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내려놓고 낮은 데서 세상을 바꾸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4.08.13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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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어떤 행보로 감동 줄지 관심

교황이 한국을 찾는다.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25년 만에 방한하는 두 번째 교황은 프란치스코다. 방한 기간(8월14~18일)에 국산 소형차(쏘울)를 탄 교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을 앞두고 한국에서 생산된 작은 차를 타겠다고 고집했다. 숙소도 주한 교황청대사관 내 대사가 사용하던 방으로 정했다.

프란치스코는 권위와 물욕을 내려놓은 청빈한 모습으로 일반인과 함께하는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유력 일간지 ‘라 스탐파’의 바티칸 전문기자(안드레아 토르니엘리)는 저서 <따뜻한 리더, 교황 프란치스코>(서울문화사 간행)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겸손함, 확고한 믿음, 진실한 말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면서 신의 자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표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7월 이탈리아 남부 캄포바소에서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AP 연합
그는 말을 행동으로 실천했다. 지난해 3월13일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프란치스코는 교황 전용 의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추기경들의 축하 인사를 받았다. 성당 발코니에 모습을 보였을 때도 교황의 상징인 빨간 벨벳 망토(모제타)를 걸치지 않았고 빨간 구두 대신 일반 성직자가 신는 검정 구두를 신었다. 지난해 미국 남성 패션지 에스콰이어는 ‘올해의 베스트드레서’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정했다. “빨간 구두를 거부하고 검은 구두와 함께 장식 없는 단순한 예복을 입어 자신의 진보적인 신앙을 표출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날 저녁 추기경들과 시스티나 성당을 나서는 교황의 목에 대주교 시절부터 사용해온 은 십자가가 걸린 모습이 전파를 탔다. 금 십자가를 착용한 추기경들과 비교됐다. 교황은 준비된 전용 방탄차를 마다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그는 교황 공식 관저가 아니라 성직자들의 공동 숙소인 산타마르타의 집을 자신의 숙소로 선택했다. 비오 10세 이후 처음으로 관저 밖에서 기거하는 교황이 됐다.

즉위한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교황의 숙소는 산타마르타의 집 207호다. 그 다음 날에도 교황은 교황청 경찰차를 타고 성당으로 향했다. 수행 차량도 없었다. 성당에서 기도를 올린 교황은 콘클라베 전에 묵었던 교황청 밖 성직자 숙소로 향했다. 손수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온 교황은 그간의 숙박비를 계산했다. 숙소 지배인이 오히려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신문 가판대 주인에게 전화 거는 프란치스코

지난해 교황 선거(콘클라베) 직후 교황(당시 호르헤 베르골리오 아르헨티나 추기경) 옆에 앉았던 한 추기경은 그에게 포옹과 입맞춤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가난한 사람’이라는 그 말이 크게 다가왔던 교황의 뇌리에 12세기 성직자 성 프란치스코가 떠올랐다. ‘부(재산)는 자신의 것이 아니며 다른 이들로부터 잠시 빌려 쓰고 있다’는 성 프란치스코의 실천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정했다.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물질 만능에 물들어가는 세속을 질타해 세계인의 감명을 이끌어냈다. 그는 “뉴스에 주가지수가 2포인트 떨어졌다는 소식은 나오지만 늙고 가난한 사람이 노숙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은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돈은 봉사의 수단이지, 지배자가 돼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3월19일 공식적으로 266대 교황이 된 프란치스코는 즉위식에 각국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들을 초대했다. 모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해 주교들과 평신도들에게는 굳이 비싼 여행 경비를 사용하지 말고 그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기부할 것을 당부했다.

프란치스코는 특별함보다 평범함을 선호한다. 교황이 된 이후 아르헨티나 마요 광장 근처 신문 가판대를 운영하는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당분간 해외여행을 떠나 있으니 신문 배달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올해 초엔 아르헨티나 정부에 여권과 신분증 갱신을 요청했다. 아르헨티나 국민 자격으로 해외여행 허가를 받겠다는 것인데, 바티칸 시국 원수로서의 특권이 있음에도 그는 고국의 일반 여권을 그대로 쓰고자 했다. 여권 갱신 과정에서도 편의나 특권을 사양하고 일반인과 같은 절차를 밟아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종교를 초월한 인류애를 보인다.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 교황은 소년원에서 재소자 12명의 발을 씻어주고 입을 맞췄다. 재소자 중에는 여성·이슬람교도도 있었다. 올해 5월 이스라엘을 방문해 통곡의 벽을 찾아 기도했다. 그 후 아르헨티나의 유대교 랍비, 무슬림 지도자와 포옹했다.

권위와 물욕을 버리고 몸을 낮추는 습관은 프란치스코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1936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시절, 그는 양말 공장에서 청소하고 사무 보조 역할을 했다. 공업학교에 진학해서는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식품화학을 공부했다. 화학 기술자로 식품연구실에서 일하던 20세 때 중증 폐렴에 걸려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자 오른쪽 폐 일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았다. 젊은 시절엔 나이트클럽 경비원, 청소부로 일했다.

공장 청소부·나이트클럽 경비원 출신 교황

그가 아르헨티나 교회를 이끌었던 1976~83년은 군사독재 정권에 의해 잔인한 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수만 명이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정식 재판도 없이 납치·암살되고 비행기에 실려가 바다에 던져졌다. 부모를 잃은 자녀는 군인에 의해 키워지거나 먼 나라로 보내졌다. 해방신학을 따르는 사제와 신도들 중에는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많았다. 호르헤 신부(프란치스코 교황)는 “폭력의 대가는 항상 가장 약한 사람에 의해 지불된다”며 비폭력적인 방법을 고수했다.

그는 비밀경찰에 쫓기는 이들을 보호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대주교·추기경에 오른 이후에도 택시 대신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며 서민과 함께했다. 직접 요리한 음식을 들고 빈민촌을 찾았고, 에이즈 병동을 찾아 환자의 발을 씻기고 입을 맞췄다. 그는 슬럼가를 주재하는 신부의 수를 두 배로 늘리고 빈민을 위한 신부 조직을 별도로 창설하는 등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으로 일관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그의 취미는 특별하지 않은 우표 수집과 음악 감상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답게 탱고를 좋아하고 축구에 열광한다. 올해 7월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축구 결승에 오르자 세계인들은 교황이 고국을 응원할 것인지를 자못 궁금해했다.

그는 8개 국어를 구사하며 새벽 4시에 기상해 하루를 시작한다. 추기경 시절 아르헨티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불이 나면 성무일도서(교회의 전례서)와 수첩을 챙길 생각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할머니이고, 좋아하는 그림은 마르크 샤갈의 <백색의 그리스도 수난도>”라고 말했다.

그는 시리아 출신인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탄생한 비유럽권 교황이면서 2000년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최초의 아메리카 출신이자 첫 예수회 출신이다. 시쳇말로 비주류 출신이지만 그의 청빈한 모습은 가톨릭교회의 기본 정신과 맞아 교황으로 추대됐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에 큰 영향력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3년 미국 유력 시사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정했다. 올해 3월 미국의 유력지인 포천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 50인’을 뽑았는데 그중 1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올랐다.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의 교황

외신들은 지난해 교황이 가톨릭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점에 등극했다고 보도했다. 교황 앞에 난제들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건강상 이유로 조기 퇴진하면서 남겨놓은 미완의 숙제들이다. 그 숙제는 사제들의 성추문, 돈세탁 스캔들, 내부 권력투쟁 등이다. 전임 베네딕토 16세는 재임 기간 내내 바티칸을 둘러싼 추문에 시달렸다.

특히 유럽·미국 등지에서는 성직자들의 아동 성폭행 사건이 여러 차례 불거졌다. 베네딕토 16세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범죄”라며 피해자에게 사과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터진 바티리크스(바티칸과 유출의 합성어) 사건으로 교회 내부 권력투쟁과 비리 문제가 불거지면서 타격을 받은 교회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 교황청의 비밀스러운 재정 관리와 돈세탁 의혹도 청산해야 한다. 취임 이후 교황은 바티칸 금융감독기구인 금융정보국(AIF) 이사를 전원 해임하고, 성직자 중심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교황에 오른 지 1년 반 만에 세계에 ‘프란치스코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교황이 한국을 방문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관심이 높다. 신학자이면서 <교황과 나>를 쓴 김근수 작가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에서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데, 이는 중국·북한과 외교 관계가 없는 교황청이 그들 나라의 반응을 보자는 계산이 있는 것 같다”며 “교황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조사를 언급할지가 관심사인데, 그런 말을 하면 박근혜정부와 거리가 생길 수 있고, 하지 않으면 한국민의 반감을 살 수 있으므로 교황청은 고민이 많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해 땅에 입맞춤하고 있다. ⓒ 연합뉴스
베드로부터 프란치스코까지 약 2000년 동안 266대 교황이 나왔다. 베네딕토 9세가 3차례 교황직을 역임해 사람 수로는 264명이다. 평균 재위 기간은 8년이다. 베드로가 34년으로 가장 길고, 말라리아에 걸려 선종한 교황 우르바노 7세는 12일에 불과했다.

20세기 이전 교황의 영향력은 유럽권에 머물렀고, 세계 각국에 교구를 늘리는 역할에 한정됐다. 20세기 이후의 교황은 10명인데 권위를 내려놓은 모습이 공통점이다. 예컨대 수백 년 동안 사용해온 삼중관을 쓰지 않는 관행이 생겼다. 바오로 6세는 삼중관을 뉴욕 경매장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위해 기부했다. 후임자인 요한 바오로 1세는 “세속적 권력을 상징한다”며 삼중관을 쓰지 않았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삼중관을 쓰지 않았고,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의 문장(상징)에서 삼중관 그림을 뺐다.

성 요한 23세(재위 1958~63년)는 교황을 친근한 이미지로 바꾼 인물로 꼽힌다. 로마의 교도소를 방문해 죄수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자네들이 나를 보러 올 수 없으니까, 내가 자네들을 보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지칭할 때 교황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해왔던 ‘짐(朕)’이라는 공식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세계 평화 유지에도 적극 나섰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조짐을 감지한 그는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에게 전쟁 반대 입장을 밝히며 화해할 것을 촉구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황으로는 최초로 1962년 타임 선정 ‘올해의 인물’에 올랐고 ‘착한 교황’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후임 바오로 6세(재위 1963~78년)는 1969년 김수환 대주교를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했던 교황이다. 세계적으로 군비 축소를 호소하면서 군사 예산을 인도주의적 목적에 전용할 것을 촉구했다. 여러 차례의 성명을 통해 인구 문제, 세계 평화, 민족주의, 인종차별주의 등을 경고했다.

바통을 이어받은 요한 바오로 1세(재위 1978.8.26~9.28)는 일찍 선종해 아쉬웠던 교황으로 기록됐다. 6시간 동안 화려하고 장엄하게 진행하는 교황 대관식을 거부한 첫 교황이다. 소탈한 교황의 이미지를 가진 그의 재위 기간은 33일에 불과했다. 더 오래 교황직을 수행했다면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것으로 평가받는 교황이다. 침대에서 원고를 읽던 중 심장마비로 서거했다. 차동엽 신부는 “청빈의 사도인 요한 바오로 1세가 남긴 유산은 겸허한 미소였다”며 “‘미소 교황’을 보기 위해 주일마다 5만명 이상의 군중이 바티칸 광장으로 모였다”고 설명했다.

요한 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년)는 26년 5개월 재위 기간에 129개국을 방문해 분쟁과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특히 독일 통일에 기여한 교황이다. 1989년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만나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한 것은 냉전 시대 종식을 앞당긴 결과로 이어졌다. 이듬해인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타임은 독일 통일 초석을 쌓은 공로로 요한 바오로 2세를 1999년 ‘20세기를 이끈 지도자 20인’에 올렸다. 방문 국가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릴 때마다 땅에 입을 맞추며 경의를 표시했다. 주한 교황청대사관 공보관은 “요한 바오로 2세는 바티칸을 벗어나 여러 나라를 돌며 일반인을 만난 교황이다. 일반인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교황”이라고 설명했다.

교황을 둘러싼 어두운 기억도 있다. 베네딕토 9세는 문란한 사생활과 부정부패로 악명 높은 교황이다. 1032년부터 1048년까지 145·147·150대 교황을 역임했다. 1045년 그레고리오 6세에게 돈을 받고 교황권을 팔았으며, 2년 후 스스로 교황 자리에 올랐지만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레고리오 6세는 1046년 교황 매수 혐의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교황이었던 비오 2세(재위 1939~58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전 세계에 전쟁을 그만두라고 호소했고, 바티칸에 전쟁 난민을 수용했다. 특히 나치 독일을 피해온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레오 10세(재위 1513~21년)는 낭비벽, 면죄부 판매, 성직 매매, 권력 남용 등을 일삼았다. 다른 성당으로 행차할 때 교황청 재산의 4분의 1을 썼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았다. 결국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교황연대기>를 번역한 남길영씨는 “많은 교황이 좋은 가문 출신으로 풍부한 학식과 능력을 지녔지만 더러는 사치와 향락에 빠진 부끄러운 교황이 있었다. 권력욕에 눈이 멀거나 재산 축적에만 혈안이 되었던 몰염치한 교황, 지나치게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던 엄격한 교황, 외교적 수완이 부족했던 교황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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