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한강변에 우동집과 ‘현지처’가 터를 잡다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4.07.10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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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이촌동 한강맨션, 우리나라 최초의 중산층 주거단지.

나지막한 초가나 산꼭대기로 기어 올라가듯 이어지던 판잣집, 미니 2층 양옥은 이제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됐다. 아파트 덕택(?)이다. 1980년대 전체 주택의 20%에 머무르던 아파트가 2011년 기준으로 47.1%로 단독주택의 39.6%를 넘어섰다. 아파트가 기하급수적으로 세를 불린 것은 네모난 콘크리트 입방체가 중산층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역사는 1958년 서울 종암동에 ‘공동주택’인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시작됐다. 지금은 재개발로 사라진 종암아파트는 한국 최초의 아파트로, 국내에선 처음으로 수세식 변기를 설치한 아파트였다.

‘아파트는 부의 상징’ 인식 확산

이후 대한주택공사가 연탄보일러를 설치한 마포아파트(1961~64년)를 완공하면서 ‘아파트 단지’가 탄생한다. 마포아파트는 철근콘크리트 조에, 입식 생활을 전제로 내진 설계까지 적용된 최고급 아파트였다. 이즈음 한국 최초의 군인 아파트도 용산에 들어섰다. 하지만 아파트의 역사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1956년 서울 종로구 행촌동의 한미재단주택이 그것이다. 일명 행촌아파트라 불리는 한미재단주택에는 2층 연립주택 11동 52가구, 단독주택 11가구, 48가구의 3층짜리 아파트 3개동이 있었다.

남산 회현아파트 ⓒ 정준모 제공
1965년에는 동대문아파트가 완공됐다. 얼마 전 영화 <숨바꼭질>에 등장한 7층짜리 중정형 아파트로 중앙에 지붕이 없는 ㄷ자 형태의 정원을 둔 독창적인 구조 때문에 9평 크기의 작은 집임에도 최고급 아파트로 명성을 날렸다. 같은 해 대한주택공사는 시내 한복판에 정동아파트를, 또 1970년에는 회현 제2시민아파트가 마지막 시민아파트로 완공된다. 남산의 경사면에 지은 이 건물은 와우아파트 붕괴로 보강공사를 해 튼튼한 아파트의 본보기가 됐다. 지형을 이용한 구름다리나 ㄷ자 형식의 건물 형식, 입주자가 각각 창문을 선택해서 독특한 외관을 자랑했던 이 아파트의 첫 입주민은 대부분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서민을 위한다는 회현·동숭·본동·금화·청운·응암·금호·삼일 시민아파트는 부지난 탓에 주로 산 중턱 경사면에 지어져 교통이 불편해 다시 슬럼화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시민아파트는 완공된 지 불과 10여 년 만인 1970년대 후반부터 철거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세운상가가 완공된다. 김수근의 설계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인 이 상가아파트는 청계천변의 불법 판자촌을 대체했다. 세운상가는 당시 부자나 권력자가 주로 거주하는 ‘부촌’으로 출발해 1970~80년대에는 전자산업의 중심지로 군림했다. 현재는 철거와 리모델링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가 돼 처량하게 종묘를 굽어보며 서 있다. 청계천으로 흘러내리는 개천을 복개해 길을 내고 그 위에 가로질러 세운 주상복합 낙원상가도 1968년 완공됐다. 아파트 허가가 날 수 없는 땅에 지어진 건물이라 당시 권력층과 건설업자의 치부 수단으로 ‘아파트 열기’가 활용된 샘플로 남아 있다. 지금도 낙원상가는 철거 논란에 시달리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는 ‘선진 기술’의 전수와 지도를 위해 많은 외국인이 들어왔다. 이들은 대개 한국의 일급 호텔인 조선호텔이나 도큐호텔 등에 머물렀다. 때문에 외국인 장기 체류자를 위한 주거시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세운 것이 지하 1층, 지상 11층의 고층(?) 힐탑아파트(1967~68년)다. 대한주택공사가 일본 다이세이(大成)건설이 제공한 현물 차관으로 지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중앙 난방 시스템, 에어컨, 전화기, 엘리베이터가 설치됐다. 공법상으로도 국내 최초로 1층에 기둥을 세워 비워두고 2층부터 건물을 짓는 ‘필로티 구조’를 도입했고 외관은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옥상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정원을 두었다. 커뮤니티 개념이 처음 도입된 것이다. 하지만 힐탑아파트만으로는 장기체류 외국인을 위한 숙소가 모자랐다. 그래서 다시 남산 기슭에 16, 17층 규모로 2개동의 남산외인아파트를 세운다.

이후 맨손으로 몸만 가지고 들어가면 살 수 있다는 ‘맨션’이 아파트 열기에 기름을 붓는다. 한강에서 멱 감고 물놀이하던 시절 실제와 똑같은 모델하우스가 등장해 화제가 됐던 동부이촌동의 한강맨션(1969~70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식 중온수 공급 보일러를 장착한 획기적인 아파트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가 완공되면서 동부이촌동은 이태원과는 또 다른 ‘해방구’가 됐다. 각종 외국산 식료품은 물론 와인과 치즈까지 구할 수 있는 작은 ‘도깨비시장’이 형성됐고 일본인 기술자가 많이 살아 우동집, 돈가스집 그리고 ‘현지처’라는 이름의 여성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로 33명 사망  

1968년 밤섬이 폭파되고 1970년 서울대교(현 마포대교)가 완공되면서 여의도의 ‘상전벽해’가 시작된다. 중산층을 위한 12층 규모의 24개동을 갖춘 대규모 여의도시범아파트(1970~71년)는 국내에선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와 스팀 난방 시설을 자랑하는 아파트로 신부유층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됐다. 당시만 해도 엘리베이터에는 엘리베이터걸이 배치돼 조작법을 가르쳐주거나 대신 조작해주는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자 ‘성공의 거처’인 동시에 ‘진정한 도회인 주거 양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수요가 급증했다. 한강 남쪽에 세워진 최초의 거대 아파트 단지로 ‘남서울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세워진 반포차관아파트(1971년)는 수요가 몰리자 은행알 추첨 방식으로 입주자를 뽑아야 했다. 이때부터 이른바 ‘계급 상승 욕구’와 ‘폐쇄적 공동체관’ 그리고 ‘분양가 폭리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부동산 붐으로 이어졌다. 이후 특권층에 대한 특혜 분양 사건으로 더욱 유명해진 압구정 현대아파트(1975~77년)와 잠실지구(1976년)가 조성되면서 아파트의 역사는 ‘복부인’과 ‘떴다방’이라는 신종 직업을 대동하고 부동산 투기로 이어졌다.

아파트의 역사에서 우리는 와우아파트(1969~70년)를 기억해야 한다. 당시 서울시는 불량 주택과 판잣집, 무허가 주택을 헐고 시민아파트를 계속 건립했다. 이렇게 세워진 수많은 아파트 중 마포구 창전동에 세운 와우아파트가 6개월의 짧은 공사 끝에 완공된다. 하지만 입주 20여 일 만에 폭삭 주저앉으면서 사망 33명, 부상 40명의 인명 사고가 나고 말았다. 날림공사가 원인이었다. 그리고 1971년 광주 대단지 주민 소요 사태가 발생하면서 시민아파트 건설 계획 백지화 논의가 일기 시작한다. 이 두 사건은 아파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지만, 고급 아파트를 향한 ‘중산층’의 욕망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연스레 시민아파트는 사라지고 아파트는 중산층을 위한 것이라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부실공사가 부실한 기억 때문에 잊힐 무렵 가수 조영남이 <신고산 타령> 가사를 즉석에서 바꿔 “와우아파트 무너지는 소리에 얼떨결에 깔린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누나…”라고 불렀다가 강제 입대를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결국 한강변은 콘크리트 무덤 같은 아파트로 도배됐지만 서민에게는 소주 한잔하고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나’ 돌아가는 재산 증식의 지렛대, 꿈속의 이상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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