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의 추억’ 콤비가 다시 뭉쳤다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08.06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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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감독 봉준호·각본 심성보, <해무> 제작자·감독으로 데뷔

<해무>의 시대 배경은 1998년 IMF 외환위기 때다. 경제 위기는 뱃일을 하며 입에 풀칠하던 이들의 일상에까지 들이닥쳤다. 사람들은 생명줄 같던 배를 버리고 다른 돈벌이를 모색한다. 여수에서 한때 잘나가던 배 ‘전진호’ 역시 이 흐름을 거스르기 어렵게 된다. 오직 뱃사람의 자부심 하나로 살던 선장 철주(김윤석)는 그 자신만큼은 바다를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먹고살 방법을 모색하던 그는 결국 바다 한가운데서 밀항자를 태우기로 마음먹는다. 그것이 파국으로 치닫는 길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다.

전진호의 선원들이 실어 나르는 사람은 ‘코리안 드림’을 안고 밀항하는 조선족이다. 이들은 한국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 하나로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배에 오른다. 그중 홍매(한예리)는 다른 사람들과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그녀는 6년 전 한국에 간 친오빠와 연락이 끊기자 그를 찾아가는 길이다. 전진호의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은 배에 오르다 바다에 빠진 홍매를 구한 이후 줄곧 그의 곁을 지킨다.

영화 ⓒ NEW 제공
전진호에 오른 모두가 절박하다. 영화의 배경이 1998년이 된 이유가 있다. 심성보 감독은 선원이 밀항자를 바라보는 관점, 즉 조선족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시선을 오늘날보다 더욱 극대화해서 보여주기 위한 시대 설정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갑판이 아닌 다른 곳을 쉼터로 내줄 것을 요구하는 조선족에게 분노한 선원이 “니들 IMF라고 알아? 지금이 어느 땐데 동포 타령이야”라며 탄압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시대적 배경에 먼저 관심이 가는 이유는 이 영화가 <살인의 추억> (2003년) 콤비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해무>는 봉준호와 함께 <살인의 추억>의 각본을 쓰고 현장 연출부를 거친 심성보의 감독 데뷔작이다. 봉준호는 처음으로 제작자의 위치에 섰다. 이들은 11년 전 영화에서 야만과 무능의 시대였던 1980년대의 한국 사회를 날카롭고도 능청스럽게 꼬집었다. 이에 반해 <해무>는 시대 배경이 크게 중요한 영화는 아니다. 대신 지향점이 뚜렷하다. <해무>는 시대보다 개인, 좀 더 정확하게는 인간은 어떻게 괴물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데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묻는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당신은 괴물이 되지 않고 인간성을 지킬 자신이 있는가.

비극은 뜻하지 않게 시작된다. 해경의 단속을 피해 어창에 갇혔던 밀항자들이 죽음을 당한 것이다. 낡은 냉각기가 터져 프레온 가스가 새어나온 탓이다. 아무도 이들의 죽음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미 시체는 산처럼 쌓여 있다. 철주는 결국 이 일을 바다에 묻기로 한다. 이 일은 모두에게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각자의 욕망과 두려움에 부딪치며 급격하게 무너진다.

인간성의 심연을 항해하는 <해무>

중반 이후 영화의 장르는 밀실 공포물로 전환된다. 망망대해에서 해무(海霧)에 둘러싸인 전진호의 상황 그 자체는 완벽한 고립이다. 해무라는 소재는 극에 적절한 긴장감을 부여하는 장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선원들은 두려워하고, 때론 이상한 방식으로 용기를 얻거나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공포에 떨며 미지의 존재와 사투를 벌였던 <미스트>(2007년)가 떠오르기도 하는 대목이다. 차이가 있다면 <해무>에서 공포의 존재는 외부에 있는 게 아니다. 공포는 사람의 내부에 있고, 그것은 관계와 인간성을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은 어떻게 변하는가.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는가. <해무>는 그 공포의 진창 안으로 서서히 관객을 끌어들인다.

이 영화의 원작은 극단 연우무대가 2007년 극단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올린 동명의 연극이다. <해무>의 엔딩 부분은 연극과는 확연하게 다르지만 공간과 캐릭터에는 어쩔 수 없이 연극적인 색채가 꽤 강하다. 각 인물은 사건 전후에 원래부터 그렇게 행동하도록 설정된 인상이 강하다. 특히 문성근이 연기한 완호와 이희준이 연기한 창욱 캐릭터의 행동은 조금은 급작스러운 면이 있다. 각 캐릭터가 몹시 뚜렷하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끝까지 인간성을 지키려고 하는 거의 유일한 인물은 동식이다. 그에게 인간성은 곧 홍매를 향한 사랑이다. 봉준호가 “영화로 만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는 <해무>가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와 ‘인간이라면 저렇게 할 수밖에 없겠구나’라는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항해에 나선 사람들. 그들의 절박함과 욕망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기이한 <해무>의 비극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다만 배 안에 갇힌 평범한 사람들,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해야 하기 때문에 단순히 오락으로만 즐기기에는 시기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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