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머신 대부’ 정덕일 “경매 사기 당해 300억 땅 날렸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4.07.23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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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검에 고소장 제출…“변호사법 위반 등 조사해 달라”

한때 슬롯머신업계의 대부로 불렸던 정덕일씨가 최근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3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슬롯머신 사건’으로 정씨가 수사를 받았던 곳이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이었다. 하지만 그때와 방문 목적이 달랐다. 과거 수사의 대상이었던 그가 이번에는 수사를 의뢰하기 위해 검찰을 찾은 것이다. 정씨는 자신이 소유했던 제주도 부동산을 ‘경매 사기’를 당해 헐값에 빼앗겼다며 진정서에 이어 고소장을 제출했다.

카지노 호텔 무산, 3만평 경매 넘어가

정씨는 YS(김영삼) 정권 출범 직후 형 정덕진씨와 함께 ‘문민 검찰’의 첫 번째 사정 대상에 올랐던 인물이다. 슬롯머신 사업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시기였다. 정씨 형제를 수사한 검사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를 지낸 홍준표 경남도지사다. 홍 지사는 이후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세를 탔고, 이는 그가 정계에 진출해 성공하는 발판이 됐다.

정덕일씨가 7월16일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슬롯머신 사건은 노태우 정권 시절 최고 실세였던 박철언 의원이 구속되는 등 당시 정치 지형을 뒤흔들 정도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TK(대구·경북)에서 PK(부산·경남)로 권력의 중심이 바뀌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박 의원이 징역 1년6월형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한 데는 정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국세청 세무조사를 무마해달라며 5억원을 건넸다는 그의 진술이 ‘6공 황태자’의 발목을 잡았다. 군사정권에서 문민정권으로 바뀌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정씨가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정씨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서서히 멀어졌다.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에 이름이 올랐던 그지만 차츰 잊힌 인물이 돼 갔다. 그런 정씨가 최근 검찰을 찾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사저널은 그가 작성해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했다는 진정서와 고소장을 입수했다. 또 정씨를 만나 직접 얘기를 들어봤다.

이에 따르면, 정씨는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일대 땅 44필지 9만8234㎡(약 3만평)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 대형 카지노호텔을 건립할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2006년 3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컨설팅회사와 MOU(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이 회사를 통해 세계적 카지노호텔 그룹인 MGM을 제주도에 유치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2008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미국 월가의 금융위기로 MGM의 대주주인 투자은행 리먼 브러더스가 파산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제주도 카지노호텔 건립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정씨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011년 12월 솔로몬저축은행이 제주지방법원에 이 부동산에 대한 임의경매를 신청했고, 이듬해 1월 경매 개시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그가 운영하던 (주)벨루가에서 2007년 12월 ㅅ저축은행으로부터 60억원을 대출받으면서 해당 부동산에 근저당권을 설정해준 게 발단이 됐다. 당시 갚아야 할 대출 잔액은 42억5000만원이었다.

정덕일씨가 소유했던 제주도 부동산과 위치.
“시세 300억 부동산 67억에 낙찰”

이에 2012년 4월 원금 및 이자를 정리하기 위해 19억여 원을 중도 상환했는데, ㅅ저축은행이 BIS 비율(국제결제은행 기준에 따른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맞춘다는 이유로 이자는 공제하지 않고 잔여 원금만 상환 처리했다. 한 달 뒤 ㅅ저축은행이 파산하면서 근저당권은 부실채권이 돼 예금보험공사를 통해 그해 9월 ㅇ저축은행으로 넘어갔다. 정씨는 원금만 중도 상환돼 불어난 연체 이자는 부당하다며 감면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경매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정씨는 2013년 7월 친구로부터 ‘경매 업무의 지존’이라는 ㄴ법무법인의 김 아무개씨를 소개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변호사 선임 명목으로 세 차례에 걸쳐 5000만원과 대법원 직원 인사 명목으로 600만원을 김씨에게 현금으로 지급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약정서도 작성하지 않고 영수증도 받지 못했으며 변호사와 면담한 사실도 없다고 밝혔다. 정씨는 자신이 지급한 비용 대부분을 김씨가 챙긴 것으로 보인다며 그를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조사해달라고 검찰에 요청했다.

한 차례 경매가 유찰된 부동산은 2013년 11월 ㅈ영농조합법인에 낙찰됐다. 이때까지도 정씨는 대법원 판례에 비춰볼 때 분할 매각이 아닌 일괄 매각이 이뤄져 매각 결정이 취소될 것이라는 김씨의 말을 믿고 돈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올해 4월 매각 허가 결정에 대한 이의신청이 대법원에서마저 기각되면서 5월16일 해당 부동산의 소유권은 ㅈ영농조합법인으로 이전됐다.

정씨는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던 김씨와 ㅈ영농조합법인의 실질적인 소유주 중 한 명이라는 ㅍ주식회사의 최 아무개씨, 중간에서 낙찰을 도운 이 아무개씨 등이 공모해 부정 경매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매 낙찰가는 67억7700만원이었는데 이씨가 67억1500만원, ㅈ영농조합법인 전직 임원이자 ㅍ주식회사의 현직 임원인 유 아무개씨가 66억6000만원에 각각 입찰해 담합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해당 부동산의 경우 중국 투자자들의 관심이 높아 시세로 30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땅 되찾지 못해도 명예만은 되찾고 싶다”

7월16일 기자와 만난 정씨는 “슬롯머신 사건 이후 사업에 신경을 안 쓰다가 인생을 명예롭게 마무리하고 싶어 MGM을 제주도에 유치하는 데 ‘올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에다 지능적인 경매 사기를 당해 그나마 남은 땅마저 헐값에 날려버렸다”며 “돈도 명예도 다 잃고 나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유서까지 썼다”고 밝혔다. 그는 “돈은 되찾지 못하더라도 명예는 되찾고 싶다”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정씨가 ‘경매 브로커’로 지목한 ㄴ법무법인 김씨의 입장을 듣기 위해 7월18일 그의 휴대전화로 연락을 했지만 받지 않았다. 기자 신분을 밝히고 ‘제주도 부동산 경매에 대해 확인할 게 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사무실에도 연락처를 남겼는데 답신은 오지 않았다.

정씨가 부동산을 낙찰받은 ㅈ영농조합법인의 실소유주 중 한 명이라고 밝힌 최씨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김씨와 마찬가지로 ‘경매 브로커’로 지목된 이씨의 휴대전화로 연락하자 “모르는 사람인데 전화한 사람은 누구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시사저널 기자라고 밝힌 후 번호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자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1992년 12월19일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서울 상도동 자택 앞에서 주민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김영삼(YS) 대통령이 취임한 지 두 달 남짓 지난 1993년 4월 중순 서울지검은 당시 슬롯머신업계의 큰손으로 불리던 정덕진·덕일 형제에 대한 본격적 내사에 들어갔다. 검찰은 먼저 형 정덕진씨를 겨냥했다. 연일 언론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검찰에 자진 출두 의사를 밝혔다. 약속 당일인 5월3일 홍준표 검사는 오후까지 기다리지 않고 이날 새벽 호텔로 수사관들을 보내 잠자고 있던 정씨를 체포했다.

당초 슬롯머신 대부로 소문난 사람은 형 정덕진씨였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점점 동생 정덕일씨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그가 실질적인 자금 관리를 해온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특히 이전 정권의 2인자였던 박철언 의원에게 돈을 건넨 것이 정덕일씨로 알려지면서 수사진은 그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정씨 형제는 이미 노태우 정권 시절인 1990년 9월부터 6개월 동안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다.

정씨는 “당시 우리가 김대중 총재의 평민당에 정치자금을 댔다는 게 이유였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어쨌든 이를 무마하기 위해 10만원권 수표 5억원이 든 가방을 박 의원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후 검찰 수사를 받게 된 박 의원은 정치 보복이라며 금품 수수를 끝까지 부인했다. 하지만 박 의원은 물론 엄삼탁 전 안기부 기조실장, 이건개 전 대전고검장 등 실세들이 줄줄이 구속됐다.

정씨 형제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큰형 정덕중씨가 강원도 원주에서 정치를 하던 게 인연이 돼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YS의 선거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특히 정덕일씨는 연예인 동원력이 뛰어났다. 이전부터 유명 연예인들을 이끌고 군 위문공연을 자주 다녔다. 마음이 맞는 연예인에게는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까지 거액을 선뜻 내줬다고 한다.

정씨는 “YS가 대통령에 당선돼 축하드리러 가니까 ‘정씨 형제들 고생 많이 했다. 청와대 가면 제일 먼저 가족들을 초대할 테니 칼국수나 같이 먹자’고 하시더라”고 회상했다. 그는 “YS가 친아들처럼 대해줬다”고 말했다. 하지만 몇 달 뒤 “국수는 빼고 칼만 맞은 셈이 됐다”고 했다. 정씨는 “YS의 뜻은 아니었을 것”이라며 “새 정권의 황태자가 된 김현철씨가 슬롯머신을 도구로 삼아 TK 세력을 무너뜨리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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