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시대를 증언하다] 시계탑은 도시의 상징이자 중심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4.08.06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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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을 넘어서게 한 근대의 축지법 철도와 전화

내일 아침에 일어날 시각을 ‘알람시계’에 입력시켜놓고 잠이 들어야 안심을 한다. 점심시간이 돼서 배가 고픈 것일까, 아니면 배가 고프니 점심때가 된 것일까. 이렇게 ‘근대화’란 인간이 발명한 시간에 의해 통제받는 것을 의미하며 그 시간의 단위가 더욱 정교하면 할수록 사회는 빈틈없이 짜 맞춘 대로 돌아간다.

지상 과제인 조국 근대화를 위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일사불란하게 조직해야 했던 1960~70년대 대한민국은 시간을 재는 ‘시계’라는 기계가 필요했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시계를 가질 만큼 그 값이 녹록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다. 대포를 쏘아 정오를 알렸던 개화기를 지나, 마을 소방서는 사이렌을 울려 정오를 알렸고, 라디오에서는 매시 시보를 울려 백성의 시간을 통제했다. 근대화된 도시에선 사람들이 모이는 사거리나 광장에 시계탑을 세웠다. 시계탑은 우리 근대화의 상징이자 도시가 근대화되어가는 데 필수적인 풍경의 중심이 됐다. 또 크고 작은 빌딩의 중앙에는 큰 시계를 박아 넣어 ‘사회적 기여’를 했고, 대학도 캠퍼스 중앙에 시계탑을 세웠다. 여전히 시계탑은 같은 시계를 통해 시간을 공유한다는 묘한 동질감과 소속감 그리고 연대의식이나 귀속감을 확장시켜 사람을 집단화하는 역할을 한다.

명동성당 종탑 시계, 남산의 꽃시계 ⓒ 정준모 제공
남산 꽃시계 전국으로 퍼져 18개 설치돼

이런 시계탑은 도시와 시민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계탑에 많은 공을 들이거나 장식을 하기도 했고, 도시마다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클럽이 중심이 돼 시계탑을 세웠다. 1969년에는 서울의 남산 음악당 진입로에 꽃시계가 만들어졌다. 계절마다 다르게 피어나는 꽃을 통해 사람을 구속하는 시간을 잊고 감상적인 시간으로 환유시켜주는 꽃시계는 당시 신진자동차 사장이 415만원을 들여 기증한 것이었다. 시침 2m, 분침 1.5m, 초침 2.5m의 대형 꽃시계에선 매시간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산의 꽃시계는 이내 서울의 명물이 됐고 곧 전국적으로 퍼져나가 1970년대에는 전국에 18개가 설치됐다. 1973년 만들어진 부산 용두산공원 꽃시계는 여전히 부산을 상징하는 명소로 사랑받고 있다. 

근대의 인간은 시계로 일상의 시간을 통제받았다. 그러자 인간은 시간을 뛰어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속도는 시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의 대안이자 시공간을 넘어서는 열쇠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간을 넘고자 만든 ‘속도 기계’는 시간의 틀 안에서 작동하면서 결국 시간의 범주 안에 모두를 확실하게 가둬버렸다. 대표적인 운송 수단인 기차는 매우 정교하게 짜여 있는 ‘다이아’ 즉 열차 운행 시간표에 의해 움직인다. 조금의 오차라도 생기면 커다란 사고로 이어지고, 운송 시스템은 마비되고, 모든 것이 정지되고 만다. 따라서 각 도시의 역 건물 중앙부에 시계가 자리하면서 시간 통제의 ‘위엄’을 강조했다. 그래서 역전 시계는 그 지역에서 가장 신뢰받는 시계였다.

그런 점에서 서울역 벽시계는 1968년 ‘파발마’라는 이름까지 얻으며 대한민국의 표준 시계 역할을 했다. 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시도하던 그 즈음 가장 시급한 것은 통신과 교통이라는 인프라였는데, 철도는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화물의 80%와 여객 수송의 50%를 전담한, 실로 한반도의 동맥이었다. 철도는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타임머신이자 공간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요물이었다.

당시 긴 꼬리를 여운처럼 남기며 벌판을 가로지르던 기차는 별천지 서울로 가는 ‘욕망’이라는 이름에 다름 아니었다. 무작정 상경한 농촌 출신 처녀·총각에게 서울역은 적어도 신세계의 집적이었으며 가난과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지막 비상구였다. 그 시절 철도는 어렵던 시절 낭만과 시정이 가득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서울로 올라온 농촌 총각·처녀는 청계천과 영등포, 구로에서 각자의 시간을 통제받으며 노동을 하다가 명절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역으로 몰려들어 ‘집단 귀향’이라는 풍경을 만들어냈다. 1960년 구정에는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려고 몰려든 귀성객이 넘어지면서 31명이 압사하고 49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다. 철도 보급과 도시화는 주말 근교 나들이란 풍속도 만들어냈다. 교외선 열차의 승강구에 위험천만하게도 매달려 송추나 청평으로 나가는 것이 주말의 풍경이 됐다. 철도의 위용이 정점에 달한 사건은 새마을호 등장이었다. 1969년부터 경부선에 투입돼 1974년 새마을호로 개명한 관광호는 당시 최고 시속 110㎞로 서울?부산을 4시간50분 만에 주파하면서 ‘전국 1일 생활권’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현했다.  

①디젤과 증기기관차가 나란히 달리고 있다. ②기차역에서 사용하던 전화기. ⓒ 정준모 제공
근대의 축지법, 철도와 전화

시간 통제를 통해 근대화의 위력을 실감하던 시기에 가속도를 붙인 것은 전화의 보급이다. 하지만 산업화가 가시권에 들어서는 1960년대 전화 사정은 최악이었다. 그나마 1962년 7월 서울 시내 10곳에 옥외 무인 공중전화기가 최초로 설치됐고, 1966년에는 탁상형 핑크색 간이 공중전화기가 등장하면서 차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던 다방은 전화를 거는 공간으로 기능을 확대했다. 벽걸이형 자동식 공중전화기가 등장한 것이 1969년이다. 주황색 공중전화와 공중전화 박스는 휴대전화가 대중화되기 이전인 1990년대까지 도시 풍경의 일부였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서는 여전히 이장 댁에 설치된 전화가 온 동네 공중전화로 사용됐다. 이장 댁 전화로 마을 사람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스피커에서 “00댁 서울 아들에게서 전화 왔소”라는 방송이 나오고, 그러면 허겁지겁 뛰어와 전화를 받았다. 1978년에 전자식 교환기가 도입되고, 1981년 전자교환기가 설치되면서 전화 적체 현상이 해소되고 전화는 재산의 상징에서 ‘현대 가정의 필수품’으로 서민의 품에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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