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00일] “딴것 필요 없어, 딸애가 왜 죽었나 그것만 알고 싶어”
  • 김지영 기자·손가영 인턴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4.07.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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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아들딸 묻고 ‘진실’ 갈구하는 세월호 희생자 네 가족

그날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100일 가까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다 수수께끼다. 수수께끼를 해결할 방법도 수수께끼다. 유가족은 때론 버스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때론 법정에서, 때론 국회 바닥에 앉아 국회를 노란 배로 수놓으며 진실을 갈구했다. 남겨진 가족들의 사랑·분노·증오·공포 같은 것을 어떻게 수집할 수가 있을까. 시사저널은 2주간 희생자 가족을 밀착 취재했다.

#1 수진이(17·여)네 다섯 가족 이야기

 아빠의 몸은 이제 53kg이 됐다. 키는 175cm 정도. 겨우 60kg을 유지했었는데 ‘그날’ 이후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누가 봐도 숫기가 없는 아빠였다. A형 가족이라고 아빠는 소개했다.

“서명해주세요.” A형인 아빠는 처음엔 좀체 입을 떼지 못했다. 왠지 부끄럽고 그랬다. 그러던 아빠가 바뀌었다. 서명용지와 펜을 들고 지나가는 시민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녔다. 그래야 한 명이라도 더 서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지난 100일간의 시간이 알려줬다.

일은 그만뒀다. 수진이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을 할 수 없었다. 수진이는 실종자 29명 중 한 명이었다.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못 찾을 줄 알았는데,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와 ㄴ화장품 소지라는 글자만으로 수진이라는 걸 알아챈 애 엄마의 눈썰미가 신기했다. 큰딸이라 아빠랑 친했는데 엄마는 역시 엄만가 보다 싶었다.

7월17일 임시국회가 끝나 텅 빈 국회를 채운 건 단원고 엄마·아빠가 고이 접은 노란 종이배였다. ⓒ 시사저널 이종현
처음엔 보기도 싫던 YTN 뉴스는 이제 수면제가 됐다.  수진이를 보내고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보다 뉴스가 더 효과가 좋았다. 체육관에서 하도 그 생활을 해서 그런지 뉴스가 나오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좋은 곳으로 보내주자고 수진이의 물건은 얼마 전 다 모아 소각장에서 태웠다. 안 그래도 깜깜한 데서 혼자 무서웠을 수진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방의 불만큼은 끌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100일 동안 수진이 방은 낮에도 밤에도 불이 켜져 있다.

애 엄마는 자다가도 수진이 방에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한다. 초등학교 5학년생인 막내아들은 그런 엄마가 걱정돼 한동안 울지 않았다. “큰누나 보고 싶으면 마음껏 울어도 돼”라고 말하자 그제야 엉엉 울어댔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보는 내내 가슴이 미어졌다. 비슷한 또래의 초예(17·단원고 2년, 사망자) 엄마의 막내는 장염에 걸렸다고 하는데 걱정이다.

제일 걱정되는 건 중3인 둘째 딸이다. 식구 중에서 유일하게 O형인 둘째는 분위기 메이커였는데 누구보다 빨리 말을 잃었다. 공부는 안 해도 재즈댄스만큼은 열심히 했는데 이젠 재즈댄스 수업에도 나가지 않는다. 전화를 더 자주 하고 싶고 챙기고 싶어도 남은 애한테 집착하면 애가 부담을 가져서 더 힘들어한다는 상담자의 말을 믿고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세 잎 클로버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행복이래요. 막내 놈이 어느 날 묻더라고. 왜 사람들은 행복을 놔두고 행운을 찾아다니는지 모르겠다고. 그러게 왜 그랬을까요?”

#2. 외동딸 진아(17·여)네 이야기

경기도 화성에 있는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이 끝나자마자 그는 캔맥주를 들이켰다. 성함을 묻자 ‘진아 아빠’라고만 했다. ‘진아 아버지’라고 수첩에 쓰니 “아버지 말고 아빠”라고 정정해준다. 맥주를 쥔 손이 새까맸다. 땡볕에도 모자를 쓰지 않은 탓이다. 모자라도 쓰라는 말에 “타야죠”라고 미소를 지으며, 그는 새까만 얼굴을 매만졌다.

진아는 부인병이 있는 아내가 각고의 노력으로 3년 만에 가진 아이였다. 그리고 마지막 아이였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본 진아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진아 눈가의 눈물자국이 못내 마음에 걸리지만 고통 없이 갔을 거라고 믿고 있다. ‘물이 팍 들어와서 물 두 번만 먹고 죽은 거다.’ 아빠는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못 살 것 같다. 아빠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했다. 진아를 볼에 비벼도 보고 다 해봐서 복 받은 거라고.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슬픈 이야기인데 그의 입술에는 끝까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빠는 ‘똑순이’하고 단둘이 있을 때만 숨죽여 운다. 똑순이는 진아가 키웠던 고양이다. 그날 사고 이후 안 그래도 아픈 애 엄마 들을까 봐 크게 울 수가 없다. 집에서는 뉴스를 보지 않는다. 국회로 나올 땐 애 엄마에게 코미디 프로그램을 틀어주고 나온다. 절대 뉴스를 보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웃음을 잃은 애 엄마에게 지금 현실을 알려주기가 불안하다. 그래서 안산을 뜰 생각이다. 얼마 전 화성에 집도 구했다. 이제는 진아 방도 예쁘게 꾸며줄 수 있을 만큼 자리 잡았는데 진아가 없다.

진아와 엄마는 안산에서 지냈다. 아빠는 충북 진천에서 전선 만드는 일을 했다. 진아가 진천에서 아빠와 같이 살고 싶다고 졸랐는데 공부하라고 내쳤다. 못 배운 아빠의 일종의 한풀이였다. 서울엔 못 가더라도 서울 근처라도 살면 아이가 자신과 다르게 떵떵거리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평생의 한으로 남을 줄 몰랐다.

“사람들은 그렇게 정부에서 돈 많이 준다는데 왜 이거 하느냐고 하더라고. 나는 솔직히 이거(농성) 필요 없어. 솔직하게 나는 왜 (진아가) 죽었나, 그것만 알고 싶어.”

#3. 준영이(17·남)네 엄마 이야기

오늘도 준영 엄마는 노란 종이배를 접는다. 접는 손이 떨린다. 수면제에 신경안정제까지 먹었는데도 온몸의 떨림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다. 종이배는 경찰이 국회에 못 들어가게 정문을 걸어 잠그고 가족들에게 실소를 머금는 ‘나으리님들’의 얼굴을 의연하게 지켜볼 수 있도록 해주는 자존심이자 비극적 상징물이다. 참담한 이 상황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그것이 굳어져 마음속에 화석이 될 때까지 엄마는 손에서 노란색 종이를 거두지 않는다. 다섯 개만 접어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는 무더위가 야속할 따름이다.

엄마는 새벽 4~5시가 되면 눈이 자동적으로 떠지고 입이 돌아가는 것 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 그래도 병원에 갈 수 없다. 먼저 간 준영이에게 미안해서다. 엄마는 병원 대신 매일 아침 국회에 온다.

얼마 전 옆집에서 힘내라며 닭 한 마리를 보내줬다.  준영이는 닭을 좋아했다. 냉장고를 열고 닭을 보며 울다 엊그제 그냥 버렸다. 얼마 전 준영이가 잠든 하늘공원에 가서 준영이 영정 사진에 장식을 해주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준영이를 놀리는 것 같아서다.

엄마는 준영이가 ‘멘붕’이라고 할 때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뜻을 몰랐는데, 자신이 딱 그 ‘멘붕’ 상태다. 집에서 밥 먹는 사람이 없어 밥솥에 밥을 못 하고 냄비밥을 하는데 하루는 국이랑 헷갈려서 밥에다 소금을 팍팍 쳤다. 집에서 물 마시는 사람도 없다. 정수기에 이끼가 낀 것 같다.

엄마는 트라우마센터에 못 간다. 가슴에 화는 쌓이는데 생판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 화를 꺼내기가 왠지 부끄럽고 자존심 상한다. 그렇다고 친구나 친정에 의지하고 싶지 않다. 남에게서 듣는 ‘힘내라’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을 수 없다. 엄마는 운전할 때나 소리를 내 운다. 그걸 아는 지인이 토방 같은 곳을 소개시켜줬다. 혼자 들어가서 소리 지르고 하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그것도 께름칙하다. 종교적인 곳 같아서다. 울 곳이 없는 엄마는 매일 아침 국회에 오고 광화문에 서명운동을 하러 간다. 국회가 진도체육관, 광화문이 팽목항 같아서 몸서리가 쳐지지만 그래도 이곳이 세상천지에서 제일 낫다.

참담한 이 상황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그것이 굳어져 마음속에 화석이 될 때까지 엄마들은 손에서 노란색 종이를 거두지 않는다. ⓒ 시사저널 이종현 ‘그날’ 이후 아버지는 시인이 됐다. 아버지는 구멍 난 가슴을 시로 채워갔다. -고(故) 김초원 선생님 아버지가 쓴 자작시
#4. 유니나 선생님(28·여)의 아버지 이야기

그날 이후로 54일이 지나서야 딸을 볼 수 있었다. 너무 시일이 지나서 딸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딸보다 하루 전날 찾은 실종자는 얼굴이 너무 부패돼 그나마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여긴다. 물에 퉁퉁 분 딸 얼굴도 예뻤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과 영락없이 닮았다.

“에고 그렇게 탤런트 시험 못 보게 하고 핵교 선생님이라도 하라고 해쌌더만, 지금 탤런트 붙었으면 방송국에 있었을 거 아니요?” 옆에 ‘초원 선생님’ 아빠가 자꾸 타박을 한다. 그래도 밉지 않다. 역시 이번 사고로 사망한 단원고 김초원 교사(25·여)의 아빠로, 이번 사고 이후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동남아 소개시켜줄까? 동남아 뜻 모르제? 동네에 남아도는 아줌마라고.” “치아라 마!” “치우라면서 입맛은 와 다시는데?” 누가 들으면 욕을 할, 말도 안 되는 농도 할 만큼 이제는 가까워졌다. 니나 선생님과 초원 선생님도 생전에 이처럼 가까웠을까.

그날, 진주에서 곧장 진도로 내려갔다. 이제 곧 수확할 매실은 안중에도 없었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자라는 모습이 자식들 같아서 지은 매실농장이었는데 벌써 못 본 지 90여 일이다. 그날, 진도체육관에서 딸아이의 남자친구를 처음 만났다. 그 전에는 남자친구가 있는지도 몰랐다. 딸애 남자친구는 두 달 내내 진도를 왔다 갔다 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착한 아이 같았다.

바람을 쐬러 국회 밖으로 잠깐이라도 나가고 싶어도 유가족 버스가 국회를 떠나야지만 그제야 잠깐 국회 밖으로 나온다. 눈치 주는 사람은 없어도 눈치가 보인다. 같이 자식을 잃었어도 딸은 학생을 지도해야 할 선생님이라는 이유에서다. 혹시라도 우리 애를 원망하진 않을까 하는 못난 자격지심이다. 그래서 대부분 혼자 다닌다. 실없는 소리라도 해주는 초원 선생님 아빠가 동기간 같다.

농성이 길어질수록 유가족에게 미안함이 더 커진다. 본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사람들은 십 몇 년씩은 더 일해야 할 사람들인데 이렇게 발이 묶여 있는 게 답답하다. 얼른 끝났으면 좋겠는데…. 유가족이 제일 바라는 게 수사권과 기소권인데 지금으로선 둘 다 불가능해 보인다. 청문회 식으로 이 사건이 묻혀버릴 것 같아 불안하다.

“유니나 선생 아빠 노모는 살아 있는가? 나는 공주에 노모가 있는데 말도 못혔어. 동네 사람들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네. 나중에 유학 갔다고 말해야지.” 초원 선생님 아버지 말에 담배가 간절히 당긴다. 생전에 딸이 담배 피운다고 구박을 많이 했는데….

왜 그렇게 무뚝뚝하게만 대했을까. 남들처럼 모바일 메신저도 할 줄 모르는 촌스러운 아빠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울음 같은 한숨을 토해낸다. 아까 낮에 딸아이가 가르쳤던 아이들이 국회에 왔다. 딸이랑 10년 후에 어떤 모습일지 쓰고 어딘가에 꼬불쳐 놓았다고 했는데, 그게 뭐였는지 알려줬는데 벌써 까먹었다. 애비가 딸을 대신해서 그거 10년 후에 열어줘야 하는데, 그거라도 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오늘도 국회에서 잠을 자야 한다. 더위보다 허리 통증보다 모기가 더 무섭다. 세월호 가족들에겐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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