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안과 유병언
  • 김인숙 | 소설가 ()
  • 승인 2014.07.0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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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의 소설 <생강>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소재로 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안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자기 집 다락방에 숨어 도피 생활을 한다. 어느 날 아버지 안이 고문 기술자임을 알게 된 그의 딸 선의 인생은 그때부터 달라진다.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해서 폭력이 아닌 것은 아니다. 고문 기술자의 딸은 아무 잘못도 없이 단지 그런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재 자체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는다.

그러는 동안 고문 기술자는 다락방에 숨어 무엇을 했을까. 그는 후회하거나 잘못을 비는 대신 자신의 정의를 믿었다. 그의 정의는 애국이었고, 폭력과 고문은 애국적인 수단이었다. 이근안도 마찬가지였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10년 동안의 도피 생활 중 이근안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자기 집이었다. 그 후의 행적으로 보건대 10년의 도피 생활 동안 그가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했던 짓들을 뉘우친 적이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사라 제인 올슨이라는 여자가 있다.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과격 테러단체인 SLA 멤버였다. 사라 제인 올슨은 1975년에 수배되었지만, 그 후 20년 넘게 종적을 알 수 없었다. 1999년에야 체포되었는데, 본명이었던 솔리아를 버린 것은 물론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오랜 도피 생활과 죄책감으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채 살아가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존경받는 의사선생님의 아내로, 적극적이며 선의로 가득 찬 자원봉사자로, 상냥하고 따듯한 이웃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체포되면서 과거 전력이 알려졌을 때 이웃들은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고, 그를 비난하는 대신 그를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두 도피자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짐작하실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유병언에 대한 보도가 나오지만, 정작 체포가 가까웠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신도들의 자발적인 보호와 은닉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일 터이다. 유병언의 도피를 돕는 신도들은 이 사건을 종교적 탄압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이근안은 고문을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여겼고, 표창과 훈장을 받았다. 사라 제인 올슨은 어땠을까. 그 오랜 도피 생활 동안 그는 자신이 믿었던 것을 부정하면서 죄책감 속에서 살았을까.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있었을까. 어느 쪽이어도 무섭기는 마찬가지다.

세월호는 국민 모두를 상처 입힌 참사였다. 참사의 원인이 낱낱이 밝혀지지 않는 한 완전한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다. 소설 속에서 안이 좀 더 빨리 잡혀 단죄를 받았다면, 안의 딸 선의 인생은 조금쯤은 나아졌을지 모른다.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하더라도 약간의 치유는 받았을 수 있다. 물론 그를 단죄하는 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안의 경우, 고문 기술자였던 그의 죄도 단죄 받아야 하겠지만, 그를 고문 기술자로 만든 구조와 권력과 신념들도 단죄 받아야 했을 것이다. 구조와 권력과 신념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 철저히 밝혀져야 했을 것이다. 유병언과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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