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이 막장 드라마에 중독됐다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4.07.02 13:5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청률 저조로 빛 못 본 사회 드라마 <개과천선> <골든 크로스>

최근 MBC 수목드라마 <개과천선>이 한국 드라마로서는 놀라운 성취를 보여줬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세밀하게 파헤쳐 역대 사회 드라마 중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 작품에선 김명민이 개과천선하는 주인공 변호사 김석주 역으로 나왔다. 극 중에서 김석주는 한국 최고 로펌인 ‘차영우펌’의 에이스 변호사였다가 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후 차영우펌과 대립하는 변호사로 거듭난다.

차영우펌은 전 국세청장 등 전직 고위 관료 집단을 고문 등으로 거느리고 있으며, 차영우펌 출신 인물들이 청와대 등 고위 사회 곳곳에 포진해 있고 핵심 인사는 법조계 엘리트 사조직의 일원이며 재벌과 대형 은행 등 강자만 대리하는 법률 집단이다. 그들은 장관·법원장·대법관·검사 등의 인사에 강한 입김을 불어넣으며 전직 관료들을 활용해 소송 상대에게 세무조사 등 압박을 가하고 현직 법관을 변호사로 스카우트해 재판, 영장 발부 등에 영향을 미치며 복잡한 사건을 풀어나가는 법률적 이론을 개발해 판사들이 참고하도록 하는 등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이들은 돈만 되면 누구나 대리하며 이들의 활동으로 인해 서민이 불이익을 당한다든가, 외국 자본이 한국 시장을 유린하는 결과가 빚어지는 것 등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은 요즘 선출되지 않은 권력, 제4의 권부로 떠오른 대형 로펌들의 실상을 떠올리게 한다.

MBC ⓒ MBC 제공
<개과천선>, 건국 이래 최고의 디테일

김석주는 그런 차영우펌의 에이스로 재벌과 대형 은행 등의 이익을 지켜주는 자본의 흑기사라 할 만한 인물이다. 그는 특히 금융 전문 변호사로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해졌지만 너무나 복잡해서 아무도 그 실체를 잘 모르는 금융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 판사를 설복시키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한다. 그 과정에서 윤리의식 따위는 전혀 개입되지 않으며 오로지 자본의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지에만 골몰한다. 그랬던 그가 기억상실로 한순간에 성격이 바뀐다는 이야기인데 사실 구도만 보면 이미 많이 봐왔던 설정 같기도 하다.

돈만 알던 악인이 기억상실로 착해지고 변호사 등 엘리트가 강자만을 위해 일한다는 뻔한 설정을 살린 건 놀라운 디테일이다. 이 작품은 막연하지 않다. 일단 사건부터 실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삼성 기름 유출 사건, 현대건설 인수전, 동양 사태, 키코 사태 등 실제 사건을 연상케 하는 에피소드가 계속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작품의 묘사가 놀라운 수준에 이른 건 작품 중반에 재벌 회사채 문제를 다룰 때부터다. 여기서 재벌은 부실 회사채를 서민에게 팔아 현금을 챙긴 다음 부실 회사를 법정관리로 넘겨 부채를 청산하고 그렇게 깨끗해진 회사를 기왕에 챙긴 현금으로 다시 장악한다는 놀라운 꼼수를 선보이는데, 그것을 바로 차영우펌이 설계한다. 그동안 많은 드라마에서 재벌 비리나 경영권 관련 에피소드를 다뤘지만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사태의 흐름을 그려낸 작품은 드물다.

그 다음, 은행이 중소기업을 상대로 불량한 환율 파생상품을 팔아 국내 기업의 버팀목 역할을 해야 할 금융이 오히려 자국 기업을 상대로 약탈적 영업을 자행한 것 아니냐는 의혹 사건을 다룰 때 이 작품은 한국 드라마 누구도 성취하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경지를 보여줬다. 법정 장면에서 시청자들이 이해하기 힘든 금융 전문 용어와 수치를 난사한 것이다. 건국 이래 최초의 광경이다. 심지어 외국 사람을 출연시켜 외국어로 전문 용어 대사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 정도면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고 할 수 있다.

KBS ⓒ KBS 제공
어느 제작사가 모험을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놀라운 디테일은 로펌을 중심으로 권력과 재벌과 대형 은행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지 그 메커니즘을 세세히 그려낸 데서 빛난다. 그동안 ‘있는 놈들은 다 나쁘다’는 식의 드라마는 많았지만 누가 어디에서 어느 역할을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 ‘그들’의 이익이 관철되는지를 이렇게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은 없었다.

작품의 성취가 이에 이르자 일각의 찬사가 이어졌다. 동양 사태 피해자들이 촬영장을 찾아 야식을 제공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시청률은 한 자릿수로 초라했고 결국 조기 종영이 결정됐다. 이런저런 사건들로 결방이 이어져 방송이 지연됐고 배우 스케줄 문제로 인해 조기 종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방송사의 입장이다. 그러나 만약 시청률이 높았다면 조기 종영을 했을까. 어떤 식으로든 배우의 스케줄을 조정해 정상 방영, 심지어 연장 방영까지 하지 않았을까. 애초에 시청률이 높았다면 결방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궁극적으로 대중에게 외면받은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 사회 드라마가 야심을 보여주고 있다. <개과천선>도 그렇고, KBS의 <골든 크로스>도 그랬다. <골든 크로스>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떠올리게 하는 에피소드를 그렸는데, 그 과정에서 BIS(자기자본비율)가 조작되고 대형 로펌이 외국 자본을 대리하며 전·현직 고위 경제 관료와 금융계 인사들이 마피아를 형성해 사익을 추구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개과천선>과 <골든 크로스>가 야심 찬 시도인 것은 이 작품들이 금융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금융은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한 부문이지만 너무 복잡하다. 결정적으로 수치가 많이 나온다. 이런 특성은 드라마 시청률의 황금률에 위배된다. 드라마는 시청각적인 자극을 통해 바로바로 흐름이 인지돼야 하고, 익숙하고 기막힌 스토리를 통해 시청자의 마음을 잡아끌어야 한다. 따라서 건조하고 복잡한 금융의 세계는 시청률의 적일 수밖에 없다.

제작진이야말로 누구보다도 그런 사정을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금융의 세계로 나아갔다. 이건 국민을 믿은 모험이다. 한국 사회의 정말 중요한 지점을 그려내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국민은 이 작품을 외면했다.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를 그렸고 특히 <개과천선>의 경우 전인미답의 디테일까지 공들여 표현했지만 돌아온 건 철저한 냉대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느 작가, 어느 제작사가 또 이런 모험을 할 수 있을까. 조기 종영 발표 이후 <개과천선>의 완성도가 급격히 떨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결국 제작진은 막장 드라마, 신데렐라 멜로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한국 드라마의 판에 박은 듯한 설정을 비웃지만, 드라마의 수준을 결정하는 건 결국 국민 자신이다. 막장 드라마는 막장 시청자가 낳은 결과물인 것이다. 우린 결국 불륜, 복수, 신데렐라 극만 보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