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자들 눈 번뜩이게 하는 은밀한 그곳, 바티칸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4.08.1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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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대리인 교황 머무르는 바티칸…국제적 승인국 중 가장 작아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지금의 이탈리아 로마에 자리한 베드로의 무덤에 교회를 세우고 ‘성 베드로 성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교회가 정식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이때부터 이 땅에 사는 로마 주교는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전체 가톨릭 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고, ‘바티칸’은 교황의 땅이며 교회의 중심지가 됐다.

정식 명칭이 ‘바티칸 시티’인 이 국가는 참 작다. 면적은 약 0.44㎢. 우리 경복궁 면적과 비슷한 바티칸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은 국가 중 영토가 가장 작다. 

인구 800여 명의 국가가 11억 신자 지배

이탈리아 수도인 로마를 가로지르는 테베레 강 오른편에 위치한 바티칸은 로마에 포위된 듯 둘러싸여 있다. 그렇다 보니 국경은 자연스레 이탈리아와 접하고 있다. 과거 교황을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축조한 성벽이 바티칸을 보호한다. 성벽 밖의 일부 지역에도 바티칸의 주권이 인정된다. 로마의 남동쪽에 있는 교황 별장인 간돌포 성,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만든 로마 동부의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등이 그렇다. 바티칸 라디오의 송신소는 로마 교외에 위치해 있지만 그 부지 내에서는 바티칸의 치외법권을 인정받고 있다.

관광객이 끊임없이 방문하는 곳이지만 성 베드로 성당과 성 베드로 광장, 바티칸박물관 주변만 볼 수 있다. 교황의 거주지를 포함한 바티칸의 중심지는 여행자에게 개방되지 않는 은밀한 장소다. 이 은밀함은 댄 브라운의 소설을 좋아하는 바티칸 음모론자들의 단골 소재였다. 하지만 최근 바티칸은 교황 니콜라스 5세가 바티칸도서관을 설립한 지 거의 600년이 지난 지금, 일본 IT회사인 NTT의 도움을 받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중한 문서들을 디지털화하고 있다. 사유를 상세히 적어 출입 신청을 해야 했던 비밀의 문이 이제는 클릭 몇 번으로 열리게 된다. 

바티칸의 인구는 819명(2013년 9월 기준)에 불과한데, 시민 대부분은 가톨릭 수도자다. 추기경·사제 등 성직자와 수도사나 수녀들이 이곳에 거주한다. 교황청에서는 수도자가 아닌 약 3000여 명의 일반 직원이 업무를 보지만 이들 대다수는 바티칸 바깥 지역에서 통근한다. 바티칸을 지키는 근위병도 마찬가지다. 근위병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일단 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19~25세의 독신 남성이어야 하며, 신장이 174cm 이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스위스 국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6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칼 5세가 침공했을 때 150명의 스위스 근위병이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키며 장렬히 전사한 뒤 생긴 전통이다.

다른 국가와의 외교는 바티칸 시티가 아닌 교황청의 이름으로 연결돼 있다. 현재 세계 180여 개 수교국에 교황청 대사를 파견했다. 그렇기 때문에 명목상 바티칸의 여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교황청 외교관이나 각 부처 관료들은 교황청의 승인이 있을 경우에 한해 교황청 여권을 가질 수 있다. 교황청 여권은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외교 여권, 즉 파란색 여권이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청 여권 대신 모국인 아르헨티나 여권을 재발급해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일반 바티칸 시민에게 교황청의 여권은 발급되지 않는다.

바티칸은 로마 교황청이 통치하는 가톨릭교회의 ‘총본산’이다. 19세기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근대 국가가 곳곳에서 탄생하던 시절, 그 격동 속에서 교황령은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왔다. 1861년 이탈리아 의회는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를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로 정했지만,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교황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함부로 점령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하고 로마에서 철군하면서 교황령은 완전히 소멸됐다. 이후 교황은 여러 대에 걸쳐 스스로를 ‘바티칸의 죄수’라고 말하며 이탈리아 정부와의 협상을 거부했다.

교황령 귀속 대가로 경제적 토대 마련

대립이 계속되자 화해가 모색됐다. 화해는 1929년 2월11일 라테란 조약으로 결실을 맺는다. 이 조약은 당시 교황 비오 11세가 파견한 교황청 대표 피에트르 가스피리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 사이에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바티칸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라테란 조약은 바티칸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명확히 했다. 현재 바티칸의 모습은 이 조약을 기초로 이뤄졌다. 여기에 더해 조약의 1조는 바티칸에 경제적 토대를 제공해줬다. 이탈리아는 당시 조약 체결과 함께 교황청에 7억5000만 리라를 지불했는데, 이 돈은 교황령을 귀속시킨 대가였다. 당시 환율로 8500만 달러,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억 달러(1조373억원)에 달한다. 이 돈을 관리하기 위해 비오 11세는 재산관리국을 설치하고 성직자가 아니지만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베르나디노 노가라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노가라의 수완은 놀라워 그 덩치를 크게 키울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교황 피오 12세는 ‘종교사업협회(IOR)’를 만든다. 노가라의 수완 덕에 늘어난 바티칸의 재정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었는데 이것이 종교의 뒤에 숨은 신비주의 은행, 바티칸은행이다.

라테란 조약 이후 국가로서 모습을 갖춘 바티칸의 최고 통치자는 교황이지만 행정구역 바티칸 시티의 최고 책임자는 행정처장관(Governatorato dello Stato della Citt  del Vaticano)이다. 반면 세계 가톨릭을 관장하는 교황청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국무장관(Cardinal Secretary of State)이다. 국무장관은 바티칸 외교의 최고 책임자이기도 하다.

입법권은 바티칸 시티 위원회(Pontifical Commission for Vatican City State)가 갖고 있는데 위원들은 교황이 임명하며 임기는 5년이다. 교황이 공석이 되면 수석추기경을 제외한 각 부처 장관은 자동으로 해임되며 새로운 교황이 콘클라베에서 선정될 동안 추기경단 회의가 소집돼 바티칸을 관리한다.

바티칸의 공용어는 라틴어다. 공식 문서에도 라틴어가 사용된다. 그러나 업무에는 이탈리아어가 쓰인다. 외교에는 프랑스어를, 경호에는 스위스 위병들이 사용하는 독일어가 공용어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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