역단체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초단체장을 단 한 자리도 건지지 못했다. 광역의원과 기초의원 당선자 수도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다. 10년 전의 민노당은 이른바 ‘NL’과 ‘PD’의 대립으로 민노당과 진보신당으로 갈라섰다. 진보 정당 통합 요구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심상정·노회찬 등을 중심으로 한 진보신당 탈당파와 국민참여당이 기존의 민노당과 합쳐 통합진보당(진보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다시 두 세력은 분열했고, 결국 진보신당 탈당파와 국민참여당 세력은 진보당을 나와 정의당을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기존 진보신당은 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진보 정당의 모습에 대해 당시 주역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시사저널은 진보당 오병윤 원내대표,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 노동당 이용길 대표에게 진보 정당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각 진보 정당의 세 사령탑은 일단 이번 지방선거 결과가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개선 방향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오병윤 진보당 원내대표는 선거 패배 원인에 대해 “아직 논의 중이다”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선거 결과에 따른 향후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논의가 결코 간단하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분당 과정, 종북몰이 등 악조건이었던 것은 맞지만, 단순히 이런 수준의 논의를 넘어 향후 전망을 포함해 좀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를 해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야당이 없는 상황에서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희망을 담기 위해 진보가 어떻게 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분당, 종북몰이 수준 논의를 넘어서야”

당이 처한 위기의 원인을 주로 박근혜정부의 공안 정국 탓이라고 분석했던 것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진보당은 이번 지방선거에 모두 515명의 후보를 냈으나, 광역의원 3명과 기초의원 34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최근 진보당의 한 당원은 당원게시판에 “정당 순위 3위라는 허울에서 벗어나야 한다. 3위 정당이 지자체장을 하나도 배출 못하고 고작 37명의 당선자만 낸 원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의당의 심상정 원내대표 역시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해 냉엄한 평가를 내렸다. 심 원내대표는 6월19일 기자와 만나 “광역단체장을 당선시키지 못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쟁력 있고 유능한 후보들을 살려내지 못한 것은 뼈아프다. 정치는 결과를 보여줘야 지지자들이 표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가 분화돼 있다 보니 유권자들이 ‘내가 던지는 표’가 결국 사표(死票)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진보 정당에 주는 표가 미래 투자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본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의당에서 당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던 배진교 인천 남동구청장 후보와 조택상 인천 동구청장 후보는 모두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공장 노동자들이 많은 인천 지역은 정의당엔 특히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이들의 낙선이 더욱 뼈아프게 느껴지는 이유다.

노동당은 광역의원 1명, 기초의원 6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노동당의 뿌리인 진보신당은 2010년 지방선거에서 광역의원 3명, 기초의원 22명을 배출한 바 있다. 노동당의 이용길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번 선거는 세월호 참사와 연동된 선거였다. 신자유주의의 폐악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 일어났고 사람보다 돈이 우선인 보수의 논리에서 사람을 중시하는 진보로 바꿔보자는 여론을 모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자리매김하기는커녕 오히려 왜소화됐다. 당선자 숫자를 보나 지지율을 보나 실패한 선거”라고 밝혔다.

진보 정당은 그동안 수없이 통합과 분열을 겪으며 이합집산해왔다. 한때 같은 꿈을 꿨던 이들이 각자의 노선을 걸으며 지지율 분산을 가져왔고 이것이 곧 진보 정치의 약화로 이어졌다. 세 대표 역시 이러한 진단엔 동의했다. 그러나 진보의 통합에 대한 입장은 서로 달랐다. 진보당의 오병윤 원내대표는 “다시 진보 대통합을 논할 때가 되었다는 지적이 많다”는 기자의 질문에 조심스럽게 “이제 그래야 하지 않겠나. 이번 선거에서 그런 요구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진보는 섞여서 풀어나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정의당 심상정 원내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앞으로 같은 진보라고 무조건 함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향후 세력을 개편해야 하는 것이 기본 과제지만 과거처럼 ‘진보연합’ 식으로 당 대 당 통합은 안 할 것이다. 이제 진보 연고주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고 여기에 부합하면 어떤 당이든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진보끼리 다 뭉쳐보자’는 식의 통합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노동당 이용길 대표는 조심스러워했다. 단순히 선거 결과 때문에 다시 합치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는 생각이다. “지금 진보의 처지는 다시 통합하자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태다. 각자의 상처와 인연이 얽힌 상태이고 진보에 대해 추구하는 상들이 서로 다르다. 다행히 대선 때까지 3년이나 남았으니 정치공학적으로 통합 운운할 게 아니라 열린 광장에서 서로 터놓고 얘기할 시간이 필요하다.”

노회찬·이정희, 동작 을과 순천·곡성 출마설

당분간 진보 정당이 ‘대통합 드라마’를 보여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런 가운데 진보 정당들은 각각 오는 7월30일 재·보궐 선거로 반전을 노릴 생각에 분주하다. 중 특히 여야 거물급들의 맞대결이 펼쳐지는 격전지에 직접 뛰어들어 승부를 보겠다는 계획이다. 진보 정당들이 서울 동작 을과 전남 순천·곡성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은 현재 몇 곳을 놓고 저울질에 들어갔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작 을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것으로 알려졌다. 동작 을은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이 예정된 곳이다. 새누리당의 김문수 경기도지사, 오세훈 전 서울시장, 김황식 전 국무총리와 새정치민주연합의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등이 당장 후보로 거론된다. 여야 대선 주자급들이 출마하는 동작 을에서 노회찬 전 의원이 승리한다면 진보 정당의 위상을 단번에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노동당의 김종철 전 부대표 역시 공식적으로 동작 을 재보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노 전 의원이 (동작 을에) 출마하지 말았으면 한다”며 노골적으로 노 전 의원의 불출마를 요구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나설 경우 진보 정당 후보 단일화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진보당에서는 순천·곡성 지역 선거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선동 전 진보당 의원이 이 지역의 현직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지난 6월12일 대법원 선고에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진보당의 조직 기반이 탄탄하다. 마침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출마설이 전해지며 동작 을과 함께 이번 재보선의 주요 격전지로 떠오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지역에 이정희 진보당 대표가 직접 출마할 것이란 얘기가 끊이지 않고 있다. 새정치연합 역시 조순용 전 정무수석, 서갑원 전 의원 등도 출마 준비를 하고 있어 치열한 3파전이 예상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