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10년 프로젝트’ 1조원 쏟아붓다
  • 서호정│축구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07.2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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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힘 뢰브 감독에게 8년 맡겨…한국은 4년 동안 감독 3번 바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 이 진부한 격언을 독일이 월드컵에서 증명했다. 독일은 7월14일 벌어진 2014년 브라질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고 통산 네 번째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번 대회에서 독일은 공수에 걸쳐 가장 완벽한 축구를 펼치면서 남미 축구의 양대 산맥이라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모두 격파했다. 21세기 최고의 축구 천재라는 리오넬 메시도 독일의 조직력 앞에서는 평범한 선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유럽 팀이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독일의 이번 월드컵 우승은 실패에서 태어났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독일 축구는 역사상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는 처음 출전한 크로아티아에 0-3으로 완패하며 8강에서 탈락했다. 유로(유럽선수권) 2000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쓴맛을 봤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결승에 진출하며 저력을 증명하는가 했지만 2년 후 유로 2004에서 또다시 조별리그 통과에 실패했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헝가리를 꺾고 첫 우승을 차지한 ‘베른의 기적’ 이후 늘 세계 축구의 중심에 섰던 독일은 심각한 자괴감에 빠졌다. 공영방송에서는 TV 대토론회를 열었다.

ⓒ AP 연합
그리고 10년이 지나 독일은 24년 만의 월드컵 우승으로 다시 황금기를 열었다. 그 10년간 독일 축구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10년 앞 내다본 재건 프로젝트

요아힘 뢰브 독일 대표팀 감독은 결승전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오늘의 우승은 10년 프로젝트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월드컵과 유럽선수권에서의 거듭된 실패는 유망주 부재가 빚은 재앙이었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우승 당시의 주역인 로타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등이 10년간 팀을 떠받쳤다. 그들의 뒤를 이을 유망주를 키우지 못하자 대표팀은 급격한 노쇠화를 겪었고 젊고 활력 넘치는 팀들에 무너졌다. 독일 축구계의 결론은 간단했다. 뿌리를 다시 튼튼히 만들자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유소년 시스템과 지도자 교육 투자였다. 축구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인 만큼 좋은 선수와 그들을 길러낼 좋은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답이 나왔다.

독일축구협회와 독일축구리그연맹은 2002년부터 분데스리가 1, 2부 리그에 참가하는 모든 구단에 반드시 유소년 시스템을 운영하도록 지시했다. 전국 각지에 협회 차원에서 유소년을 훈련시키고 지도자 강습회를 열 수 있는 훈련센터를 지었다. 지난 10년 동안 여기에 투자된 돈이 10억 유로(약 1조1000억원)가 넘는다. 지도자 라이선스 제도도 손을 봤다. 분데스리가 감독이 되기 위해선 유럽축구연맹 A라이선스를 소지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대신 협회에서 지도자 연수 프로그램을 재정적으로 지원해 다른 나라의 10분의 1 비용만 들여도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게 했다. 시간과 노력은 지도자의 몫이지만 금전적인 지원은 협회가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5000여 명의 A라이선스 지도자를 보유하게 됐다.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유망주 육성을 책임진다.

 이미 좋은 인프라를 구축한 상태에서 시스템 재정비가 이뤄지자 그 뒤부터는 선순환이 시작됐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것은 쉽지 않다. 위기도 있었다. 2006년 자국에서 치른 월드컵에서 독일은 4강에서 이탈리아에 패해 우승 도전이 좌절됐다. 실망감이 컸지만 시스템에 대한 투자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이들은 없었다. 협회가 의지를 갖고 투자를 이어갔다. 2009년 독일은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유럽 21세 이하 선수권에서 처음 우승을 했다. 당시 멤버가 마누엘 노이어, 토마스 뮐러, 메수트 외질, 자미 케디라, 베데딕 회베데스, 제롬 보아텡, 마츠 후멜스다. 이번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1986~88년생 황금 세대다. 그 뒤를 이어 마르코 로이스, 토니 크로스, 마리오 괴체, 안드레 쉬얼레 등 현 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이 줄줄이 배출됐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을 통해 본격적으로 메이저 무대에 등장한 황금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경험이었다.

 독일은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젊은 팀이었다. 30대 선수는 미로슬라프 클로제(1978년생), 로만 바이덴펠러(1980년생), 필립 람(1983년생) 3명뿐이다. 10년간 1조원을 쏟아부은 투자의 결실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독일이 배출한 황금 세대는 향후 두 차례의 월드컵을 더 책임질 수 있다. 현재 배출되고 있는 10대의 젊은 유망주들은 이미 유럽 명문 클럽의 주요 타깃이 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시스템 구축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 사례다.

7월14일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은 독일 팀이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철저한 준비 후엔 믿음과 인내

감독 선임과 그에 대한 지원 정책에서도 독일은 모범을 보였다.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 우승을 이끈 뢰브 감독은 2006년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후임으로 지휘봉을 잡은 이후 8년째 팀을 이끌고 있다. 독일은 지난 88년간 대표팀을 이끈 감독이 10명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재임 기간이 8.8년이다. 한국이 역대 단 한 번도 월드컵에 대비한 4년 임기의 감독을 가져본 적이 없고 이번 브라질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조광래·최강희·홍명보 3명의 감독이 취임했다가 사임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다.

 뢰브 감독은 과거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 SBS 해설위원과 함께 뛰었던 공격수 출신이다. 하지만 대부분 벤치 멤버였고 성공적이지 않은 선수 생활을 뒤로하고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6년 슈투트가르트 감독으로 프로 무대에 데뷔한 그는 좋은 성적을 내며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후 페네르바체(터키), 칼스루헤에서 잇따라 실패하며 오스트리아 리그 등 변방 무대를 전전했다. 독일축구협회는 기술위원회 추천으로 뢰브의 능력에 주목했다. 이름값이 떨어지고 실패를 거듭한 부분을 감안해 당장 감독으로 앉히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린 협회는 장기적 관점의 묘안을 냈다. 스타 출신의 클린스만을 감독으로 선임하고 뢰브를 수석코치로 선임한 것이다. 클린스만이 팀 운영과 대외 담당을 맡고 뢰브는 전술과 훈련을 책임졌다. 이 조합은 좋은 평가를 받았고,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클린스만이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협회도 자연스럽게 뢰브를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시켰다.

홍명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7월10일 브라질월드컵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 ⓒ 시사저널 최준필
4년도 내다보지 못하는 한국 축구

이후 뢰브 감독은 유로 2008 준우승, 2010년 남아공월드컵 3위, 유로 2012 4강의 성과를 냈다. 언론에서는 우승을 하지 못한다며 뢰브 감독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독일축구협회는 방패막이가 돼주며 뢰브 감독에게 신뢰를 보냈다. 그 결과 뢰브 감독은 월드컵 우승을 일궈냈고, 역대 독일 대표팀 감독 최고 승률도 기록 중이다. 독일축구협회는 이미 다음 월드컵 준비에 돌입했는데 2016년 계약이 끝나는 뢰브 감독에게 유로 2016까지 맡길 계획이다. 차기 감독 물망에 오르고 있는 토마스 투헬 전 마인츠 감독은 수석코치로 새롭게 독일 대표팀에 합류할 전망이다. 마인츠 돌풍을 일으키며 분데스리가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투헬을 키우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전임 감독의 유산을 계승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독일과는 정반대로 한국은 월드컵 이후 자중지란에 빠졌다. 2009년 20세 이하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해 각급 대표팀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던 홍명보 감독은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서의 뼈아픈 실패 후 여론에 떠밀리듯 사임해야 했다. 당초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감독을 예정된 계약 기간인 2015년 아시안컵까지 유임시키기로 했지만 들끓는 비난 여론을 견디지 못했다. 홍명보 감독은 부동산 계약 문제 등 개인사까지 들춰지자 물러났다. 홍명보 감독이 실패를 부른 자신의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건 맞지만 어떤 대안이나 연속성에 대한 논의와 준비 없이 감독 문책만 먼저 이뤄진 것은 문제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월드컵 이후 8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했다. 2002년에는 갈망하던 월드컵 첫 승과 16강 진출을 넘어 4강 신화를 쓰기도 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도 16강에 진출했고 박지성과 이영표를 필두로 유럽 진출이 급물살을 탄 결과 많은 젊은 선수들이 유럽에서 뛰는 중이다. 20년 전, 10년 전과 비교하면 분명 한국 축구는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큰 줄기의 계획 아래 이뤄진 것이 아니라 몇몇 감독과 주요 선수가 이뤄낸 요행에 가까운 결과인 것이 문제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년 일군 성과로부터 12년이 지난 이번 월드컵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봤다. 시스템이 아닌 소수의 인재에서 얻은 성과는 일시적인 것임을 확인했다.

월드컵이 끝난 후 언론과 팬들은 독일 축구를 보고 배우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독일 축구처럼 꾸준히 강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전술과 전략을 배울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배워야 한다. 그 시스템이 정착되기까지 끊임없는 투자와 인내가 필요하다. 여론을 피해가기 위한 일시적인 선택이 아닌 10년 후를 내다보는 계획과 일관성 있는 실행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번 월드컵에서 독일이 한국에 알려준 성공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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